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칫덩어리 보일러

전원주택과 아파트 중에

by 내복과 털양말

조금 잠잠하다 싶으면 보일러가 말썽을 부린다. 부품이 노후해서 물이 새거나, 배관이 터져서 물이 새거나, 내가 까먹은 다른 기술적 이유거나. 전원주택에 살기 시작하면서 처음으로 보일러와 직접 대면하게 되었다. 아파트에 살던 옛날옛적에는 아무것도 몰랐고, 빌라에 살 때는 보일러 버튼 눌러보고 뭐가 안되면 집주인에게 연락하면 그리 오래가지 않아 정상 작동하도록 집주인들이 조치를 해주었다. 그 사이에 나는 보일러를 실물로 볼 일이 없었다. 아, 그러고 보니 다세대주택에서 자취할 때 배관이 얼어서 허리 지지는 뜨끈이를 덮어놓고 최고 온도로 해서 물을 녹여본 적은 있다. 그게 다다. 그런데 전원주택에 들어오니 보일러와 나 사이의 관계가 얼굴만 아는 옆 반 아이가 갑자기 내 옆자리에서 매일 마주하는 짝꿍 사이가 되었달까.


보일러에 등유를 보충하면 요즘 기름값으로 두 드럼을 채우는 데 대략 60만 원은 나간다. (그나마 저렴하고 친절한 주유소 사장님과 단골을 맺은 뒤에 그렇다.) 겨울이 오면 아무래도 위아랫집 사이에 껴서 단열 효과를 보는 아파트나 빌라 시절과는 다르게 집이 춥다. 냉기가 돌고, 화장실은 상상 이상으로 춥다. 한여름에 이사 온 우리들에게 겨울에 화장실이 이렇게까지 춥다고 집주인은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물론 이건 집이 오래됐기 때문에 그렇다. 새로 지은 아들 친구집들은 전혀 안 춥다. 화장실 바닥에도 보일러를 깔아서 안 추운 정도가 아니라 그냥 따뜻하다.


우리 집에선 겨울에 화장실 안 온열기와 따뜻한 물을 틀어놓고 물이 데워질 때까지 화장실 밖에 있다가 온도 조절 끝에 잽싸게 따뜻한 물아래에 쏙 들어가면 씻을만하다. 처음엔 뭣도 모르고 덜덜 떨면서 기다렸다만. 날이 식으면 아들이 씻고 나와서 로션을 바르는 사이에 파들파들 떠는데 그 모습을 보면 미안하기 그지없다. 그래도 어쩌리. 현재 우리 상황이 이런 것을. 그래도 문제없이 보일러가 작동만 해주면 좋은데. 오늘 또 동네 배관 아저씨가 와보시기로 했다. 얼굴을 자주 봐서 이 정도면 마트에서 마주쳤을 때 인사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니 말 다했다. 골칫덩어리 보일러. 이제는 배관이 문제인 듯하다. 쉭쉭 소리도 나고 물도 샌다. 오래된 집이니 어쩔 수 없다.


집주인에게 이사 나가겠다고 알린 지 몇 달이 지났다. 전원주택의 단점이 이렇다. 집을 빼려면 오래 기다려야 한다. 들어와 사는 동안은 매우 좋지만, 이사가 쉽지 않으니 갑자기 삶에 변화가 닥쳤을 때 빠르게 반응할 수 없다. 우리는 계속 이 동네에서 살겠다고 마음먹었지만, 인생이 늘 마음먹은 대로 풀리는 게 아니라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 아닌가. 그래도 전원주택과 아파트 중에 고르라면 나는 전원주택을 고르고 싶다. 살면서 편안하고 자유롭다. 마당이 있어 텃밭도 하고 식물도 키운다. 아이는 자연을 자주 접하고, 마음껏 소리 지르고 뛰어다니면서 자라고, 여름이면 수영장 펴놓고 놀고, 선선해지면 마당에서 고기도 굽고 먹고, 봄볕 아래서 세 가족이 캠핑의자 가지고 나가 각자의 음료를 마시며 책도 읽는다. 집 밖으로 고개를 돌리면 눈에 걸리는 고층건물 없이 바로 하늘과 산이다. 난로에 참나무 때면서 그 향기도 즐긴다. 이 모든 장점들이 아들이 돌쟁이일 때 우는 소리 때문에 윗집 아랫집의 항의를 좀 받은 뒤 이곳으로 이사 와서 누리게 된 것들이다.


유지비가 많이 든다고들 하지만, 매달 아파트 관리비 나가는 것과 총량은 크게 차이 나지 않는 것 같다. 한 계절에 몰아서 내느냐 열두 달 나눠 비슷하게 내느냐 차이다. 아파트에서만 살다가 성인이 되어 반지하에서 언덕 꼭대기에 있는 빌라까지 다 경험한 내가 선택한 최종안이 전원주택이 될 수밖에 없다. 다닥다닥 붙은 공동주택에서 벗어나고 보니 돌아가기 싫어졌다. 그저 돈만 있으면 된다. 골칫덩어리 보일러도 없고, 웃풍 드는 집도 아니면 아무 문제가 아니게 되니까. 혹시 전원주택 생활이 우리에게 안 맞을지도 모르니 전세로 살아보자고 시작했는데, 이렇게 잘 맞을 줄 몰랐다. 이 집이 나쁘기만 한 것도 아니고, 여기 살면서 반짝이는 순간도 참으로 많았다. 그저, 이 집에선 살 만큼 산 것 같아서 옮겨가고 싶은데 그게 잘 안 된다. 이 집은 대체 언제 나가게 될까.


작가의 이전글나에게 쓰는 편지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