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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복과 털양말 Nov 21. 2024

숨을 쉬자

이제라도


  최근 며칠간 머리를 떠나지 않은 생각이 있었다. 바로 내가 나를 가련히 여긴다는 것이었다. 나는 스스로 불쌍해하고 있었다. 자기 연민이라. 찾아보았다. 어떤 지점에서 나를 불쌍히 여기는 건지, 그 불쌍한 나를 상처로부터 보호하려는 반응이 어떤 양상으로 드러났는지 자기 연민과 피해의식에 대한 글을 찾아 읽었다. 그리고 마침내 내 내면을 흐릿하게나마 그려볼 수 있었다.     


  어른이 되고 엄마가 된 뒤로도 사랑이 너무 고팠다. 그런 어린이의 모습으로 여전히 살아가고 있었다. 부모에게뿐만이 아니라 남편에게도 그랬던 것 같다. 아니라고 말하면서도 그 뿌리 깊은 욕망을 뽑아내지 못했다. 인정하자. 사랑받기 위해서 상대의 요구에 맞추려고 기를 썼고, 그 요구를 내가 충족하지 못할 때 더 심한 자기혐오에 빠지면서 더더 사랑받지 못할 가련한 존재가 되어버리는 악순환을 뱅뱅 돌고 있었다. 오래된 우울을 앓으며 오랜 시간 허덕였고, 정신과의 도움으로 최악의 상황에서 탈출하긴 했다. 그런데도 여전히 아이의 마음으로 살며 사랑과 인정을 계속 갈구했다. 건강한 자존감은 자신의 어둠도 긍정하는 사람이라던데, 정신과 치료를 졸업한 지금까지도 나는 건강한 자존감을 쌓지는 못했다는 현실을 인식했다.

  털어놓자면, 나는 극장에 가서 <사도>를 보면서 눈물을 그야말로 폭포수처럼 흘렸다. 영조가 등장하면 내가 사도세자라도 된 듯 이번엔 또 무슨 말을 하여 가슴을 찢어놓으려고 저 입을 벌리는가 하며 가슴에 돌덩이를 세 덩어리 얹은 기분을 느꼈다. 기대를 충족시키기 못하는 어린이, 뒷전으로 밀려난 어린이, 실망스러운 어린이, 사랑보다는 평가를 받고, 믿음이라는 이름의 압박에 시달린 아이. 그래서 마음 깊이 나를 미워한 아이로 계속 지냈다. 아들을 낳으니 가슴속의 불행한 아이가 발을 동동 굴렀다. 이젠 저 아이가 너 같아질 거야! 네가 그 고통을 같이 짊어질 수 있는 것도 아니면서! 이제 어쩔 거야! 이런 무책임한 인간! 서툰 육아 과정 속에서 무자비하게 나를 비난했다.

  그래. 그게 내 슬픔이었고 마음이었고 나였다. 내가 곧 슬픔이었다. 어쩔 수 없다.      


  하지만, 내가 그렇게까지 사랑받지 못한 사람이었나 되짚어본다. 내가 우울의 극단을 달릴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사랑하여 결혼을 하고 나를 닮은 아들도 온마음으로 사랑하는 남편이 있다. 내 단점이 마음에 들지 않고, 내 단점으로 마음에 상처도 많이 받았을지언정, 그대로 받아들여준 그릇이 큰 남편이 있다. 그의 존재 자체가 커다란 감동이었다. 사랑의 원천이 꼭 부모일 필요가 있었을까? 어쩌면 나는 내가 봐오던 아이와는 다르게 충분히 사랑받고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었을 수 있다. 아들과 남편에게 깊은 사랑을 받고 있고, 그런 사랑을 받을 면모를 확실히 가진 사람이다.

  내가 이렇게 슬픔이 되어 밤에 몰래몰래 울어가며 살아올 필요가 있었을까? 내 슬픔을 유발한 기억이 정말 사실에 기반한 기억이 맞았던 걸까? 슬픔에 중독되어 더 큰 슬픔을 갈구하여 삶을 외면하고 그 안에 갇혀있길 원했던 건 아닐까? 그러지 말자. 이제라도.


  앞으로 수시로 오늘의 생각을 상기할 것이다. 불안도 낮출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사랑받고 싶었다. 이 일곱 글자를 내 손으로 쓸 수 있기까지 몇 년의 시간과 얼마만큼의 알약이 필요했던지.


  숨을 쉬자. 숨을 쉬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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