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협의 거센 바람>을 읽고
이 글은 2017년 4월 13일 미주 뉴스앤조이에 기고한 글입니다.
매년 그 해의 대표 단어를 선택하는 옥스퍼드사전 위원회는 2016을 대표하는 단어로 '탈 진실' (post-truth)을 선택했습니다. 탈 진실이란 “객관적 사실이 공중의 의견을 형성하는데 개인적 신념과 감정에 호소하는 것보다 영향력을 덜 끼치는 환경을 의미하는 것”이라 정의됩니다. 브렉시트나 트럼프 당선에서 이 현상이 두드러졌기에 사회적으로 주목받았지만, 사실 기독교 내의 탈 진실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탈 진실 혹은 반지성의 정점에 창조과학이 있습니다. 이들은 창세기에 등장하는 창조 기사를 문자적으로 해석하고 그 믿음을 지키기 위해 지질학, 생물학, 천문학을 비롯한 주류 과학의 연구 결과를 부정합니다. 최근 창조과학 선교사(?)로 활동하는 이재만씨의 <타협의 거센 바람>이 출간되었습니다. 이 책을 읽고나니 지금 제목보다 <반지성의 거센 바람>이라는 제목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창조과학에 대한 문제제기는 오래전부터 있었습니다. <무신론 기자 크리스천 과학자에게 따지다>, <오리진>, <아론의 송아지>, <창조론 연대기>, <개혁신학 vs. 창조과학>등 창조과학의 잘못을 알 수 있게 도와주는 책은 많습니다. 그럼에도 <타협의 거센 바람>은 그동안의 지적에 대한 답변 없이 이전의 주장만을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진화론자와 타협 이론 프레임
이전에 비해 발전(?)된 점이 있다면 타협 이론이라는 새로운 프레임입니다. 기존의 진화론자 프레임과 비슷한 의미입니다. 여기서 '진화론자'란 진화론을 연구하는 학자를 뜻하는 용어가 아닙니다. 6000년 된 젊은 지구를 믿지 않는 오래된 지구를 인정하는 모든 과학자를 뜻합니다.
창조과학을 추구하는 사람과 대화를 할 때 이해되지 않은 점이 있었습니다. 빅뱅이론이나 고대의 자기장 변화를 이야기할 때 '진화론자'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진화론과 전혀 상관없는 학문인데 말이죠. 그럼에도 창조과학은 주류 과학을 통틀어 진화론자라 지칭합니다. 예를 들어 저자는 모든 학문들이 "기본적으로 [지구가 오래되었다는] 같은 전제로 해석된 내용이기에 천문학/우주론, 지질학, 생물학, 인류학 등 역사 과학 분야가 마치 통합된 것처럼 보"인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지질시대표의 지구 역사가 사실이 아니라면 진화론이나 석기시대는 사라져야 한다. ... 생물학적 진화가 틀렸다면, 지질시대표와 석기시대는 의미가 없다. 지질시대라는 지구의 오랜 나이가 없다면 오랜 우주 역사 또한 동떨어진 해석이 된다”라고 선언합니다.
과학사에 대한 기초 지식만 있어도 이러한 주장이 얼마나 말이 안 되는지 알 수 있습니다. 각 과학은 별개의 관찰된 사실과 이론을 통해서 발전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자는 모든 과학이 진화론의 영향력 밑에 있다고 독자를 호도합니다. 모든 과학이 17세기에 시작된 인간이 신을 이해할 수 있다는 계몽주의에서 시작되었다고 하면서요.
창조과학은 사람들로 하여금 과학을 불신하게 만듭니다. 기독교인의 과학지식이 증가할수록 창조과학이 설 자리는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저는 80년대 초 창조과학을 처음으로 접했습니다. 지구를 둘러싼 물층, 노아 방주의 파편 사진들과 함께 보여준 블랙홀의 사진이 기억에 남습니다. 강사는 블랙홀이 바울이 보았던 삼층천의 입구라고 말했습니다. 어처구니없는 주장이지만, 블랙홀이 무엇인지 잘 모르던 당시에는 은혜롭게 들렸습니다. 대중의 지식수준이 올라간 지금, 편평한 지구나 천동설을 이야기하지 않듯 삼층천의 입구 이야기도 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창조과학의 주장들은 언젠가는 사라지겠지요.
진화론자가 기독교인으로 하여금 주류 과학을 믿지 못하게 하는 프레임이라면, 타협 이론은 창조과학과 다른 성경해석을 모두 부정하기 위해 사용하는 프레임입니다. 6일간의 창조와 홍수 사건을 문자 그대로 인정하지 않는 모든 성경해석은 진화론에 영향받은 타협 이론이라 주장합니다.
이쯤 되면 또 하나의 프레임이 연상됩니다. 종북좌빨이라는 프레임입니다. 박근혜 정부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은 모두 종북이라 낙인찍었던 그 프레임은 결국 탄핵에 찬성하는 95%를 종북으로 여기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자신들 정치성향에 동조하지 않으면 모두 종북이라 모는 모습과 자신들 성경해석에 동조하지 않으면 모두 진화론자요 타협 이론이라 모는 모습은 차이를 구별할 수 없이 닮았습니다.
반복되는 거짓과 왜곡
사실을 주장하는 것은 쉽습니다. 사실을 전달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실이 아닌 것을 주장하기 위해선 거짓과 왜곡이 필요합니다. 사람은 무지함으로 잘못된 주장을 할 수 있습니다. 아전인수의 해석을 하며 억지 주장을 하더라도 그냥 애쓴다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타협의 거센 바람>에는 무지의 결과라 보기 어려운 잘못된 주장들이 담겨 있습니다. 게다가 지질학 석사라는 경력을 신뢰성을 더하기 위해 내세운다는 면에서 문제가 심각합니다.
이 책의 잘못된 점을 하나씩 지적하려면 끝이 없기에 2장 "타협의 기준이 된 지질 시대표"의 두 단락만 살펴보겠습니다.
“한 가지 더 지적할 점은, 지질학자들이 화석의 연대를 측정하여 시대 순서를 정했을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질학자들은 화석의 나이를 측정하지 않는다. 유기물의 나이를 측정하는 유일한 방법은 탄소 연대 측정법인데 그 원리상 진화론자들이 수십만 년, 수억 년 되었다고 가정하는 화석들은 측정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봐도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법은 1900년대 중반에야 등장했다. 지질시대표가 만들어진 1800년대 말에는 연대 측정법이 아예 없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즉 진화론자들은 측정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지질시대표에 수천만 년, 나아가 수억 년을 적어 넣은 것이다.”
첫째, 지질학자가 화석의 나이를 측정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탄소 연대 측정법이 화석의 나이를 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유기물의 나이를 측정하는 유일한 동위 원소 측정법이 탄소 연대 측정법인 것은 맞습니다. 탄소의 반감기가 5700년 정도라 대상의 나이가 몇만 년 이상 되면 신뢰성 있는 결과를 얻을 수 없습니다. 여기까지 보면 저자의 주장이 맞는 듯합니다. 하지만, 화석의 나이를 직접 측정하지 않아도 방법은 있습니다. 화석이 발견된 지층의 나이를 재면 됩니다. 동위 원소 중에는 몇억 년 이상의 나이를 재기에 좋은 원소들이 있습니다. 동일 화석이 동일 시간대 지층에서 지속적으로 발견된다면 그 화석의 나이를 신뢰성 있게 정할 수 있습니다. 이런 단순한 원리를 지질학 학사와 석사 학위를 가진 저자가 모른다는 것이 이해가 안 됩니다. 또한 마치 탄소 연대 측정법 말고는 다른 연대 측정법이 없는 것처럼 글을 썼습니다. 뒤의 부록에서 다른 연대 측정법에 대한 언급하긴 했지만, 잘못된 이해를 보여줍니다. 방사성 연대측정법으로 퇴적 지층의 연대를 측정할 수 없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닙니다.
둘째, 방사성 연대 측정법이 1900년대 중반에야 등장했다고 하면서 이전의 지질 시대표에 매겨진 시간은 전혀 근거가 없고, 단지 상상의 결과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전에도 과학자들은 지구의 나이를 추정하기 위해 여러 방법을 썼습니다. 예를 들어 열전도 속도나 지각 변동을 기반으로 정확하지는 않지만 지구의 나이를 추정했습니다. 지구와 같은 성분을 가진 구체를 만들어 식는 비율을 측정해서 지구 나이를 추정하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저자는 반복해서 지질학자가 실험을 전혀 하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지질학 공부한 사람이 지구 나이 측정을 위한 1800년대의 노력을 전혀 몰랐을지 의문이 생깁니다.
이렇게 한두 가지 사실을 던지면서 독자로 하여금 전혀 잘못된 결론을 내리게 하는 글쓰기가 계속됩니다. 저자의 선의를 믿고 싶지만, 의도적인 왜곡으로 보이기만 합니다.
또한 창조과학은 주류 과학의 신뢰를 떨어뜨리기 위해 과학자 사이의 논쟁도 사용합니다. 예를 들어, 이전의 점진적 진화론과 달리 80년대에 제안된 단속 평형설은 중간 단계 화석이 전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라 말합니다. 하지만 이를 제안한 굴드의 이론은 진화의 속도에 대한 이견이지, 중간 단계 화석이 없기 때문은 아닙니다. 2004년 할튼 아프를 비롯한 과학자들이 빅뱅에 반대하며 편지를 쓴 사실도 자주 인용됩니다. 하지만, 아프를 비롯한 정상 우주론 지지자들이 빅뱅이 창세기의 창조 기사를 연상하기 때문에 빅뱅을 싫어했다는 사실은 말하지 않습니다. 우주의 팽창이 반복되었다 주장하는 폴 스타인하르트의 주장도 빅뱅의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는 부분만 발췌해서 소개합니다. 전형적인 왜곡입니다.
이런 주장들을 접한 일반 교인들은 과학은 신뢰할 수 없다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뉴튼 역학으로 수성의 궤도를 완전히 설명할 수 없기에 과학은 신뢰할 수 없고, 따라서 성경대로 천동설을 믿어야 한다는 주장과 같습니다. (참고로, 수성의 궤도는 이후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으로 완전히 설명됩니다.)
신학적 오만과 독선
저자는 2부 ‘타협의 기준과 점검’에서 그들의 성경 해석에 비추어 다른 해석들을 비판합니다. 하나님은 증인이기에 기록된 ‘말씀 그대로’ 믿어야 하고, 그 밖의 모든 해석은 타협 이론이라 정죄합니다. 이 모습 속에서 창조과학 진영의 신학적 오만과 독선이 발견됩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 1장과 과학적 발견을 조화하려던 노력 중 하나인 간격 이론을 반박하며, 저자는 2절은 ‘형태가 없고 비어있다’라고 읽어야만 옳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1절에 사용된 히브리어를 볼 때 무에서의 창조(ex nihilo)가 아니라 혼돈에 질서를 부여하는 과정이라는 해석도 가능합니다. 2절 하반부의 묘사는 당시 근동 지방의 우주관과 정확히 일치함도 고려되어야 합니다. 대표적 개혁주의 신학자인 바빙크는 처음 3일은 길고 다음 3일은 24시간이라고도 해석했습니다. 저자는 이런 다양한 신앙의 선배들의 고민과 해석을 모두 타협 이론이라며 평가절하합니다.
저자는 6일 창조를 고수하는 이유로 크게 두 가지를 거론합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던 그곳에 죽음과 멸종이 있을 수 없었고, 아담의 기록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복음이 무너진다는 이유입니다. 우선,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다는 말씀이 죽음을 거부한다는 해석은 편협합니다. 보시기에 좋은 이유가 모양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말씀이라는 해석도 가능합니다. 바빙크는 창조물이 하나님의 정한 목적에 응답하기에 선하게 보셨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창조과학의 주장처럼 모든 만물이 6일동안 완벽하게 창조되었다면, 예를 들어 19세기 초 5천만 명을 죽게 한 스페인 독감 바이러스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는지 질문하고 싶습니다.
아담의 역사성에 대한 해석은 더 깊은 생각을 필요로 합니다. 로마서 5장에서 바울은 아담이 오실 자의 모형이라 말합니다. 아담의 범죄로 인해 죽음이 왕 노릇 했다면,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할 것이라는 말씀도 있습니다. 저자는 이를 언급하며 아담의 기록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원죄가 의미 없어지고 복음이 무너진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복음은 아담의 역사성에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습니다. 구약학자 월튼은 창세기 1장이 창조세계의 '물질적 기원'이 아니라 그 '기능의 기원'에 초점을 두고 있으며, 창세기 2-3장도 아담의 원형으로서의 기능적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해석합니다. 종교학자 라무릐는 이 말씀을 우리가 죄인이며 심판받아야 하지만, 예수를 통해 우리에게 영생이 주어졌다는 '메시지-사건 원리'로 이해할 수 있다 말합니다. 즉, 아담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복음이 무너지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버나드 램의 "과학과 성경 둘 다를 마땅히 존중해야 한다"는 조언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연 지식이 성경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고도 말했습니다. 한 문제에 대해 과학이 말하는 바와 성경이 말하는 바를 모두 들어야 합니다. 과학이 만물의 정보를 모은다면 신학은 그 정보에 목적과 질서를 부여합니다. 이것이 과학과 신학을 바라보는 신앙 선배들의 지혜입니다. 이를 무시하는 창조과학은 과학의 문제일뿐더러 신학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창조과학은 하나의 증상입니다
창조과학에 대한 비판 자체는 무익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의 지식수준이 올라갈수록 창조과학을 추종하는 수는 줄어들 것입니다. 또 과학 좀 모르면 어떤가요. 예수님 잘 믿고 그분 가르침에 따라 살려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지요.
그럼에도 창조과학의 폐해를 지적해야 하는 이유는 창조과학이 기독교에 만연한 반지성의 대표적인 증상이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 35년 정도 교회에 몸 담으면서 참 많은 것을 보았습니다. (제가 교회를 떠나지 않았음 자체가 기적이고 은혜입니다.) 그 많은 교회 문제들에는 기본적으로 비합리적 사고가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목사는 무조건 섬겨야 한다는 생각. 성경 말씀 들이대면 문맥과 상관없이 순종하는 모습. 신본주의를 말하며 독재를 정당화하는 모습. 설교에 넘쳐나는 거짓 예화와 비합리적인 주장들. 비판의식 없이 떠 나르는 카톡의 찌라시까지. 태극기와 성조기를 들고 탄핵 반대를 외치는 기독교의 모습은 개별적 문제가 아니라 모두 비합리적 사고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목회자는 성도를 그렇게 만들어왔고, 이는 한국교회의 타락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창조과학은 하나의 증상입니다. 심각한 증상이긴 하지만 창조과학을 퇴출시킴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근본적으로 교회 내의 반지성이 해결되어야 합니다.
자신의 믿음을 넘어서는 일은 용기를 필요로 합니다. 그렇기에 창조과학 같은 신경 안정제로 마음을 달래려는 모습은 이해가 됩니다. 하지만 사실은 사실이고 진리는 진리입니다. 사실을 거부하며 거짓에 안주하는 신앙에서 선한 것이 나올 수는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