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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복과 털양말 Dec 11. 2024

선한 인간과 결혼하기

다시 너그러운 사람으로 돌아올 사실


  우리의 결혼 기간은 10년을 넘겼다. 그 사이 키 이야기가 나오면 남편이 실제 키보다 1센티 높다고 주장한다는 농담을 했다. 툭하면 꺼낸 건 아니지만, 키 이야기가 나오면 같은 농담을 반복했으니 기분이 나빠하는 걸 상식적으로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남편은 어차피 작지 않은 키니 1센티 가지고 농담을 해도 그저 농담으로 피식거리고 말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며칠 전에는 아니었다. 바로 불쾌한 티를 드러냈다.


  남편은 내가 빈정댄다고 말했고, 자기의 말을 믿어주지 않는다고 말했다. 빈정댄다는 말만큼은 듣고 싶지 않았다. 내가 빈정거림을 극도로 싫어해서 그렇다. 같은 레퍼토리의 농담을 계속 해댔으니, 듣기 좋은 꽃노래도 한두 번이지, 화를 낼 수는 있지만 본인의 말을 믿어주지 않는다고 말할 줄은 몰랐다. 나는 속으로 너무 놀랐고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했다. 마음은 불편했지만, 받아들이고, 그가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렸다. 그럼에도 불안하지 않았던 건 길지 않은 시간 안에 화를 풀고 다시 너그러운 사람으로 돌아올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저 내가 나를 공격할까 봐 나를 다독였다. 그날 내가 나에게 보낸 카톡을 보면 이렇다.


  괜찮아.

  마음 착한 사람이야.

  의도적으로 널 괴롭게 만드는 게 아니야.

  시간을 믿어.

  괜찮아.

  괜찮아.

  내버려 둬.

  넌 괜찮아.

  네 안의 약한 어린아이도 이제 일어나야 해.

  하나의 잘못을 계속 곱씹으면서 자책하며 스스로를 공격하는 것도 그만해야 해.

  부정적인 언행에 부정적인 결과가 따라온 거야.

  당연한 인과관계일 뿐이야.

  다음 행동엔 반영해서 말과 행동을 개선하면 돼.

  너는 너를 사랑해야 해.

  너를 괴롭히지 마.


  말풍선이 하나씩 내 생각을 보여줄 때마다 마음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그는 밤까지 마음이 상해있었지만 다음날 아침 내가 다시 사과하니 쉽게 받아주고 화를 풀어주었다. 나는 남편에게 그런 믿음이 있다. 저 사람은 선한 사람이고, 내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뒤틀린 욕망을 채우려 들지 않을 사람이고, 다시 따뜻한 남편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사실을 믿는다. 그 사실을 안다.

  타오르는 사랑으로 결혼해 잔잔하게 살고 있으면서 여러 색깔의 사랑을 경험한다. 하지만 사랑도 끝나고 나면 남는 건 그 인간 자체다. 내게 우호적인 선한 사람이 옆에 있다는 건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사소한 말다툼 하나에도 저렇게 많은 말풍선을 자신에게 보내며 겨우 마음을 달래는 유약한 내 곁에 남편 같은 사람이 있다는 건 그야말로 천우신조다. (이런 나를 점점 더 능숙하게 다룰 방법을 찾을 수 있었다는 것도 다행이다.) 결혼은 지옥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허다하지만, 나는 세상에서 제일 잘한 일이 결혼이었다. 크게 다투어도, 작게 다투어도 그 생각은 변함없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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