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한 마음이 들지 않을 수가 있나

진짜 긍정은 따로 있었다는 걸

by 내복과 털양말

아들에게,


오늘은 해가 좋아 마당에 빨래를 널었어. 바람도 꽤 선선히 불고 하늘도 맑아서 빠삭하게 잘 마를 것 같아 기분이 좋구나. 태권도를 다녀올 때까지 그냥 널어놔도 되겠어.


네 아빠의 긴 출장이 이제 며칠 앞으로 다가왔어. 사랑하는 아빠가 오랫동안 곁에 없을 거라고 생각하니 너는 슬프다고 했지. 너는 참 정이 많은 아이야. 요즘 아빠는 피곤한 날도 많았고, 피곤하니 예민해지고, 예민해지니 짜증을 내는 날이 많았지. 좀처럼 웃지 않고 그랬지만 그래도 네게 어떻게든 부드러운 표정을 보이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엄마는 많이 봤어. 다행히 최근 며칠 들어서 네 아빠의 표정이 조금씩 밝아지는 게 보여서 엄마는 안도하고 있어. 엄마도 많이 밝은 얼굴을 하려 하는데 효과가 있어서 흐뭇해. 그 방법을 알려줄까? 아직 어린 네게는 이게 효과가 있을지 잘 모르겠지만, 너는 조숙한 아이니까 또 어떨지 모르지. 그 방법은 바로 감사하기야.


누구에게 감사하는지는 엄마도 잘 모르겠어. 그래도 그냥 그런 마음을 갖는 거지. 힘들수록 사소한 거를 굳이 찾아서라도 말이야. 예를 들면, 앞날을 알 수 없는 세입자이긴 하지만 현재 맑은 햇살 아래 빨래를 널 수 있는 마당이 있어서 감사하다. 아들이 건강하게 자라고 있어서 감사하다. 아들이 한동안 다니기 싫다고 울기도 많이 울었지만 생각을 바꾸고 꾸준히 태권도를 다니고 있어서 참 감사하다. 내가 커피를 마시면서 신형철의 <인생의 역사>를 읽을 수 있어서 감사하다. 남편이 피로하긴 해도 큰 병 없이 헬스장에서 건강을 도모할 수 있어서 감사하다. 아들이 스스로 목표를 정하고 (이탈리안브레인롯 백과사전) 달성하기 위한 방법도 설정해서(놀이 후 뒷정리하면 스티커 한 장, 9시에 침대에 누우면 스티커 한 장, 이동하기 전 화장실 들르기 스티커 한 장) 성실히 이행해서 감사하다. 이런 식이지.


보통의 일상을 보낸다는 게 어찌 보면 기적이기도 하거든. 태어나는 지역에 따라 인생의 모습은 판이하지. 태어나고 나서야 만나게 되는 부모도 다 다르고. 모두 자기 의지로는 결정할 수 없는 일이잖아. 그러니 우리가 이 풍광 수려하고, 공기 좋고, 10분만 나가면 북한강을 곁에 두고 산책할 수 있는 경기도에 살면서, 마당 있는 집에서 보통의 하루를 보낸다는 건 행운이지. 다행이다, 감사하다, 이런 마음을 가지는 게 사람을 굉장히 긍정적으로 만든다는 것을 엄마도 올해야 체감하고 있어. 넌 나보다 훌륭한 사람이니 나보다 담은 며칠이라도 몇 년이라도 더 빨리 알게 될 거야. 요즘 이런 생각을 가지고 나서야, 의식적으로 이런 사고를 하려고 애써보고 나서야, 무작정 희망적으로만 보는 게 아니라 자기 상황을 객관적으로 인지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게 주어진 확실한 현실을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 그러니까, 진짜 긍정은 따로 있었다는 걸 느껴. 엄마도 이제 조금 성장하는 중이야.


지난주에는 놀이 선생님과의 마지막 시간을 가졌어. 네가 어린이상담센터에 가서 놀이 선생님과의 시간을 가지는 두 달을 마치며 네 감정을 골라보라며 감정 카드를 주셨다지. 네가 고른 감정 카드에 엄마는 왈칵 눈물이 났어. 어찌나 자랑스러운지. 네가 고른 19장을 적어볼게. 만족스러운. 안심되는. 활기 있는. 감동한. 따뜻한. 기대되는. 통쾌한. 기쁜. 뿌듯한. 신나는. 편안한. 든든한. 느긋한. 안정된. 감사한. 다정한. 재미있는. 편한/가벼운. 생기가 도는. 이렇게 19장을 골랐더라. 어? 그러고 보니 “감사한”이 있네? 네가 이렇게 잘 자라고 있는데 내가 감사한 마음이 들지 않을 수가 있나.



늘 말하지만, 넌 내 인생에 주어진 큰 선물이야.

널 보며 내가 행복하고 내가 성장해.



사랑해.

이따 만나.

엄마가.

keyword
이전 24화이기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