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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대생의 심야서재 Jan 14. 2016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고

니코스 카잔차키스


진정한 자유를 찾아서


나는 항상 정체 모를, 확신도 없는 일상의 모든 것으로부터 독립된 자유를 꿈꿔왔다. 어쩌면 진정한 자유의 의미가 무엇인지 제대로 설명도 하지 못하면서 뜬구름 같은 공허한 자유를 목적으로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참 재미있다. 자유의 참뜻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진정한 자유'를 추구하다니 아니러니 하다. 나에겐 목적 없는 허상만을 좇는, 현실을 부정하고픈, 그곳엔 척박한 현실을 떠나 이상의 세계로 떠나고 싶다는 빈정거림과 투정만 있었을 뿐이었다.



오늘은 실제로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된다고 봐야 한다. 또 다른 자유의 갈망이 담긴 의지의 씨앗을 새롭게 뿌리게 된다. 내일부터 나는 다시 자유를 어떠한 시선으로 바라봐야 할까? 자유를 되새기기 위하여 그리고 깨달음을 얻기 위하여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삶의 숙제는 다시금 내 책상 앞으로 정확하게 하달이 된다.

한 해의 마지막 날 <그리스인 조르바>를 만나기 시작해서, 어제 새로운 1월의 세 번째 날 만에 <그리스인 조르바>와 비로소 헤어질 수 있었다. 이제 나의 자유 인생은 조르바를 만나기 전과 조르바를 만난 이후로 정확하게 둘로 나누어야 한다. 모든 것은 나의 무지로부터 출발한다. 모른다는 것은 부끄럽고 창피한 일이다. 하지만 나는 지금 나의 무지를 드러내고, 백지장처럼 하얗게 내 마음을 비운 채, 조르바가 표방했던, 갈망했던 한 없이 다다르고 싶어 했던, 자유의 저 높은 꼭대기에 오른 조르바와 카잔차키스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다.







니코스 카잔차키스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와 함께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문학계의 거장이다. 그리스 태생으로서 민족주의 경향의 글을 많이 썼고, 문체 자체가 시적이라 단순한 소설로 생각하고 읽기를 시도했다간, 이해에 큰 낭패를 볼 수 있다. 이윤기 선생님의 번역 역시 시적인 그의 문체를 마치 언어의 연금술사 같은 아름다운 우리나라말들을 통하여 맛깔스럽게 표현하고 있다.






소설을 읽는다는 것 자체가 나에게 생소한 일은 아니지만, 평범한 소설을 마주하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자세가 다른 신기한 경험을 하였다. 책을 읽을 땐, 노트를 펼쳐놓아 중요 부분을 메모하거나 밑줄을 긋곤 하는데, 아니 소설책에 무슨 밑줄 그을 부분이 이리도 많다니, 게다가 온갖 자유스럽고 잔잔한 바다와 같은 은유 하며, 때로는 격정적인 표현들, 그리고 언어의 유희 같은 비유들은 더욱 소설에 도가니 속으로 깊이 빠져 들게 하였다.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주인공은 수없이 많은 책을 읽은 경험주의자 또는 합리적인 이성론 자였다. 주인공과 조르바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선, 니체가 그리스 신화를 바라보는 두 가지 관점을 이해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주인공은 인간의 존재에 관한 본질에 관심이 많았으며, 니체가 정리한 인간의 두 가지 형태가 주인공과 조르바를 통해 나타내고 있다. 합리와 질서를 중시하는 아폴론의 사상은 주인공에게 영향을 주었고, 디오니소스의 무질서, 무합리는 조르바에게 영향을 주었다. 







P. 22 “그렇다. 나는 그제야 알아들었다. 조르바는 내가 오랫동안 찾아 다녔으나 만날 수 없었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그는 살아 있는 가슴과 커다랗고 푸짐한 언어를 쏟아내는 입과 위대한 야성의 영혼을 가진 사나이, 아직 모태인 대지에서 탯줄이 떨어지지 않은 사나이였다.“ 


위의 내용처럼 조르바는 디오니소스적인 사상에 영향을 받은 사람이다. 모든 결정은 자신의 즉흥적인 감정대로 하며, 지식이 쌓여 어떤 도출을 이끌어내는 형태가 아닌, 상황에 따라 비합리적으로 감정이 이끄는 대로,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한다. 조르바는 모태에서 탯줄을 받은 그때 이후, 60의 나이까지 그저 자신이 유리한대로 감정적으로 편한 대로 결정하고 살았다. 자신의 주체적인 의식을 바탕으로 판단하고, 그에 대한 책임도 스스로 지는 형태의 자주적인 삶을 살았다. 


그는 과거에 전쟁을 통하여 무자비하며 잔인한 살인 및 강간 경험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그의 범죄 행위를 용서할 수 없지만, 책을 읽는 독자는 그의 행동을 자유라는 명목 하에 합리화시킨다. 그가 세상을 온전히 살아가기 위해서 자신의 의식이 이끄는 삶을 살았다고 해서, 과거의 극악무도한 범죄의 행동들이 용서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조르바가 말한 대로 변명일지는 모르겠으나, 그저 삶이 이끄는 대로, 자아가 원하는 대로 솔직하게 행동하고 실천했다는 측면에서, 현재의 새롭게 바뀐, 또 다른 조르바는 과거의 자신의 잘못에게 면죄부를 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실 인간은 원초적으로 조르바와 같은 행동을 추구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성이 이끄는 합리적인 사고를 통해서 비합리적인 질서의 욕구를 누르는 것이 아닌가? 그 솔직함에 전세계 수많은 독자들도 무심결에 그의 과오를 흘려버리는 것은 아닐까? 


조르바를 만나다.


생각해보니 내가 조르바를 만난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아주 어렸을 적 TV 영화에서 조르바를 만났다. 영화의 제목은 <희랍인 조르바> 였다. 이것은 나의 기억에 희미하지만 강렬하게 남아있다. "앤서니 퀸"이 주인공으로 나온 영화를 본 기억이 분명 남아 있다. 지금 소설을 읽으면서 그 때 사라진 기억이 되살아 난다.


<그리스인 조르바>는 작가인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자전적인 소설이다.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크레타 섬으로 가는 도중 피레에프스에서 조르바를 처음 만나게 된다. 아래는 피레에프스에 관련된 간단한 정보이다.



피레에프스 (피레아스)의 역사는 고대 그리스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리적 이점 덕분에 피레아스는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도시가 발전하면서 항구도 함께 발전하였으며, 쇠퇴도 같이 하였다. 피레아스는기원전 5세기경에 아테네의 항구 역할을 맡으면서 크게 발전하였으며, 아테네의 모든 수입과 통관이 집중되는 전형적인 항구로 커졌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의 피레아스 항구는 기원후 4세기 이후부터 점차 쇠퇴하였다가, 19세기에, 특히 아테네가 그리스의 수도로 정해지면서 다시 성장하였다                                     - 위키백과



수프를 좋아하는 작가의 성향을 단 번에 알아맞힌 조르바와 작가는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 되고, 크레타 섬에서 새로운 비즈니스(탄광)를 시작하기로 한다. 왜 그는 글 쓰던 작업을 중단하고 탄광이라는 그와 어울리지 않은 작업을 선택하게 된 것일까? 그와 어울리지 않은 직업은 어쩌면 그가 글을 쓰기 위한 목적에 정확히 부합된 것은 아니었을까? 아니면, 첫눈에 반하게 된, 조르바와 같이 일하기 위하여 즉석으로 만들어낸 아이디어일까? 아님 글 쓰기에 신물 나버린 자신의 육체와 영혼의 단절된 느낌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궁여지책으로 만든 결정일까? 나는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는 서두에서 자신의 영혼이 육체에 갇혀 있다는 망상을 하기 시작한다. 


인간의 영혼은 육체라는 뻘 속에 갇혀 있어서 무디고 둔한 것이다.


영혼이 육체에 갇혀있다는 건 보호를 받는 의미일까? 우리의 영혼이 자유로워 지기 위하여 종국에 죽음에 이르는 길만이 영원한 육체의 굴레에서 진정 탈출할 수 있는 길일까? 민족을 지키기 위하여 떠나는 친구의 이별 앞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선택이 극히 제한적인 한계 앞에서 그는 낙담하고 있었으며, 수 없이 읽었던 책들과 자신이 써내려 간 글들이 한 낮 나부랭이 같은 자신의 처지를 반영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마지막 친구와의 이별 앞에서 그는 이별의 증거인 바다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 적나라하게 부끄러우며 자신의 혐오감으로 가득 찬 스스로를 비난하고 있었다.


행동하지 않음에 대한 지식인으로서, 아니면 조국 그리스를 사랑하는 또 하나의 시민으로서 느끼는 자괴감일까? 그가 해야 할 역할이 마땅히 전쟁터의 최전선에 나가서 총, 칼을 들고 적을 무찌르고 풍전등화에 빠진, 조국 그리스를 구하는 것인지, 자신의 무기인 펜들 들고 글을 써야 하는 건지 어떤 것이 조국 그리스에 보답하는 것일지, 그는 분명 혼란스러움의 복잡한 감정이 교차하고 있었다.


폐광에서 노동자, 농부의 새 삶을 시작하기로 한다.


"P. 15 이제껏 너는 그림자만 보고서도 만족하고 있었지? 자, 이제 내 너를 본질 앞으로 데려갈 테다" 


그가 말하는 본질이란 무엇일까? 망해버린 크레타의 탄광 앞에서 경험도 없는 일을 무작정 해보겠다고 뛰어드는 것이 본질일까? 아니면 아무 것도 안하고 인생을 허송세월로 흘려 보내기 위하여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것이 본질적인 삶일까? 어쨌든 탄광 비즈니스를 조르바와 함께 해보겠다고 나서게 된다. 

주인공은 아무렇게나 하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 말하고, 일하고 싶을 때 그저 일만 하는 헌털뱅이 같은 친구 조르바가 마음에 들었나 보다. 조르바는 주인공이 평생 동안 찾고 있었던 그만의 격렬한 살아있는 언어를 가지고 있는 가슴이 부풀고, 위대한 꿈을 가지고 있는 사나이 중 사나이였다. 그가 진정되고 싶어하는 인물이었다.


조르바의 나이는 60을 훌쩍 넘겼다. 온갖 처절한 전쟁의 기억과 사람을 잔인하게 죽여본 경험을 가지고 있는 조르바, 그는 사물을 제대로 볼 수 있는 분별이 생긴 나이다. 그가 정의하는 자유란 이렇다. P. 36 이 더러운 놈의 세상에서 자유를 누리고 싶으면 살인을 저지르고 사기 치고 해야 한다는 이야기 아닙니까?  조르바가 더러운 이 세상(당시 그리스가 처한 상황)에서 자유를 얻으려면, 사람을 죽이고 속여야만 얻을 수 있는 그런 자유였다. 그는 나에게 <자유라는 게 뭔지 알겠지요? > 라고 묻고 있지만, 나는 자유의 뜻이 어떤 것인지 짐작 할 수 없고, 또 얻어 본 적이 없기에 그렇다고 또는 아니라고도 부인하기가 어렵다.

대체 진정한 자유란 무엇인가? 지금 우리 사회가 처한 속박과, 굴레인 규범, 더럽고 치졸한 법, 평등하지 않은 질서의 테두리 그 안에 머물러 있는 채, 제한적인 자유를 누리는 것이 정답일까? 아니면 그 모든 것을 버리고 내 마음이 이끄는 대로 모든 규칙과, 정답을 거부하는 것이 자유를 얻는 길일까?


공동체 사회


주인공이 꿈꾸는 이상적인 사회는 모든 사람이 똑같이 일하고, 똑같이 받고, 똑같이 평등한 자유를 누리는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못할 모습이었다. 그런데 조르바는 그의 꿈을 무참히 깨뜨려버린다. 인부들과 친해지려는 주인공에게 조르바가 하는 말을 옮겨와 본다.


P. 81 "두목 인간이란 짐승이에요......" 단장으로 자갈을 후려치며 그가 말을 이었다.
"......짐승이라도 엄청난 짐승이에요. 그런데도 두목은 이걸 알지 못해요. 당신에겐 이 인간이라는 것, 세상사라는 것이 너무 어려웠던 모양인데...... 내게 물어봐요! 짐승이라고 대답할게요. 이 짐승들 사납게 대하면, 당신을 존경하고 두려워해요. 친절하게 대하면 눈이라도 뽑아갈 거요. 두목 거리를 둬요! 놈들 간덩이를 키우지 말아요. 우리는 평등하다. 우리에겐 똑같은 권리가 있다. 이따위 소리는 하면 안돼요. 그러면 당신에게 달려들어 당신 권리까지 빼앗고 당신 빵을 훔치고 굶어 죽게 할거요.


나는 주인공처럼 이상적인 환경을 꿈꾸는 자였다. 나의 인부들과 친해지려고 인간적으로 다가가려고 노력 또 노력 했다. 나를 내리고 그들과 같은 마음으로 이해하고 듣기 위해 노력했었다. 하지만 내가 그들을 이해하려고 다가서면 그들은 나를 더욱 이용했다. 오히려 더 많은 일들을 내게 의지하곤 했다. 세상의 무서운 현실이란 조르바가 얘기한 것처럼 냉혹한 것이 맞을까? 인부들과 적당한 거리를 두고 그들에게 무섭고 그리고 냉혹하게 대해야 하는 걸까? 현실과 이상의 거리는 역시 먼 것일까?


도대체 조르바는 누구인가?




조르바는 학교 문턱에도 가보지 못했다. 온갖 만고풍상을 다 겪었다. 지식의 세례를 제대로 받은 적이 단 한번도 없다. 여자들을 너무 좋아하여 마초와 같은 강한 품성을 가지고 있으며, 여자는 무조건 품어야 한다는 요즘 시대에 공감하기 힘든 원시적인 남성상을 가지고 있다. 먹는 것과 노는 것을 너무나 좋아하며 자신의 감정을 춤으로서 표현하는 재주가 있는 사람, 원시적인 배짱으로 그 어떤 것에 대한 두려움이 없지만, 죽는 것에 대해서는 희미하게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사람.. 주인공은 그런 조르바에게 오히려 배우고 싶어한다. 그를 닮고 싶어 한다.

주인공은 조르바를 바라보며, 문득 행복을 느끼게 된다. 자신이 살아있음을 크레타의 산과, 바다, 들, 흙들과 함께 숨쉬고 있음을 깨달으며 행복에 대하여 이렇게 정의한다. P. 98 행복을 체험하면서 그것을 의심하기란 쉽지 않다. 행복한 순간이 과거를 지나가고, 그것을 되돌아보면서 우리는 갑자기 그 순간이 얼마나 행복했던가를 깨닫는 것이다.


조르바는 말한다. 모든 것은 그저 해나가기만 하면 돼요!라고 말이다. 서로의 마음을 공감하는 사건으로 인하여 조르바는 주인공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었고 전적으로 신뢰하게 된다. 그 자리에서 조르바는 자신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춤의 의식으로 기쁨을 발산한다. 일을 하지만 궁극으론 목적이 아닌 자유를 갈망하는 일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공감에 진정한 희열을 느끼게 된 것이 아닐까?  그의 춤사위에 반한 주인공은 "내가 보고 들은 것을 깡그리 지우고 조르바라는 학교에 들어가 저 위대한 진짜 알파벳을 배울 수 있다면" 내 인생이 바뀔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조르바는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한다. 인생은 단순하다 말이다.  


P. 168 세상일은 간단한 거에요. 몇 번이나 말씀 드려야 해요? 간단한 걸 가지고 자꾸 복잡하게 만들어 헷갈리게 하지 말래도!


나의 감동


나는 이제 <조르바>에 대하여 알고 있었지만, 또다시 그를 만났다. 자유로운 영혼인 그를 우리가 자꾸 들춰내고 만나려고 하는 것은 우리의 굴레 안에서 그를 속박시키는 것일까? 아니면 그를 기억하는 우리의 사상이 그를 더 자유롭게 만드는 것일까? 앞으로 내 삶이 어떻게 펼쳐질지 예상할 수는 없지만, 그의 말과, 행동, 생각 그리고 결정들은 시종일관 미래의 나의 인생에 수없이 소나기처럼 쏟아질 것 같다.

각자가 느끼는 <조르바>의 모습들은 다를 것이다. 새겨지는 마음속의 자유라는 의미도 모두 다를 것이다. 하지만 원초적이고 작으며, 한 없이 드넓은 우주에서 왜소한 인간이 느끼는 자유란, 너무나 작고 보잘것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작고 보잘것없는 그것을 지키기 위해 수없이 많은 목숨을 희생하고 이 땅을 지탱하며 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조르바를 부러워하고 그를 따르고 싶어하는 것은 죽음 앞에서 솔직하고 자신을 감추지 않음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책을 읽고 종이에 쓰려고 했던 관념적인 생각들의 모순을 조르바는 행동으로 옮겨주고 있지 않은가? 인간은 언젠가 홀로 남을 수 밖에 없다. 고독 앞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하여 조르바는 인생의 얘기들을 나에게 들려주고 있다. 조르바는 주인공의 생각과 마찬가지로 내게 스승이 된다.


P. 391 새 길을 닦으려면 새 계획을 세워야 하지요. 나는 어제 일어난 일은 생각 안 합니다. 내일 일어날 일을 자문하지도 않아요. 내게 중요한 것은 오늘, 이 순간에 일어나는 일 입니다."


나는 마지막 조르바의 죽음 앞에 경건해졌다. 죽음 앞에 의연해지기 위하여 그는 시트를 걷어붙이고 홀연히 일어난다. 그러나 그는 모두를 밀어붙이고 침대에서 뛰어내려 창가로 걸어간다. 그는 창가를 거머쥐고 먼 산을 크게 바라 보고 웃다가 말처럼 웃었다. 그리고 곧 창틀에 손톱을 박고 서 있는 동안 죽음이 그를 찾아왔다. 그는 죽음 앞에 처연했다. 그리고 그것을 거부하거나 몸부림치지 않았다. 그는 어쩌면 죽음의 철학적인 의미를 깨달아버렸을지도 모른다. 모든 철학자들이 궁금했던 원리를 깨달아버린 것이다..

조르바는 그렇게 삶을 자유롭고 뜨겁게 살다가 마지막에 홀로 떠났다. 하지만 <그리스인 조르바>속에 남아있는 그의 질곡의 삶은 목적 없이 떠돈 채 살고 있는 오늘날의 지성인들에게 어떤 메시지들을 안겨주는 것일까? 느낌은 각자에게 주어지고 정답은 각자에 따른다. 이른바 조르바에 눈을 떴다라고 표현하는 우리의 삶은,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일까? 팍팍하고 미래 없는 암울한 우리의 현실에서 더 깊게 조명되는 아이러니함이 서글프게 느껴지는 밤이다. 나는 더 조르바에 취해 그와 함께하는 크레타 섬으로 여행을 훌쩍 떠나는 자유로움을 선택하고 싶어진다.


P. 92 하느님은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는데 굶어 죽으면서 하느님께 감사하는 건 미친 짓이다.

P. 92 ~ 93 낡은 세계는 확실하고 구체적이다. 우리는 그 세계를 살며 순간순간 그 세계와 싸운다. 그 세계는 존재한다. 미래의 세계는 아직 오지 않았다. 환상적이고 유동적이며 꿈이 짜낸 빛의 천이다.

P. 98 행복을 체험하면서 그것을 의심하기란 쉽지 않다. 행복한 순간이 과거를 지나가고, 그것을 되돌아보면서 우리는 갑자기 그 순간이 얼마나 행복했던가를 깨닫는 것이다.

P. 100 혹자는 먹는 음식으로 비계와 똥을 만들고, 혹자는 일과 좋은 유머에 쓰고, 내가 듣기로는 혹자는 하느님께 돌린다고 합니다. 그러니 인간에게 세가지 부류가 있을 수 밖에요.

P. 114 오래 살면 살수록 나는 반항합니다. 나는 절대로 포기하지 않습니다.

P. 119 행복: 지금 한 순간이 행복하다고 느껴지게 하는 데 필요한 것이라고는 단순하고 소박한 마음뿐이었다.

P. 138 <그리스 우리 조국, 의무는 아무것도 아니야, 그러나 우리는 이 아무것도 아닌 것을 위해 기꺼이 파멸을 맞아 들여야 하는 것이네>

P. 149 삶: 허리띠를 풀고 말썽거리는 만드는 게 삶이오!

P. 178 나는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는 행위가 얼마나 무서운 죄악인가를 깨닫는다. 서둘지 말고, 안달을 부리지도 말고, 이 영원한 리듬에 충실하게 따라야 한다는 것을 안다.

P. 196 인간 본질은 야만스럽고, 거칠고 불손한 것이다. 인간의 본질은 사람과 육체와 불만의 힘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P. 199 위대한 환상가와 시인은 사물을 처음 대하는 것처럼, 매일 아침 그들은 눈앞에 펼쳐지는 새로운 세계를 본다. 아니 보는 게 아니라 창조하는 것이다.

P. 212 나이 먹어 가는 걸 인정한다는 것은 예사로 창피한 노릇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걸 눈치채지 못하도록 별 짓을 다 하는 거지요..

P. 238 파블리의 자살: 아나그노스티 영감은 구원을 받은 것이라 했다. "죽자니 청춘이요 살자니 고생이다." 삶, 죽음, 고생, 겪어봐야 하는 즐거운 역경......

P. 246 계절의 어김없는 리듬, 무상한 생명의 윤회, 태양아래서 차례로 변하는 지구의 네 가지 얼굴, 생자필멸, 이 모든 사실이 다시 한번 내 가슴을 조여왔다. 생명이란 모든 사람에게 오직 일회적인 것, 즐기려면 바로 이 세상에서 즐길 수 밖에 없다는 경고였다.

P. 331 "믿음이 있습니까? 그럼 낡은 문설주에서 떼어낸 나뭇조각도 성물이 될 수 있습니다. 믿음이 없나요? 그럼 거룩한 십자가도 그런 사람에겐 문설주와 다름이 없습니다."

P. 329 그는 살과 피로 끼우고 죽이고 입을 맞추면서 내가 펜과 잉크로 배우려면 것들을 고스란히 살아온 것이었다.

P. 333 "일을 어정쩡하게 하면 끝장나는 겁니다. 말도 어정쩡하게 하고 선행도 어정쩡하게 하는 것, 세상이 이 모양 이 꼴이 된 건 다 그 어정쩡한 것 때문입니다. 할 때는 화끈하게 하는 겁니다."

P. 356 "두목! 이놈의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은 하나같이 부정, 부정, 부정입니다. 나는 이놈의 세상에 끼지 않겠어요.. 왜 젊은 것은 죽고 늙은 것들은 살아야 하나요?

P. 376 "우는 건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남자들 앞에서 운다면 말이죠. 남자들끼리 통하는 기분이 있지요? 부끄러운 일이 나이에요. 그러나 여자 앞에서는 남자는 늘 자기 용맹을 증명해야 합니다. 우리 남자가 여자 앞에서 울음을 터뜨려버리면, 이 가엾은 것들은 어쩝니까? 끝나는 거지요."

P. 385 "...만물은 각기 무슨 의미를 지닌 건가요? 누가 이들을 창조했을까요? 왜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 " ..... 왜 사람들은 죽는 것일까요?"

P. 391 새 길을 닦으려면 새 계획을 세워야 하지요. 나는 어제 일어난 일은 생각 안 합니다. 내일 일어날 일을 자문하지도 않아요. 내게 중요한 것은 오늘, 이 순간에 일어나는 일 입니다."

P. 398 세상엔 세 부류의 사람이 있다
1. 살고 먹고 마시고 사랑하고 돈 벌고 명성을 얻는 걸 자기 생의 목표로 삼는 사람들
2. 자기 삶을 사는 게 아니라 인류의 삶을 살려는 사람들. 인간은 하나이며 인간을 가르치고, 사랑과 선행을 독려
3. 전 우주의 삶을 목표로 하는 사람들. 사람이나 짐승이나 나무나 별이나 모두 한 목숨인데, 단지 아주 지독한 싸움에 휘말려 들었을 뿐이다.

P. 417 모든 것을 잃은 순간 (돈, 사람, 고가선, 수레) 그는 해방감을 맛봤다. 모든 것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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