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공대생의 심야서재 Mar 13. 2016

가랑비 속의 외침

중국의 최고 소설가 위화의 첫 번째 장편 소설

이 책을 읽고 나서 나에게 찾아온 것은 참기 힘든 고통, 마주하고 싶지 않은 과거의 쓰라린 기억들이었다. 현실과 망상의 구분을 혼란스럽게 하는 소설을 접하게 되면 나는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지 그 진위에 깊이 집착하게 된다. 분명 이 '가랑비 속의 외침'은 작가의 자전적인 바탕이 아님을 강조하고 있지만, 본인이 경험한 시대의 얘기들과 처절한 삶의 모습들을 적절하게 배합했음을 서두에 강조하고 있다.



내가 이 책을 놓고 나서 생각했던 것은 바로 '고통'이었다. 고통을 떠올리는 것... 상처가 듬쑥한 고통을 정면으로 마주한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어렵다. 특히 내가 겪었던 것들. 어렸을 때 경험했던 충격적인 사건들은 성인이 되고 나서도 그것들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도록 꾸준하게 나의 머릿속을 헤집고, 괴롭힌다는 불편한 사실들이다. 나를 포함한 가족, 또는 내 주변 누구든지 충분히 겪을만한 개연성이 있는 이야기들을 다시 되새긴다는 것은 극한의 고통을 다시 체험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 소설이 내 삶에, 보다 현실적으로 감각적으로 뛰어든 것은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우리는 초현실적인 슈퍼맨에 열광하지만, 때로 내 이웃과 같은, 아주 일반적이며 평범한 사람들의 진실된 이야기에 가슴 한 켠을 내어준다. 내 이웃이 당한 어려움, 기쁨, 슬픔 같은 것들에 내 삶이 절절해짐을 느낀다. 



왜 우리는 가까운 이웃의 이야기에 더 깊이 공감을 하고 빠져들게 되는 것일까? 왜 우리는 연예인과 같은 유명한 사람들의 이야기에 싫증을 내는가? 위화의 소설 속의 이야기가 처절한 여러 가족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너무나 일반적이면서도 평범한 한 가정의 이야기에 지나치도록 몰입을 하게 되는 이유, 책을 놓고 나서도 괴로움에 몸서리를 치게 되는 것은 왜일까? 내가 생각하기에 그것은 바로 내 주위에서 일어날 수 있는, 그리고 나에게 바로 일어날 가능성이 아주 높은 이야기라는 것이다. 나는 그래서 그 이야기에 더 깊이 빠져들게 되었다.





내가 그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내가 그 시대에서 자라났더라면 언제든 바로 겪을 수 있는 이야기였다. 벗어나고 싶어도 벗어날 수 없는 공포는 절망으로, 삶의 희망을 놓는 것으로 나타나게 된다. 나는 중국과 처지가 다른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 태어났지만, 어떤 모습에서는 주인공의 모습과 일면 닮아있는 어릴 적 나의 모습이 투영되었다. 그리고 삶의 의식이 또렷하게 증거 하는, 먼 시절... 지우고 싶은 과거 속으로 다시 떨어지고 말았다. 



누구나 한 번쯤 자라면서 평온하게만 보낸 사람은 없을 지도 모른다. 내가 기억하는 나의 유년기 역시 행복한 것만은 아니었다. 어떤 기억들은 소설 속의 주인공처럼 너무나 선명한 장면으로 남아있다. 그때의 기억들을 다시 묘사하라고 한다면 나를 둘러싼 주변의 인물들, 장소, 시간의 흐름조차 너무나 선명하게 머릿속에 남아, 그것들을 그림으로 그릴 수는 없어도 글로 자세히 묘사할 자신이 있다. 이 소설에 빠져들수록 나의 유년기의 상처가 더욱 자세히 튀어나오는 것 같았다.





왜 어떤 기억들은 나의 기억 속에 더 선명하게 남아있는 걸까? 행복한 기억들은 쉽게 사라지는데, 고통스러운 기억들은 영원히 왜 나를 괴롭히는가? 왜 괴로운 것들은 말끔하게 지워지지 못하고 험한 세상을 살아갈 때마다, 나를 따라다니며 나의 선택과 행동에 저주를 내리는 걸까? 소설은 어쩌면 그것에 대한 해답을 제공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거역하고 싶지만, 지우고 싶지만 그것 역시 나의 인생이고 우리가 함께 살아간 우리들의 일부분이었다는 것을... 



유년의 아픈 기억들을 어떤 방식으로 내가 대하느냐에 따라 앞날의 모습이 달라진다는 것을 전달하려고 한다. 아들러 심리학의 얘기처럼, 과거의 열등감, 나의 상처들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자유,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능력을 우리 인간들은 내면 속에 이미 지니고 있다. 그 능력의 우월함, 무한함을 부정하기에 우리 스스로 상처라는 틀에 잡혀 외롭게 살아가는 것이다. 



내가 선택하는 것, 과거의 아픔, 고통, 괴로움조차 나의 마음먹기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다는 것. 작가 위화는 자신의 자전적인 이야기들. 숨기고 싶은 치부 같은 이야기들을 전 세계의 독자들에게 솔직하게 서스름없이 드러냈다. 그리고 그의 아픈 가정사, 숨기고 싶은 과거의 역사를 밖으로 들춰냄으로써 상처를 스스로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집필로서 얻었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상처에 치유되기 위해서는 그 상처에 정면으로 맞서야 한다. 상처에 정면으로 맞서 그것과 치열한 싸움 끝에 그는 스스로의 열등감을 이겨냈고, 그의 자전적인 이야기가 소설이라는 장르로 다시 새롭게 태어난 것은 아닐까? 그의 아픈 기억마저 제삼자의 위치에서 쳐다보듯 관조하듯, 그는 자신의 상처를 스스로 보듬고 꿰매고 있었다.



우리를 감동하게 하는 문학작품이란 무엇일까? 우리가 문학을 제대로 배우지 않아도 어떻게 책을 읽어야 할지, 자세가 정확하지 않아도, 작가의 인생이 경험한 이야기가 우리의 현실과 맥락이 닿아있지 않아도, 어떤 가느다랗고 희미한 끈 같은 것이 우리에게 닿아있음을 인지하는 순간! 그때 우지끈한 감동이 몰려오게 된다. 그리고 그 순간의 가슴이 내려앉은 뭉클함, 벅찬 감정은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한다. 평생 잊을 수 없는 감격스러움, 나의 인생을 비춰보고 과거의 살았던 삶, 앞으로 살아야 할 미래의 모습들을 어떻게 만들어 가야 할지 작은 길잡이가 되어준다. 이 책 역시 '스토너'의 이야기처럼, 평범한 사람의 삶을 잔잔하고 사실적으로 그려왔다는 점에서 나는 깊이 주목하고 싶다.





나는 위화라는 사람을 이 소설을 통해서 처음 알게 되었다. 그리고 솔직히 초반부까지는 왜 이 작가가 전 세계 사람들로부터 열렬한 사랑을 받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중국에 대한 약간의 거부감 같은 부정적인 감정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도 모르게 이 책을 읽기 시작한 이후로 난 추호도 흔들림 없이, 위화의 책이 내손을 떠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끝까지 오롯이 한 자리에 앉아서 그의 얘기들에 울고 또 울었다. 난 40을 훌쩍 넘은 중년이다. 겉으로 우는 것조차 건조해진 남자다. 하지만 난 마음속으로 목놓아 울었고, 어느 순간 울음과 동시에 내 감정이 풀어짐을 경험했다. 이 책은 나를 잔잔하지만 가슴을 저미게 만들었다. 책을 놓고도 한 없이 그의 인생을 주목하게 되었다. 이야기는 종료되었지만 나의 이야기는 이제 시작인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항상 보잘것없다고 떠올리고 싶지 않았던 고통스러운 나의 유년기. 그것들을 마주할 용기가 생겼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어쩌면 너무나 소중했다. 이제야 그 이야기들을 꺼내서 나도 이야기들로 풀어낼 자신감들이 생겼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때의 기억들은 나에게만 의미가 있을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에겐 별다른 특별한 것이 없는, 재미없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위화의 소설에 잔잔한 감동을 느꼈던 것처럼, 누군가 다른 사람이 던진 내면의 이야기가 그 사람의 내면을 다시 돌아볼 수 있는 하나의 작은 사건으로 힘을 불러일으킬지도 모르겠다. 이 부분이 작가 위화가 의도했던 부분이라 생각하니 가슴에 소름이 돋았다.





우리의 삶은 언제나 굴곡으로 점철되어있다. 어두움이 있으면 밝음이 있다. 우리의 인생이 고통스럽다고 나약함으로 주저앉기도 하지만, 딛고 일어설 수 있는 힘도 우리의 인생에 상존한다. 책을 읽고 나서 조용히 덮었다. 한동안 난 아무 말을 할 수 없었다. 그저 담담히 책을 덮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위화가 전달하고자 했던 그의 기억들 중 내게 남아 있는 희미한 기억들은 어떤 것들 일지 생각해본다. 



시간이 많이 지나갔을 때, 남아있을 '가랑비 속의 외침'과 같은 내 삶의 가랑비가 내리는 시절은 언제가 될까? 생각해 본다. 왜 강렬한 소나기가 아닌 가랑비였을까? 주목한다. 소나기 같이 강렬한 것들만 우리 인생에 깊은 영향을 미치는 것들은 아닐 것이다. 스며드는 가랑비 또한 인생에 잔잔한 여운을 전달하는 것. 그것이 굴곡 있는 인생의 묘미가 아닐런가... 앞으로 그의 소설이 나의 인생에 잔잔한 가랑비처럼 촉촉하게, 무던히 어떤 것들을 적셔갈지 기대해 본다.





옛일을 회상하거나 고향을 그리워하는 것은 사실 현실 속에서 어찌할 바를 몰라 짐짓 평온한 척하는 것에 불과하다 - P. 41


시간은 투명한 어둠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고, 이 감춰진 어둠은 지나온 모든 것을 품에 안는다. 우리는 결코 땅에 발을 딛고 사는 게 아니다. 사실 우리는 시간 속에 살고 있다. 논밭, 거리, 강, 집 등은 모두 우리가 시간에 몸을 맡기고 살아가는 동한 함께하는 동반자들이다. 시간을 우리를 앞이나 뒤로 밀고 갈 뿐만 아니라 우리의 모습을 바꿔놓기도 한다. - P. 58


나는 내가 두 부분으로 찢어져 있고, 그 두 부분은 서로를 적대시한다는 걸 수시로 아주 분명하게 느꼈다. - P. 136


소멸을 앞둔 생명은 과거에 한없이 미련을 보이기 마련이다. - P. 264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