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고 싶어요

쓰리, 투, 원, 고오오오오오, 슛!

by 내복과 털양말

아들에게,


간밤에 비가 많이 내리더니 네가 등원할 때까지 꽤 내렸어. 안개가 자욱하고 구름이 낮게 내려앉은 모습을 보니 비가 많이 오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벌써 그쳤네? 이따 태권도 다녀올 때도 계속 이랬으면 좋겠다. (태권도하니까 생각나네. 엄마는 태권도는 학원에 속하지 않는다고 생각했거든. 체력 단련하러 가는 곳이라고 생각해서 그런지 태권도장을 학원이라고 부를 생각도 안 해봤는데, 전담사 선생님도 네 유치원 친구 엄마도 네가 학원에 간다고 말하더라고. 엄마 머릿속에서 학원은 가만히 앉아서 계속 이어지는 수업을 꾸역꾸역 들으며 머리에 쑤셔놓는 곳인데, 다른 사람들은 아닌가 봐.)


어제는 너랑 소리를 질러가며 베이블레이드 배틀을 했더니 허리가 쑤시네. 그거 어떻게 좀 의자에 앉아서 하면 좋겠는데, 바닥에 놓고 하는 게 분위기가 나긴 해. 엄만 처음에 요즘 애들은 팽이를 돌릴 줄 몰라서 저런 장난감이 나오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일본 만화에서 나온 팽이더라고. 팽이도 팽이라고 부르면 안 되고, 네 말대로 “베이”라고 부르고 말이지. 웃기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하고. 일본이 워낙 그런 걸 잘 만들잖아. 피 끓는 소년물 말이지. 엄마도 어릴 때 <슬램덩크> 보면서 엉엉 울고, 네 아빠 만나선 <원피스> 보면서 엉엉 울었지. 불주먹 에이스가 죽은 뒤로는 안 봤지만. 엄만 불주먹 에이스를 좋아하거든. 너도 나중에 자라서 봐봐. 재미있어. 네 아빠가 1권부터 하나도 빠지지 않고 지금까지 100권이 넘어가게 모아놨어. 어제만 해도 원피스 최신권이 몇 권인지 바빠서 잊고 살았다면서 교보문고 앱 열어보던걸.


네가 “이기고 싶어요.”라고만 말하지 않았어도 안 사줬을지도 몰라. 늘 앞에서 알짱대면서 “내가 너를 이길 거야.”라고 말하는 유치원 친구한테 너는 베이블레이드로 계속 지기만 했댔지. 그래서 이젠 이기고 싶어 졌다고 했어. 엄마아빠의 귀가 확 뚫리면서 “이기고 싶어요.”란 말이 콱 박혔지. 아, 사줘야지. 네가 이기고 싶다는데. 그래서 당장 당근으로 베이블레이드 경기장과 런처, 베이들이 올라온 걸 샀는데, 아무래도 다 중고이다 보니 네게 하나 정도는 새것을 사주고 싶었지. 그래서 고른 것이 실버울프. 은랑. 그렇게까지 좋아할 줄 몰랐어. 네가 너무 좋아해서 엄마가 하나 더 사주고 싶어 지잖아. 그리고 실버울프에 대적할 베이가 하나도 없으니까 배틀이 시시해지기도 하고 말이지. 그래서 바로 주문했고, 내일이면 도착할 거야. 주말을 베이블레이드로 채우고, 어제저녁도 너랑 목청 높여 쓰리, 투, 원, 고오오오오오, 슛! 을 외치며 배틀했어. 기분이 좋더라. 네가 꼭 이기길 바란다기보다 (물론 이기면 좋지만), 네가 이기고 싶다고 말했을 때 그걸 지원해 주는 부모가 있다는 걸 알았으면 해서 사준 거야.


즐겁게 놀렴.

유년이란 그런 게 아니겠니.


사랑해. 네 말대로 “우주를 뚫고 나갈 만큼 사랑해.”

이따 만나.

엄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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