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쓰는 편지 4

부끄러워

by 내복과 털양말


안녕.


네겐 요즘 생각 중인 이야기가 있지. 문제도 있어. 이야기가 마치 집합 부분만 새카맣게 때가 탄 수학의 정석 같아. 그게 문제지. 결과물이 거지발싸개처럼 나온다 해도 일단 다 써야 발싸개라도 되는데. 내가 썼던 부분인가? 언급한 내용인가? 싶어서 파일을 여러 개 열어보면 오히려 더 정신 사납지? 넌 결국 수시로 들고 다니는 수첩을 꺼내어 적으며 정리해 봤어. 안개가 조금 걷히는 기분이 들지. 이제 “기”를 넘어서 “승”으로 넘어갈 수 있으려나! 이래서 역시 손으로 써봐야 정리가 된다고 하는 건가! 아, 구관이 명관인 건가 역시! 정리부터 마쳐야겠어.


처음으로 장편 시나리오를 마쳐보았을 때도 그랬지. 큰 종이에 이야기 흐름을 표로 만들고, 언급할 내용 적어놓고, 인물 정리해 놓고 늘 눈에 보이는 곳에 붙여놓았어. 그땐 혼자 사는 자취방이어서 그랬지. 지금도 그러고 싶기는 하지만 아이나 남편이 알게 된다고 생각하니 부끄러워 못하겠네. 아들은 우리 엄마가 요즘 소설 쓴다고 눈 마주치는 모든 어른들에게 말할 거야. 절대 들킬 수 없지. 남편이 생일 선물로 사준 검정 수첩에다만 써야지.


남편의 생일이 다가오네. 무슨 선물을 사면 좋을까? 내가 그의 일상에 관심을 기울인다는 걸 보여줄 만한 선물을 생각해야 하는데. 사실 어쩌면 남편에겐 내가 쓴 글로 돈을 벌어오는 게 제일 큰 선물일지도 몰라. 경제적 짐을 나누어지는 걸 가장 바라고 있을지도. 글쎄 이것도 뭐 나만의 생각일지도 모르지. 그건 내가 그냥 찔려서야. 전업주부라는 입장이 모두에게 나처럼 당당하지 못한 건 아닌데. 지금의 내겐 확실히 그러하지만. 난 이렇게 늘 주변을 살펴. 불편한 마음으로.


곱씹을 만한 거창한 성과는 없지만, 그래도 잊지 마. 네가 오늘 산 책 <언제나 기억해>에서 동물들과 소년이 하는 말을. 화려한 꽃만이 꽃은 아니잖아. 마흔 중반이라도 뭘 써보려고 할 수는 있는 거잖아. 토닥토닥. 너 말고 누가 네 어깨를 토닥이겠니. 용기를 내. 오랜만의 편지인데, 생각하고 보면 난 나를 자꾸 응원하고 싶은가 봐.




그럴 수도 있지, 뭐.

또 응원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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