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증기 Sep 27. 2024

나는 우울증 여행 중 1

아직 다 돌지 못했나? 슬슬 어깨 짐이 무겁다.





나는 소위 말하는 남아선호사상이 강한 조부모님 밑에서 자랐다. 그래서 어린이집도 졸업하지 못했다. 항상 집에서 패션잡지에 있는 옷을 따라 오리며 인형놀이를 했다. 할아버지가 출근하면 항상 점심쯤에 사라지는 할머니를 찾아 자주 다니는 미용실이나 이웃집을 들쑤시고 다니는 게 내 일상이었다. 할머니는 항상 나에게 엄마는 배신자다. 문 앞에 버리고 갔다. 절대 따라가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셨다. 하지만 아파트 문 앞까지 데려다준 것은 외삼촌이었다.



초등학교를 올라가면서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갔다. 사정이 더 어려워져 반지하로 이사하게 되었다. 2층은 집주인이 살고 1층은 집주인 친척이 살고 있었다.

전체 방 크기는 방 한 칸 정도 되었고 남매의 방은 작은 어린이가 누워도 꽉 찰 정도로 벅찬 곳이었다.

항상 곰팡이가 피어있었고 화장실은 변기가 없어 소변은 가능했지만 대변은 집 밖으로 나가 1층에 있는 공중 화장실을 사용해야 했다. 밤이 되면 남매는 서로 무서워 항상 같이 나가 기다려주는 동안 노래를 불러주거나 장난치며 긴장감을 풀어주곤 했다.



할아버지는 항상 나에게 아빠처럼 되지 말라고 하셨다. 도박, 술, 담배 모두 멀리 해야 한다고 했다. 유일하게 내가 탈출했을 때도 돌아가시기 전까지도 엄마 욕은 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항상 말하셨다. 언젠간 돈을 모아 저 1층으로 올라갈 거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정말 내가 4학년이 되자마자 1층으로 이사 갔다. 그리고 1층에 있는 친척들은 반대로 반지하로 내려갔다.

그 가족도 마찬가지로 아빠와 할머니, 형제가 살고 있는 집이었는데 아빠가 돈을 다 날려먹어 반지하로 내려왔다는 소문이 들렸다. 하지만 그건 나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이제 화장실 갈 때 나가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이미 신나 있었다.



하지만 이때부터 차별이 심해졌다.

할머니가 동생을 굉장히 예뻐하셨다. 항상 동생이 먼저였다. 내 것은 없었다.

혼날 때 동생도 많이 맞았지만 유독 내가 더 많이 맞았다. 파리채부터 시작해서 델몬트 유리병, 프라이팬, 손에 쥐고 있던 음식으로 맞고 집 안에 있는 물건으로 안 맞아본 게 없을 정도로 많이 맞았다.





이유?

이유는 별 거 아니었다.

근데 끝에 항상 하신 말씀이 엄마를 많이 닮았다고 짜증 난다는 말이었다.

네 애미가 오른손잡이로 키웠어야 했는데 왼손잡이로 키워서 과일 하나 못 깎는 병신이라는 둥, 자신을 바라보는 그 눈알이 똑같아서 소름이 돋는다. 조금이라도 엄마 편을 들면 무조건 매질이 날아왔다.




할아버지는 자주 혼내시진 않았지만 퇴근하고 오시면 항상 마중인사를 해야 한다. 한 번은 샤워하는 중에 오셨는데 갑자기 문을 벌컥 열어 10분 동안 벌거벗은 몸으로 혼난 적이 있다. 나는 이 이후로 누군가에게 몸을 보여주는 것을 굉장히 꺼려한다. 그리고 외부 소리에 굉장히 민감해졌다.

학교에서 준비물이나 급식비, 학비에 관해 말씀드리면 불 같이 화를 내셨다. 그래서 그런지 주변이 답답할 정도로 돈 문제에 힘들어도 말하지 않는다.




화가 나면 갑자기 버럭 소리 지르시고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실 때마다 견디기 힘들었다.

지금 생각하면 분노 대상은 따로 있는데 풀 수 없어 남매에게 풀었던 것 같다.

모두 사정이 있다고 할지언정 나는 어린 나이었기에 모두 흡수했다. 아니 흡수돼버렸다.

그래서 내 인생 많은 페이지가 찢겨 있다.




그래서 나는 학교 가는 게 너무 즐거웠다.

이유 없이 나를 때리거나 경멸하는 사람도 없고 돈으로 압박주는 사람도 없었다. 친구들과 항상 웃는 일만 가득하며 내가 읽고 싶어 하는 책들이 잔뜩 있어 남들은 학교가 싫다 해도 나에겐 천국이었다.

나는 산만하지만 명량하고 밝은 평범한 학생이었다.






그리고 이때 엄마를 처음 만났는데 나에게 너무 행복한 순간이었다.

할머니가 말한 엄마가 나와 얼마나 닮았는지 궁금했고 냄새가 너무 좋았으며 나와 비슷한 키에 그 작은 품이 말할 수 없을 만큼 따뜻했다. 조부모님이 주시지 않았던 다정함이 너무 좋아서 눈물이 났다.


엄마가 추억 기념으로 준 머리끈을 만지고 그 향을 느낄 때마다 보고 싶어 항상 울었는데

그 모습을 본 할머니와 동생이 손가락질을 하며 배신자라고 욕했다.

그 손가락들은 칼이 되어 나를 찔렸다.






할머니는 그리움이 묻어있는 머리끈을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리고 그리움을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조각 나 버린 그리움을 모아보려고 바닥을 기었지만

동생이 발로 움직이지 못하게 내 손을 밟아버렸다.








그때부터 내 우울증 여행기가 시작되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