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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쉐아르 Jul 12. 2020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은...

죄에 대한 감수성

성추행에 대한 고소가 있고 다음날 박원순은 죽음을 택했다. 영화 같은 치밀한 계획 살인이라면 모를까 그의 행동은 그가 잘못을 인정하고 책임지려 했음을 뜻한다. 즉 그는 무언가 하지 말았어야 할 일을 했을 것이다.


법적 절차는 고소인과 피고소인의 주장 중간 어딘가에 있는 진실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고소인의 주장 그대로이거나 피고소인의 주장 그대로인 경우는 별로 없다. 하지만 이제 진실은 알 수 없다. 고소인의 주장에 대해 반론을 제시할 수 있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도대체 어느 정도의 잘못이었기에 죽음을 택할 만큼 부끄러웠을까. 죄에 대한 감수성은 사람마다 다르다. 광주의 학살을 저지르고도 골프 치며 잘 살고 있는 전두환의 감수성과 대가성이 없는 정치자금만으로 죽음을 택한 노회찬의 감수성은 분명히 다르다.  


박원순은 어땠을지 알 수 없다. 하지만 그의 삶을 돌아봤을 때 그의 기준은 일반 관념보다 높았으리라 짐작된다. 아마도 훨씬 더.


그래서 안타깝다. 사람은 누구나 잘못을 저지른다. 쌓기는 어려워도 부수기는 너무나 쉽다. 박원순도 완벽하지 않다. 잘못도 했을 거다. 그런데 어쩌면 그는 사람들의 짐작보다 더 작은 잘못으로 죽음을 택했을지 모른다. 어떤 이들은 도대체 이 정도로 왜 할 수도 있다.


그의 삶이 온갖 사기를 저지른 인간에 의해 웃음거리가 되고 잘못이 드러남에도 책임지지 않았던 사람에 의해 부정되는 현실에 화가 난다. 그를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이들이 그를 재단하고 죽음에 대한 애도조차 피해자와의 연대라며 거부하는 모습을 보면 차라리 우습다.


앞으로 또 이런 일이 있을까 걱정된다. 어느 것 하나 입증되지 않은 과잉수사로 조국과 그의 가족을 도륙하고 의혹과 왜곡으로 윤미향을 파렴치한 인간으로 몰았던 마녀사냥 앞에 더 많은 이들이 자신의 잘못 앞에 극단적 선택을 하게 되지 않을까.


뻔뻔해지자는 말은 아니다. 아니 조금은 뻔뻔해졌으면 좋겠다. 최소한 죽음을 택하지 않을 정도의 뻔뻔함은 가져야 한다. 잘못을 저질렀다면 그에 따른 처벌을 받고 책임을 지면 된다. 아무리 부끄러워도 그냥 가버리면 어떻게 하나. 이제 이런 죽음은 더 이상 보지 않게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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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은 그래서 더 조심해야 한다. 저지른 잘못은 부끄러움으로 계속 공격하고 결국 견디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하물며 견디지 못해 포기하면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으로부터 수모 또한 당하게 된다.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은 끝까지 몇 배 몇십 배 조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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