매거진 문화 살롱

나도 속았수다

창작과 표절, 그 사이의 언어적 틈에 대하여

by Funny Sunny

어린 시절, 영화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를 참 재밌게 봤습니다. 어떤 내용인 줄 모르고 우연히 봤다가 예상치 못하게 몰입했고, 마지막 반전까지 짜릿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창작과 표절이라는 주제를 만나면 종종 생각나는 영화입니다.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 요약

이 영화는 현실보다 영화 속 세상을 더 진지하게 여기며 살아온 병석(최민수)과 그를 질투하면서도 동경했던 명길(독고영재)의 교차된 삶을 그립니다. 병석은 어린 시절부터 극장 안에서 성장하며 현실과는 단절된 채 시나리오에 집착합니다. 반면 명길은 현실을 선택해 2류 감독의 길을 걷습니다.

어느 날 명길은 정신병원에 입원한 병석에게서 그의 생애 역작이라 할 수 있는 영화 대본을 넘겨받습니다. 명길은 이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영화를 만들고, 영화제 대상과 대중적 성공을 거둬 일류 영화감독으로 거듭날 기회를 갖게 됩니다. 그러나 곧 명길은 병석이 헐리우드 영화들을 교묘히 짜깁기하여 시나리오를 썼다고 의심하고, 병석을 찾아내 진실을 말하라 다그칩니다.

마지막 반전은, 병석조차 자신이 창작했다고 굳게 믿었던 그 대본이, 사실은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자신의 무의식 속에 쌓아온 수많은 헐리우드 영화 조각들이 조합된 결과였다는 것입니다.

영화 속 대사 -

명길: "왜 나를 망치려고 한 거야?"

병석: "한 가지만 믿어줘. 난 너를 망치려고 한 게 아니야. 난 너를 속이려고 한 게 아니란 말이야, 나도 내 자신에게 속은 거야! 모든 게 다 내 창작인 줄 알았어!"

영화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장면 발췌

창작과 표절의 경계를 어찌 봐야 할까요?


생성형 AI와 병석의 평행선: '무의식적 학습'과 '예측적 생성' 사이

위 영화 장면은 오늘날 우리가 생성형 AI와 협업하는 창작 행위에 던지는 질문과 깊이 닿아 있습니다.

ChatGPT 4o 같은 생성형 AI 모델은 방대한 데이터를 학습한 후, 다음에 올 단어를 예측하는 방식으로 문장을 생성합니다. 이 모델이 만들어내는 문장은 우리가 보기엔 놀랍도록 '말이 되는 말'처럼 보이지만, 그 본질은 의도를 갖고 인간이 창작하는 행위와는 다소 다른 ‘학습된 데이터(언어 패턴)에 기반한 통계적 예측'입니다. AI는 학습된 과거 문장들을 토대로 주어진 문장의 다음 단어로 가장 확률이 높은 단어를 덧붙여 문장을 이어갑니다. 결국 AI는 생각하는 대신, 그럴듯하게 예측하여 문장을 만들 뿐입니다.

병석이 무의식적으로 헐리우드 영화들을 흡수하고 이를 자기 창작이라 믿었던 것처럼, AI는 방대한 데이터를 '학습'하여 새로운 결과물을 내놓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질문과 마주합니다. 인간이 의도와 의지를 통해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과정AI의 예측 기반 생성은 어떻게 다를까요? 병석의 시나리오와 AI의 응답 사이에는 무엇이 다를까요? 창작과 표절의 경계는 어디에 있는 걸까요?


창작의 독창성 : 익숙한 언어 구조틈을 넣는 '인간의 의지와 의도'

사람들은 흔한 문장에 작고 미묘한 비틀림을 넣어 새로움을 창조합니다. 우리는 그걸 '창작'이라고 부르죠. 그렇다면 이 창작의 독창성은 언어 구조어떤 비틈에서 발생하는 걸까요?

질문에 대한 답을 작가 이외수 글에서 찾아봅니다.

작가 이외수는 언어의 틈과 충돌 속에서 창작의 독창성을 즐겨 일으킨 작가입니다. 그는 다음과 같은 이질적인 단어를 의도적으로 조합해, 익숙한 문장에서는 느낄 수 없는 감각의 전환을 이끌어냈습니다. 아래와 같은 식이죠.

슬픔의 매운맛

→ 슬픔은 감정이고, 매운맛은 미각. 서로 다른 감각계를 연결해 슬픔을 혀끝에 맺힌 듯한 물리적 체험으로 환기.

고독한 사막 위의 바이올린 소리

→ 사막은 정적, 바이올린은 섬세한 진동. 고립과 감정의 떨림을 동시에 암시.

피 흘리는 바람

→ 바람은 형태도 색도 없는 존재인데 ‘피’를 흘린다고 표현함으로써 시간의 상처, 공간의 아픔을 은유.

눈물 젖은 풍선

→ 풍선은 가벼움, 눈물은 무거움. 극단적 이미지의 병치를 통해 감정의 기묘한 부유감을 표현.

망치로 적는 시

→ 글쓰기는 보통 섬세한 행위, ‘망치’는 파괴적 도구. 창작을 해체와 해방의 과정으로 재해석.


논리적으로는 어색한 이 표현들이 오히려 읽는이에게 신선함을 느끼게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익숙한 언어에 의도적으로 비주어, 창작의 불씨를 틔워낸 결과라 생각합니다. AI가 단어를 예측적으로 나열하는 것과 달리, 이외수 작가는 개인의 경험과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 의도적인 언어의 충돌을 통해 새로운 의미를 창조했습니다. 독창성은 익숙한 패턴의 단어가 나열된 문장이 아니라, 흔한 문장과 충돌하는 의미를 갖는 단어의 조합 속에서 탄생하곤 합니다. 이는 인간 창작자가 가진 의도와 감정, 그리고 이를 통한 의미의 재구성이 창작에 어떻게 기여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현행 저작권법과 AI 시대의 표절 방지

현재 우리나라 저작권법은 크게 두 가지 기준을 통해 창작물과 표절을 구분합니다. 첫째는 '실질적 유사성'입니다. 단순히 아이디어가 비슷하다고 표절이 되는 것이 아니라, 아이디어를 표현한 방식이나 구체적인 내용, 전개 방식 등이 기존 저작물과 매우 흡사할 때 실질적 유사성이 있다고 봅니다. 둘째는 '의거성(의존성)'입니다. 즉, 기존 저작물에 의거하여(베껴서) 창작물을 만들었는지를 판단하는 기준입니다. 우연히 두 저작물이 비슷하더라도 기존 저작물에 대한 의거성이 없다면 표절로 보지 않습니다.

"출처 -

임원선, 「저작권 침해 유형과 침해 판단 기준에 대한 검토」, 계간 저작권 33(3), 2020. 한국저작권위원회 (원문 링크)

김경숙, 「저작권 침해판단에서 ‘실질적 유사성’ 개념의 재구성」, 계간 저작권 28(3), 2015. 한국저작권위원회 (원문 링크) "

그러나 AI 도구 활용이 늘어나고 있는 창작 환경에서, 저작권 문제를 단순히 '창작'이냐 ‘표절’이냐 이분법적으로 가르기는 점점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AI는 기존 데이터를 학습하여 새로운 결과물을 만들어내므로 '의거성'을 명확히 판단하기 어렵고, AI 생성물이 기존 저작물과 유사성을 보일 경우 누구에게 책임을 물을 것인지에 대한 논의도 복잡해집니다.


그렇다면 AI와 협업하여 창작물을 만들 때 표절을 피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 창작자의 명확한 의지와 의도입니다. 아래는 창작 과정에 AI 도구 활용 시, 표절을 피하는 방법 제안입니다.

핵심 아이디어는 인간이 주도 → AI는 보조도구일 뿐, 창작의 뼈대는 창작자의 몫

AI 생성물에 비판적 개입 → 그대로 쓰지 말고, 독자적인 수정과 재해석 필요

표절 검사 도구 활용 → AI 도구 활용 생성물 역시 기존 저작물과의 유사성 확인


창작과 표절의 경계면에 선 인간의 역할

한 대학 교수는 "같은 AI도구를 써도 학생들마다 결과물이 다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결국 핵심은 무엇을 할 줄 아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하려고 하느냐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창작의 이니시에이터(initiator)는 아직까지 인간의 몫이어야 하니까요. 의도에 부합하는 표현을 찾는 것은 AI도구를 활용할 수도 있지만, 그 표현의 시작점과 변화 방향 쓰는이의 의지와 의도, 그 방향타에서 비롯된다면, 결과물은 AI와 협업한 인간의 창작물이저는 생각합니다.

또한, 창작물뿐만 아니라 아이디어를 발전시키고, 고뇌하고, 수정하는 인간의 노력과 시간 역시 중요한 창작의 과정에 포함되고요.

이런 부분들이 반영된 시대의 변화로, LG 구겐하임상을 수상한 WhenWordsFail처럼, AI 도구를 활용한 창작물은 이미 예술계 전반으로 퍼지고 있습니다.(관련 기사 보기)

AI도구를 활용한 창작물 WhenWordsFail이 LG 구겐하임상 수상


겸허함을 지팡이 삼아, 모호함 속 한 걸음 더

생각은 언어로 이루어집니다. 언어는 대부분 어디선가 보고 들은 것들, 읽은 것들로 구성되죠.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아는 단어는 없습니다. 그렇기에 창작자에게 늘 필요한 건 겸허함이라 생각합니다.


'내가 생각해 낸 이 문장, 이 표현이 정말 '내 것'일까?'

'나도 모르게 내게 속고 있는 건 아닐까?'


우리의 문명이 종속하는 한 사람들의 창작 본능은 멈추지 않을 것이기에,

창작과 표절의 경계가 점점 모호해진다고 주저앉지 말고, 그 모호함에도 불구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것이 창작의 길에 선 인간 창작가가 취할 태도라 생각합니다.

창작이란, 결국 그 길 위에 자신만의 발자국을 남기는 일이니까요. 자신의 발자국에 대한 겸허함을 안고 말입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나를 보내지 마』- 가즈오 이시구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