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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대생의 심야서재 Oct 15. 2020

내가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방법

1973년에 개봉한 스티브 맥퀸, 더스틴 호프만 주연의 《빠삐용》이라는 영화가 있다. 주인공인 ‘앙리 샤리엘’은 살인죄의 누명을 쓰고 남미 부근에 위치한 고립된 섬에서 평생 강제 노동을 해야 했다. 기아나 형무소라는 곳에서 복역 중에 그는 무려 여덟 차례 이상의 탈옥을 감행하는데, 모두 실패하고 만다. 실패를 거듭할수록 빛이 차단되었으며, 먹을 거라곤 바퀴벌레뿐인 독방에 더 오랫동안 갇힐 뿐이다. 


탈출과 체포 사이를 반복하던 그는 악마의 섬이라는 곳까지 유폐되는데, 그곳은 주위가 온통 바다와 절벽뿐인 곳이었다. 깎아지를 듯한 절벽 꼭대기에서 뛰어내린다고 하여도, 주변엔 식인 상어들뿐 갈 곳은 없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도전한 끝에, 마지막 장면에선 코코넛 열매를 두른 포대를 바다에 던진다. 그리고 100미터 바다 한가운데로 그 자신도 뛰어든다. 코코넛 자루 위에 누워 바다 한가운데서 표류를 시작하는 그를 카메라가 무심히 비추며 영화는 끝을 맺는다.


엔딩 크레디트와 함께 흐르는 Andy Williams의 ‘Free as the Wind’를 잠시 감상해 보자.


https://www.youtube.com/watch?v=It3Gzz-N2rk


<빠삐용>의 앙리만큼 절박하지는 않지만 나도 삶에서 끝없는 탈출을 꿈꾸고 시도한다. 그가 5년 동안 독방에 머문 환경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쾌적한 환경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나 역시 탈출이라는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탈출의 의미는 부조리한 공간에 내가 갇혀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렇다면 삶은 부조리한 것들로 가득 차 있는가? 그렇다, 적어도 내 삶에 있어서는 그렇다. 말 못 할 어떤 억울함이, 어떤 추상적인 분노가 삶에 머무는 나를 억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나는 탈출을 연속적으로 시도한다. 성공할 때까지. 탈출 끝에 무엇이 존재할지 알 수 없지만.


그렇다고 내 삶에 부조리함만 가득 차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나는 온갖 부조리함이라는 타이틀을 가진 실체 없는 표상들에게 내 고유의 색채를 잃어간다고 믿는다. 내가 세상에 처음 태어났을 때, 난 아마도 분명하게 만들어야 할 개성 하나쯤을 지녔을 것이다. 그것을 뾰족하게 연마하다 보면, 언젠가 세상에서 빛을 볼 수 있는 날이 올 거라 학수고대하며 살아왔다.


그런데 그런 생각조차 부조리하다는 건 역설적으로 지나가버린 세월이 증명한다. 아무리 예리하게 다듬는다고 해도, 그 번쩍거리는 그러니까 날카로운 깔 끝을 한 번도 쓰지 못할 확률이 더 높을 테니까. 그런 이유는 의지를 더 깎아내린다. 


포괄적으로 생각한다면 죽음 자체가 부조리하다. 내일이 될지 10년 후가 될지 모르는 상태에서도 인간은 꿈을 잃지 말아야 살아갈 수 있다. 꿈은 역설적으로 죽음을 망각해야 한다. 그러니 이 또한 부조리하다. 어찌 이 막막하기만 삶의 끝을, 언제 실현될지도 모를 죽음을 생각하면 삶이 부조리하지 않다고 하겠는가. 꿈은 이렇게 쉽게 부스러지는데.


카뮈는 《시지프 신화》에서 삶의 끝이 부조리로 가는 여정이라 해도 자신이 인간임을 알기 원한다고 말했다. 인간, 우리가 다른 생명을 지닌 것과 구별되는 건 생각하는 능력 때문이리라. 이 얼마나 큰 행운이란 말인가. 인간은 생각할 수 있어서 죽음이라는 부조리한 소재에 대해서도 토론할 수 있으니. 물론 부조리함에 침잠할수록 삶은 더 침침하며, 누군가에게 통제당한다고 믿을 수도 있지만. 내 삶이 부조리한 것들로 가득 차 있다고 해도 난 인간이라서 그 부조리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으니, 삶을 전체적으로 조망한다면 부조리하다고 말할 수는 없겠다.


나는 나의 의지대로 삶을 이끄는가? 나는 무엇이든 스스로 선택할 만큼의 자율성을 갖고 있는가?라고 질문을 던지면 분명하게 대답할 자신이 없다. 그래, 아침에 눈을 떴을 때, 햇살이 온 방안에 가득해도 여전히 시야가 침침한 이유는 용기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억압이라는 단어가 내 인생을 가로막고 있으니 앙리처럼 절벽 위에서 뛰어내리지 못하고 주저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그리하여 절벽 위에서 딱딱한 고체로 굳어가는 것이다.


Free as the wind, free as the wind,

that is the way you should be.

...

Oh, my heart still hears

that voice telling me,

Look, and you'll see.


절벽 위에서 죽을 날을 기다릴 것인가. 상어 밥이 된다고 할지라도 절벽 위에서 뛰어내릴 것인가. 선택의 문제며 부조리를 극복해야 하는 과제가 따른다. 어쩌면 감옥은 안과 밖 모두에 있다. 반복되는 일상에 농락당하면, 지루하다는 의미조차 잊게 만들 테니까. 그렇게 우리는 감옥에 맞게 길들여졌다. 억압당하며 살면서도 저항하지 못하고 아파도 참으며 산다.


시뮬레이션 우주론이라는 이론. 가설뿐이긴 하지만 꽤 흥미로웠다. 인간은 지구라는 감옥에 갇혀 영원히 윤회를 거듭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는데, 부처나, 예수처럼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나 탈출할 수 있다고. 그래, 지구야말로 앙리가 고통받았던 그 ‘악마의 섬’ 일지도 모른다. 우주에 놓인, 우린 모두 지구에 영원히 머물러야 하는 죄를 뒤집어쓴 것이다. 탈출하고 다시 붙잡히는 걸 여덟 번, 아니 수백, 수천 번을 거듭해도 우린 여전히 지구 한가운데에 갇힐 운명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우리는 탈출을 포기하지 않는다.


앙리는 악마의 섬에서 매일 같은 꿈을 꾼다. 재판관은 그에게 늘 똑같은 질문을 던진다. “네 죄명을 알겠는가? 넌 너의 인생을 낭비한 죄로 유죄다!” 그렇다, 그는 사람을 죽이지 않았지만, 스스로를 죽이고 말았다. 그가 죽인 건, 그의 의지, 삶의 의미, 자기 통제에서 벗어나는 투쟁이 아니겠는가. 아니, 계속해서 죽일 수는 없었기 때문에 그는 탈출을 멈추지 않았다. 그것은 자유에 대한 갈망, 자신이 살아야 하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살아있음을 증명하기 위해 매일 두려움을 물리치고, 상어들이 가득 찬 바다 한가운데로 뛰어드는 것이다. 그것이 영원히 반복될지라도.


“야 이놈들아! 난 아직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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