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개인의 역사

할멈

by 내복과 털양말

처음 이 글을 쓸 때는 제목을 "할멈"이라고 불렀다. 삶의 대부분을 휘둘리다 벗어날 용기를 가지게 된 날 쓴 것 같다. 썼다 지웠다 반복하고 어딘가에 올렸다 삭제했다 오락가락한 글이었다. 뭔지 모르겠지만 끝내 삭제 못한 글이었다. 다시 생각해 보니 멀리 떨어져서 나를 본 내 개인의 역사 같다. 할멈, 이별이야. 영영. 그랬으면 좋겠어.






백지를 보다 책장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를 번갈아 하다 보니 어느새 한 시간이 흘렀다. 갈 길을 찾지 못하는 손가락이 그저 의미 없는 글자를 나열하며 꾹꾹 키보드를 누른다. 지글지글 끓는 바닥이 엉덩이를 구워버릴 것만 같다. 글을 써보겠답시고 멋지게 선포를 한 뒤 어느덧 20년이었다. 하지만 무엇이 글을 쓰지 못하게 하는지에 대해 핏대 올리며 비운의 작가지망생 역할에 푹 빠져 지내다가 정작 글을 쓸 수 있는 상황이 되자 당황하여 얼었다. 무엇을 쓸지 아무런 생각도 없었다. 지금까지 찌그렸던 몇 편의 습작 또한 다들 오프닝만 써놓고 그쳤다. 그 뒤부터는 어떤 내용을 그릴지 생각이 나지 않아서였다. 그녀의 머릿속이 얼마나 텅 비어있었냐면 그녀 스스로가 자기처럼 생각이 없는 인간이 글을 쓰겠다는 생각은 어찌했나 생각해 볼 지경이었다. 그녀는 일어나 커튼을 닫았다. 훤한 대낮에 일부러 빛이 들어오는 곳을 꽁꽁 닫아뒀다. 그래야 마음이 편해졌다.

오늘 그녀는 자기가 잘하는 게 있는지, 있다면 무엇인지 적어보기로 했다.

아무래도 없는 것 같았다. 있었다면 창을 열어놓고 한 시간 동안 글자를 썼다 지웠다 반복하기만 하진 않았을 터. 그러나 두 시간째가 되자 그녀는 지우지 않을 문장을 하나 썼다.


자기를 업신여기기.


곰곰이 생각해 보고 쓴 문장이었다. 정말 자기 자신을 업신여기는 데에는 그녀보다 능한 사람이 없을 것 같았다. 그녀의 마음 한 귀퉁이에는 깐깐한 할멈이 앉아있다. 어떠한 일에도 흔들리지 않고 객관적인 평가만 내놓는 할멈이었다. 할멈의 객관적인 평가를 거치면 언제나 실망스러운 결과가 있을 뿐이었다. 주변 친구들이 그녀의 기운을 북돋워 주려고 긍정적으로 평가하면 그 깐깐한 할멈은 한사코 그 평가를 부인했다. 외부적인 이유가 있었다거나, 직접적인 도움이든 간접적인 영향이든 무언가가 그녀의 마음에 들어왔기 때문에 그녀가 뭐라도 해낸 것이라고, 그러한 외부 요인이 없었더라면 해내지 못했을 인간이라고 주장했다. 그녀가 이루어낸 시시한 성과 중 그 어느 것도 할멈의 날카로운 눈을 피하지 못했다. 그녀는 할멈을 무서워했다. 할멈을 떠올리면 손가락 끝이 얼음장이 되었고 손이 바들바들 떨릴 지경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할멈의 말을 누구보다 높이 샀다. 처음엔 아닌 것 같아도 돌이켜보면 결국 다 할멈의 말이 맞았노라고 여겼다. 할멈의 말이 상처가 되어 눈물이 그렁그렁할 때조차 할멈의 옳은 말을 부인할 수 없다고 했다. 할멈은 그녀를 업신여겼고, 그녀도 할멈을 따라 그녀를 업신여겼다. 그러니 그녀가 자기를 업신여기기를 가장 잘한다는 건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거기까지 생각하니 가슴이 쿵덕댔다. 그녀는 책장에서 눈에 보이는 것들의 제목을 닥치는 대로 읽어 내려갔다.


자기 앞의 생

나의 아름다운 정원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체공녀 강주룡

다시 한 번 리플레이

드니로의 게임

록키

브이 포 벤데타

소설

1984

동물농장

노인의 전쟁

눈먼 자들의 도시

그 나라 하늘빛

중국 명시 감상


시집과 소설책과 영화 dvd가 무작위로 뒤섞인 그녀의 책장을 큰 소리로 읽다 보니 그녀의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다. 할멈을 떠올리면 단 한 번의 예외도 없이 스스로 한심해서 미칠 지경에 이르렀다. 얼마 전에는 운전대를 잡은 채 가슴이 쿵덕거려서 눈에 보이는 간판이란 간판은 닥치는 대로 다 소리 내어 읽은 적이 있었다. 그러다 보니 마음을 조금이나마 다스릴 수 있었다. 그 후 그녀는 할멈이 나타날 때마다 이 방법을 유용하게 써먹었다.

그녀가 이렇게 백지를 눈앞에 두고 할멈과 싸우는 일은 종종 있는 편이었다. 이번에는 ‘자신을 업신여기기’라고 썼지만, 자기가 가진 장점을 써내는 날도 있었다. 그런 날이면 그녀는 승리감에 젖어 기분 좋은 저녁을 보내기도 했다. 나도 그렇게 한심한 인생은 아니야, 하면서. 하지만 저 승리감이 생활에 보탬이 되어주진 않았다. 어째서 이 피 말리는 전쟁이 아무런 물리적인 성과를 낳지 못하는 걸까, 한탄하며 할멈과 싸워 이기기 전보다 더 심한 우울에 빠졌다. 그녀는 정물처럼 소파에 덩그러니 앉아 몇 시간을 보내다가 울음을 터트리기도 했고 초점 없는 눈으로 종일 어두컴컴한 방 안에 누워있기도 했다. 종이를 꺼내놓고 할멈과 싸우려 드는 건 그나마 의욕적인 날인 셈이다. 그녀는 다시 숨을 가슴 가득 들이쉬고 천천히 내쉬었다.

작가의 이전글브런치북 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