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시간 가져보자
아들에게,
휘몰아치던 일들이 지나갔어. 풀빌라에 가서 친구들과 물놀이도 했고, 다음날 아침에 일찌감치 집에 와서 학교 예술제 공연도 했고, 그거 끝나고 할아버지댁에 가서 잤다가 함께 시제를 지내러 할아버지 고향에도 갔지. 네 아빠가 찍어 보낸 사진을 보니 여러 명의 할아버지 가운데 일곱 살의 네가 혼자 앉아 무언가를 먹고 있었지. 엄마는 그 사진을 보면서 소설 작품의 한 장면 같다고 생각했어. 디스토피아 소설 말이야. 엄마 마음대로 그 사진의 제목을 "최후의 자손"이라고 지었어. 웃긴 했다만, 마냥 웃기만 할 수는 없는 사진이었지. 여하간 너는 거길 가서도 인사를 잘했고, 용돈도 받아왔지. 그렇게 한 주의 주말이 요란하게 지나갔구나. 수고했어. 네가 많이 웃으며 보내서 엄마아빠는 즐거웠어.
교체한 새 보일러에서 소리가 크게 나서 조금 있으면 보일러 기사님이 오실 거야. 옛날 보일러를 드디어 치운다고 좋아했더니만, 새 보일러도 말썽이구나. 이 집에서 언제쯤 이사 갈 수 있을지, 이사 가게 될 집은 또 어떻게 구할지, 부동산 정책 기사를 보면 불안해서 가슴이 두근두근하기도 해. 그래도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해. 그 때문에 더 열심히 살 이유가 되겠지, 하면서. 보일러 기사님은 늦어도 오후 몇 시까지는 오겠다고 하시니 대략 그 시간은 되어야 오시지 않을까 싶어. 운이 좋으면 그보다 일찍 오신다는 거겠지. 처음에는 왜 이렇게 시간을 명확하게 박아두지 않는 건지 불만스러웠는데,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겨. 그렇게 넘길 일은 앞으로도 많겠지.
엄마는 주말을 기다리고 있어. 그때쯤에 가정용 물레가 도착한대. 네가 물레체험을 한 뒤로 도예공방에 자꾸 가고 싶어 하길래 샀어. 도예체험 원데이클래스에는 6만 원이 들지만, 가정용 물레로는 네가 원하는 만큼 돌릴 수 있잖니. 푹 빠져서 물레 돌리는 네 모습이 너무 좋았어. 그런 순수한 몰입의 순간을 많이 경험해봐야 하거든. 어린 시절부터 단기적인 고자극 희열에 중독되어 버리면 삶이 무너진단다. 최악의 경우, 네가 한 번만 하고 더는 안 쓴다고 할지라도 찰흙값까지 다 합쳐도 원데이클래스보다는 저렴하니, 도예수업에 등록하지 않은 만큼의 돈으로 또 다른 즐거움을 찾아 나설 수도 있지. 도착예정일이 금요일이라고 떠. 엄마랑 같이 즐거운 시간 가져보자.
천권의 기적 프로젝트는 생각보다는 진행이 느려. 하지만 너는 네가 주도적으로 책을 읽는 아이니까 엄마가 저 프로젝트 스티커 언제 다 붙이냐고 재촉하지는 않을 거야. 만화책도 많이 읽지만, 동화책도 잘 보고, 재미만 있어 보이면 글밥이 좀 있는 책도 너는 곧잘 읽으니까. 넌 이미 천 권 넘게 읽었을 거야. 저 프로젝트에는 양질의 작품을 선별했다는 점이 그래도 강점이니 계속 하긴 하자.
너는 정말 잘 자라고 있어.
엄만 그저 네가 바라는 대로 많이 웃는 사람이 되도록 해볼게.
사랑해.
엄마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