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공대생의 심야서재 Apr 01. 2016

삶의 의미란 무엇일까?

영화 <월터 교수의 마지막 강의>를 통해 삶의 의미를 생각하다.

삶이란 무엇일까? 나는 매일 잠자리에 들기 전, 보이지 않는 미래의 이미지, 시급한 내일을 무사하게 보내기 위한 이유를 그리려 애쓰지만, 삶에 대한 궁금증을 증폭시킨 채 꿈속에까지 끌고 들어가, 없을지도 모를 정답을 찾아 무한히 헤매는 사람이다. 


나는 을 이야기하는 것이 좋다. 그러나 사람들은 더 이상 삶에서 진지함을 찾으려 하지 않고, 단순한 흥미, 자극적인 쾌락, 인간성의 상실감 같은 것에 자신의 넋을 놓고 있다. 삶에 지극히 무관심한 사람들과 더 이상 인생의 철학적인 이야기를 나눌 수 없기 때문에, 나는 결국 책과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간접적인 삶의 이야기를 듣고 보고 읽으려 했다. 


나는 철학을 잘 모른다. 철학의 역사, 계보에도 전혀 능통하지 않으며, 어떤 철학자가 이 세상에 존재했었는지, 그들이 설파한 구체적인 이야기들이 무엇이었는지. 그것에 관한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다만 철학적인 성찰, 즉 인간이 보편적으로 고민했던 생각들...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잘 산다는 것은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내가 사는 삶의 의미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인가?', '왜 인간은 사랑을 하는 것인가?', '왜 인간은 쾌락에 몰두하는가?' 정도의 사유를 한다는 것... 그것 자체만으로도 이미 철학적인 고뇌를 하고 있으며, 삶을 바르게 살도록 노력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삶을 포기하지 않고 꾸준하게 버틸 수 있는 이유는, 마땅히 살아야 할 가치를 내면 속에서 찾고 있기 때문이다. 빅터 프랭클 박사가 우리에게 전달했던, 지옥과 같은 '죽음의 수용소' 환경 속에서도 찾을 수 있었던 삶의 의미, 어느 순간 목적지를 잃어버린 사람들... 그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두움 속에서조차 순례자의 고행을 선택한 사람들이 찾던 삶의 의미, 또 다른 세상의 자유를 갈망하고 미래의 독립된 자신을 꿈꾸며 퇴사를 결행하는 사람들의 삶의 의미, 이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속해 있는 사회의 구성원으로 생존하기 위한 '삶의 의미'를 찾으려 했다. 왜 유달리 한국 사람들은 삶의 의미를 안쪽에서 찾지 못하고 바깥에서 찾으려고 할까? 닫혀있는 내면보다 소통이 단절돼버린 외부의 신선한 자극에 굶주렸던 것일까?



우리의 삶은 유한하다. 이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부인할 수 없는 명백한 사실이다. 그러나 유한한 삶을 살고 있는 인간은 자신이 보유한 인생이라는 그릇의 깊이가 어느 정도 되는지 정확히 인식하지 못한다. 자신이 태어난 실존적인 이유, 남들과 교감하며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들에 차츰 '무감각'적으로 변하고 있다. 


사람들은 차츰 자신이 살아야 하는 이유를 상실하고 있다. 모든 질문에 귀찮음을 토해낸다. 오직 숨 쉬는 것만이 누군가에게 의무인셈이다. '어떻게 살 것인지, 왜 살아야 하는지, 지금 내가 왜 이곳에 존재하고 있는지' 궁금해하지 않으며, 그 이유를 찾으려 하지도 않는다. 자신이 왜 혹사를 당해야 하는지도 모른 채, 내가 아닌 누군가를 위해 살기도 한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다. 완벽해 보일 것 같은 사람들도 불완전성을 지니고 있다. 자신의 약점을 깊이 감추기 위해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자신감을 겉으로 드러내지만, 난 곧잘 그 사람의 행동 속에 숨겨진 나약한 자아를 발견한다. 인간은 나약한 존재이기에 실수를 저지른다. 다만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다면 불완전한 존재에서 점차 안정된 존재로 변화한다. 그 내면에는 철학적인 성찰이 깊게 깔려있다.


<월터 교수의 마지막 강의>는 삶의 의미에 관한 철학적인 메시지를 관객과 소통하고 싶어 한다. 감독은 영화 속에 등장하는 여러 불완전한 인물들을 통하여 철학적인 성찰의 시간, 인생의 깊은 화두를 관객에게 던진다. 관객은 영화가 끝난 후, 조용히 영화가 전달했던 의미에 진중하게 집중한다. 다소 무거운 인간이라는 존재, 인생의 철학적인 성찰, 삶의 의미 등에 대한 주제를 차분하게 생각한다. 감독은 삶을 잃어버리고 방황하는 현대인들과 속 깊은 대화를 나누고 싶어 한다. 인간성을 상실한, 삭막한 현실 속에서 무관심이라는 병에 빠져들어 무표정한 표정으로 하루를 정신없이 마감하는 현대인들에게 사유할 기회를 제공한다.


이미지 출처 : 네이버 영화


이 영화에는 각자 다른 환경에 처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이야기의 중심에는 주인공인 '월터' 교수가 있다. 월터 교수는 대학교에서 30년 동안 철학 과목을 꾸준히 가르치고 있다. 그는 니체와 하이데거의 실존주의 철학을 통해서 인간이 평생 동안 찾고자 하는 삶의 의미, 죽음이 뜻하는 의미를 전한다. 물론 대부분의 평범한 인간들은 그 질문에 대하여 지극히 무감각적이다. 


월터 교수는 자신의 인생 중 30%가 넘는 부분을 교단에서 철학을 가르치며 보냈다. 똑같은 주제를 통하여 세월에 따라 바뀌어가는 학생들을 상대로 한결같은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강의를 듣는 학생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일반적인 사람들은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들에 무관심했다. 인간 소외, 사회 혼란, 인구 증가, 대량 학살, 전쟁 등의 전 지구적인 문제들에 침묵했다. 상실된 감정을 안은 학생 한 명은 사람들의 무관심, 무감각적인 증상에 고통스러운 나머지, 자신이 잃어버릴지도 모를 마지막 감각을 지키기 위하여 자신의 신체에 고통스러운 자학을 가한다.



주인공인 월터 교수는 매주 금요일 밤, 그의 아내에게 수국을 선물했다. 그와 아내가 함께 한 날 이후로 한결같이 실천한 그만의 소박한 삶의 의미였다. 그 삶을 살고자 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의 아내의 실존적인 본질의 실체에 대한 사랑이었을지도 모른다. 금요일마다 작은 실천을 행하는 그의 행동의 의미는 사랑하는 사람과 열심히 살았던 한 주의 마무리를 함께하고 싶다는 욕망을 뜻할지도 모른다.



영화에서 월터 교수는 왜 '수국'을 아내에게 매주 금요마다, 인생을 살아오는 동안 계속적으로 선물했을까? 수국이라는 꽃은 자신의 색깔을 토양의 변화에 따라 바꾼다고 한다. 토양에 따라서... 환경에 따라서 자신의 모습을 맞춰나간다. 월터 교수 역시 늙는다. 인간은 늙을 수밖에 없다. 이 세상이 어떤 모습으로 변질되더라도, 사람들이 무감각적으로 무너지더라도 월터 교수 자신은 중요한 자신만의 가치를 지키고 싶었을 것이다. 자신의 모습이 계속적으로 늙어가더라도, 그 육체적인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가치, 자신의 모습이 늙어 변화되었지만 누군가를 꾸준히 사랑하는 모습, 그 아름다운 모습이 한결같음을 증명하려는 의도였을지 모른다. 수국은 바뀌고 있지만, 역설적으로 자신의 사랑은 건재함을 말이다.


월터 교수가 우리에게 전달하려 했던 가치는 무엇일까?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심각하게 고려하게 되었다면, 이 영화가 목표로 하는 가치는 일단 전달되었다고 볼 수 있다. 영화의 결말은 다소 황당하고 뒷맛이 개운하지 못한 맛이 있지만, 내가 삶의 의미를 다시 한번 다지게 되었다는 측면에서 감독에게 좋은 점수를 주고 싶다. 삶의 철학적인 고민을 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이 영화를 감히 추천한다. 



끝으로 월터 교수의 마지막 강의중 일부분을 발췌해본다.



삶이란 무엇인가?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나? 살아갈 이유가 있는가? 소외, 혼란, 인구 팽창, 대량 살상, 우리는 현실적 제약들에 대해 비유든 전형적인 예든 실재하는 진리는 없다고 단정 지을지도 모릅니다.

태초부터 정해진 대로 선과 악, 옮고 그럼과 같은 지상의 순리를 거역하고 환각제와 맞바꾸려 하죠. 공산주의, 사회주의, 자본주의, 심리학, 테크놀로지, 사라져가는 걸 대체할 시스템은 얼마든지 있어요.

20세기는 나의 세대이자 여러분이 태어난 때이기도 하죠. 많은 이들에겐 희망, 자유, 가능성의 시대 또 누군가에겐 자포자기와 절망의 시대, 가장 인간적인 세기 니체가 옳았다는 걸 제대로 실감하헤 됐죠. 우리는 결국 멋지게 그러나 가슴 아프게 혼자입니다. 이런 공허감 속에서 철학은 최악의 경우 구시대의 관심사로 전락하죠.

우리는 대체 왜 사는가? 어떻게 하면 인간답게 살 것인가? 그들은 지금 어떤가 묻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답을 찾고 있습니다. 다음 세기 여러분의 시대가 오면, 우리는 뭘로 버틸까요? 누군가에겐 터무니없고 종잡을 수 없는 진리 탐구를 결국 단념하게 될까요?

윤리? 도덕? 선? 그 자체로는 입증될 수 없는 원리들이 지금이라도 쉽게 입증되나요? 아니면 이런 게 다 끝내 무의미한가요? 왜 여전히 목적의식을 추구할까요? 필요치 않다고 누차 장담하면서도 그걸 어디서 찾고 싶어 할까요?

그래서 어둠에 눈을 감은 채 우리는 방황합니다. 도저히 소통이 불가능하다는 그릇된 믿음이 만연한 시대에 여러분! 질문을 주저하는 이여 마음의 빗장을 여세요. 서로 타인이 되지 맙시다. 서로에게 배운 것들을 모른 척하지도 맙시다. 그게 더 중요하죠. 여러분의 전성기는 이제부터에요. 우리 모두 그러하길 빕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