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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대생의 심야서재 Oct 08. 2020

시간이 해내는 일

비 오는 지하철역 앞에서의 불쾌한 풍경

퇴근길 무렵이었다. 마을버스에서 내리자마자, 하늘이 굳은 표정으로 내 얼굴을 감쌌다. 3단 우산을 조작하고 어두운 하늘에서 살짝 물러섰다. 그리고 마을버스 뒷문에서 보도블록 위로 껑충 한 발짝 걸음을 옮기는 순간, 블록이 밟히는 소리 위에 언짢은 소리 하나가 입혀졌다. 우산 위로 부딪히는 빗소리들은 나를 흐뭇하게도 때로 표정을 찌푸리게도 한다. 세상은 원래 복잡하지 않은가. 눈앞에 놓인 온갖 우산들의 다양성처럼 세상엔 다양한 의견과 태도 그리고 사람들의 생각이 존재할 테니.


휘트니 휴스턴의 음성, 아니 휘트니 휴스턴을 복제하려는 누군가의 음성이 들려왔다. 말하자면 그 소리는 빗속을 뚫는 사람들의 시야를 막아서는 소리였다. 문득, 불편한 옷을 억지로 겹쳐 입은 기분이 들었다. 왜 불쾌한 감정이 먼저 찾아왔을까. 그것은 청각적 감동을 방해하려는 시각적 이물감 때문이었으리라. 커다란 우산 하나, 무릎보다 낮은 앰프 하나, 그것과 연결된 유선 마이크, 부정 선거를 주장하는 푯말 하나, 그리고 하늘을 찢을 듯한 육성. 하지만 귀를 뗄 수 없었으니 나는 그 소리를 맨몸으로 맞아야 했다. 비바람보다 더 거센 어떤 거짓 욕심들까지.


그 여자는 가창력이 비교적 뛰어났다. 어쩌면 마이크를 손에 쥐지 않아도 될 만큼 그 여자의 노래 수완은 뛰어났다. 다만 그 여자에게 부족한 것은 사람들을 설득하는 방식에 있었다. 게다가 퇴근길, 비 오는 지하철역 앞이라니. 더없이 소중하며 편안해야 할 누군가의 퇴근길과 어울리지 않는 '부정 선거' 주장이라니.


좌우, 정책 노선을 가릴 것 없다. 명백한 사실을 부정하며 전복하려는 세력들에게 선동당할 만큼 내 주장은 흐리지 않다. 나는 올바른 것들과 그렇지 못한 것들을 걸러낼 지혜를 가졌다. 바른 것은 무엇인가. 실현될 수 없는 거짓 욕망은 무엇인가. 하지만, 그들, 그러니까 사회를 전복시키려는 단 하나의 목적만을 앞세우는 세력들은 평범한 사람들을 현혹하고 정신을 위조하려 든다. 그들은 우리의 삶에 깊숙이 다가서기 위해 비교적 친숙한 주제를 이용한다. 이럴 테면, 휘트니 휴스턴의 'i will always love you' 같은 곡으로.


나는 적어도 그 여자의 실체가 눈앞에 밝혀질 때까지는 그 곡을 입에서 흥얼거렸다. 휘트니 휴스턴의 노래를 즐겨 듣던 학창 시절이 떠올라서, 과거에는 불편했지만 지금은 작게나마 웃을 수 있는 어떤 시절의 위태로운 사랑이 생각나서, 그 시절의 절실함 조차 이제 웃어넘길 수 있으므로, 잠시나마 편안해질 수 있었으리라. 하지만 내 시야가 우측에서 왼쪽으로 이동했을 때, 우산에 가려진 실체가 빗속에서 얼굴을 나타냈을 때, 잠시 찾아왔던 과거의 소박한 추억은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이물감들이 한꺼번에 몰려왔던 것이다. 지하철역을 신속하게 벗어나고 싶었지만 밀려드는 사람들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 지하철 입구가 나타나고 다시 에스컬레이터 위로 발걸음을 올리고 빗물이든 하늘을 찌를 듯한 고음이든 그것에게 멀어지기 위해서라면, 시간의 노고가 필요했다. 그렇다. 시간이 큰일을 해냈다. 그 여자와의 거리가 1미터 2미터 그리고 10미터, 아니 100미터쯤 떨어졌을 때, 비로소 그 여자의 고음은 내 귀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그 여자의 환영도, 육성도, 거짓 선전도 말끔하게 개인 하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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