쉐아르의 영적여행
1. 초등학교 5학년때 어느 심심했던 일요일 오후 가족들 다니던 교회에 처음 발을 들였습니다. 그 다음 주에 성경암송대회가 있다기에 열심히 준비해서 상을 탔습니다. 그리고 김동호 목사의 표현 그대로 교회 가는 것이 특기요 취미인 아이가 되었습니다.
2. 중학생이 뭘 안다고 온갖 예배를 빠짐없이 참석했습니다. 집안 사정으로 버스타고 30분 거리로 이사했지만, 학교 마치고 남아있다 수요 예배를 드리고 집에 갔죠. 주일 저녁, 부흥회 빠지지 않았습니다. 중고등부 설교대회에서 '우상을 폐하라'라는 제목으로 상도 타고 이해도 안되는 신학서적도 읽었습니다. 휴거를 읽으며 종말을 준비했고, 김홍도 같은 훌륭한 목사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3. 중3 수련회 첫 예배였습니다. 야외였죠. 설교 본문이 베드로의 고백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였는데, 이미 암송도 하고 수십번은 읽었을 그 본문에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수련회 마지막 밤 분위기 잡아 억지로 울리는 시간도 아니었기에 그 경험이 제게는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예수를 '인격적으로 만나는' 혹은 말씀이 내 골수를 '쪼개는 경험'을 했습니다.
4. 그렇게 저는 교회에서 살았습니다. 그런 아이 있죠. 회장 맡을 학년 되면 당연히 회장을 맡는 중등부 고등부 청년회 계속해서. 제가 그 아이였습니다. 학력고사 준비로 바쁘지만 고3 가을까지 성가대에 참가했습니다. 담임에게 수련회 때문에 자율학습 못한다며 거의 일방 통보 후 빠져버려 나중에 엄청 혼났습니다. (반장이란 놈이 그랬으니 얼마나 황당하셨을지) 고등학교 졸업하고 신학교를 안갔다고 하니 교회 어른들이 의아해하기도 했죠.
5. 교회 밖에 모르던 성실한 '환자'가 처음 흔들렸던 건 대학 때였죠. 아직 전두환이 대통령이었습니다. 학교에 전경이 들어올 때죠. 사회적 모순에 눈을 뜨며 이에 눈감던 비겁한 교회에 불만이 생겼습니다. 하지만 교회를 떠나는 건 생각할 수도 없었죠. 주로 그런 사람들이 모이던 곳이 IVF였습니다. 복음주의를 표방하면서도 사회문제에 반 발자욱(한 발자욱 아님) 정도 걸치는 모양새였죠.
6. 그럼에도 전 보수주의에서 전혀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민중신학과 해방신학도 공부했지만, 적응할 수 없더군요. 성경을 부정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런 신학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자유주의는 어휴... 근처에 가지도 않았습니다. 저런 이해못할 인간들. 그랬었죠.
7. 그런 신앙을 30대 말까지 이어갔습니다. 게으름 피울 때도 있었지만 교회에서 떠난 일은 없었습니다. 교회에서 아내도 만났습니다. 남들 보면 참 성실한 신자였고, 또 그 평가가 틀리지도 않았습니다.
8. 2007년 2월 그날이 오기까지는 말이죠 (To Be Continu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