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선생 천지

三人行 必有我師

by 내복과 털양말

세상은 선생 천지라고 엄마는 자주 말했다. 사람 셋이 모이면 필시 그중 한 명에게는 배울 게 있다고. 三人行 必有我師. 공자님 말씀이라고 했다. 방금 다시 찾아봤다. 사실 누구 말씀인지 잊고 있었다. 먼 옛날 중국의 어느 현자의 말이겠지, 하고 넘어간 지 너무 오래되어 확인해 봤다. 여하간, 엄마와 나와 성향이 참으로 안 맞지만 그렇다고 엄마의 말이 다 틀리게 다가오는 건 아니다. 분명히 세상은 선생 천지다. 무엇을 배울지, 무엇을 하면 안 될지 남의 행동을 보고 배울 수 있다. 이 이야기를 왜 적었지?


아. 아들과의 대화를 남편에게 말한 걸 생각하다 썼다. 얼마 전에 (늘 그렇듯) 아이와 대화 중이었다. 아들은 유치원에서의 즐거운 시간을 말해주었다. 너무 좋아 보였다. 이야, 네 인생은 참 즐겁구나. 그랬더니 아들이 말하는 게 가관이었다.


엄마. 엄마 인생 아직 많이 남았어. 엄마 인생도 좋아.


나는 잠시 조각상처럼 가만히 있다가 한 박자 늦게 반응했다.


그래. 맞아. 내 인생도 좋아.


남편은 아들 녀석이 현자라고 했다. 아들도 내 선생이다. 아이를 키우면 부모가 배운다는 말은 너무 틀에 박힌 말이다. 새로울 것 없는 정도가 아니라 지겹디 지겹고 식상한 이야기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많이 언급한 말이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으니까. 다들 새삼 이게 진실이라는 걸 느끼고, 딱 그 말 이외에 적합한 표현이 없다고 생각한 사람이 많아서다. 나는 말을 마치고 가만히 아들을 바라보다가 삼인행 필유아사를 알려줬다. 누구든 보고 배울 수 있는 거라고. 내 모습을 보고 안 좋은 게 있으면 저러면 안 되겠다는 걸 배우고, 내 모습에서 좋은 게 있으면 꼭 배우라고 말하진 않았다. 그냥 외할머니가 알려준 좋은 말을 알려주는 선에서 그쳤다. 아마 아들은 기억할 것이다. 기억할 만한 녀석이다.


그래. 내 인생도 좋다. 아직 많이 남은 것도 맞다. 좋은 선생이 많아 좋기도 하다. 아들은 내가 내 인생을 대단히 자랑스러워하지 않는다는 걸 은연중에 느낀 걸까? 이 경우에 내 선생은 아버지다. 자기 인생에 자랑스럽지 않은, 상처받고 숨어버리는, 자신감 없는 모습일 때, 숨으면 안 된다고 가르치는 선생이다. 아버지는 숨었다. 아버지가 세상과 공유하는 유일한 연결고리는 엄마다. 모든 긍정부정의 감정이 다 엄마에게로 흘러간다. 엄마는 아버지가 이해 간다고 생각한다지만, 난 이미 엄마가 아버지와 동화되어 그런 거라고 생각한다.


아버지와 똑같이 중풍으로 오른쪽 반신이 마비된 분을 보았다. 평소에 내가 잘 가지 않던 동네였는데, 어디였지. 성신여대나 고대 쪽이었던 것 같다. 부츠 바닥이 닳아서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부츠를 수선하러 들어갔더니, 아버지처럼 오른손이 접혀 굳은 아저씨가 계셨다. 그분은 시간이 오래 걸릴 텐데 괜찮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전혀 문제없다고 했다. 그분이 성한 왼손으로 전한 털슬리퍼를 받아 신고 맞은편에 앉아서 밑창을 수선하는 모습을 보았다. 아버지 이야기가 저절로 튀어나왔다. 저희 아버지도 딱 오른쪽 반신이 마비시라고. 사장님 자제분들이 분명히 사장님을 자랑스러워하실 거라고. 부츠 수선에는 두 시간 반이 소요됐다. 그분의 손에서 눈을 떼기 쉽지 않았다. 그분의 첫째는 가끔씩 퇴근하다가 들른다고 했다. 자식들이 자랑스럽다고 말해줬다는데, 그 말씀을 하실 때 쑥스러워하셨다. 나는 가게에 들어가서 먼저 말을 거는 편이 아닌데 그날은 그곳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내 아버지와도 한 번도 나눠보지 않은 허심탄회한 대화였다. 서울 모처의 차가운 공기 속에서 우연히 찾아낸 따스함이었다. 그분도 선생이다.


지금 내 인생이 딱히 자랑스러울 건 없다. 그냥 엄마다. 나름대로 잘 해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육아효능감은 있는 엄마다. 그 점은 어깨가 으쓱해질 만하다. 그런데 그거 말고는 없다. 남편이 일 관계로 아는 사람 부부와 함께 저녁을 먹기로 했다. 나는 밖에서 꺼낼 수 있는 이야기 주제가 아들밖에 없다. 글을 써서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했으니까 그 부분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싶었다. 그 생각을 하니 자식밖에 모르는 엄마가 되는 기분이라 그리 내키지 않았는데, 아버지를 떠올렸다. 숨으면 안 되었다. 새로운 사람도 만나고, 그러다 보면 이야기 도중에 신선한 아이디어를 얻을 수도 있다. 함께 식사하자고 했다. 아버지라는 선생을 생각했다. 처연한 나의 선생을.


그러니까, 이건 그냥..

처음 보는 사람과 식사 약속이 잡혔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약간 긴장한 상태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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