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공대생의 심야서재 Jan 24. 2016

죽음의 수용소에서

빅터 프랭클

사진 출처 : 플리커 이미지(CCL)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



죽음을 목전에 두게 되었을 때, 인간은 어떤 반응을 보이게 될까? 인간은 죽음에 대하여 누구나 한 번쯤은 거쳐야 할 의무, 저항할 수 없는 선택이라며 담대하게 고개 끄덕까? 프랭클 박사는 더 이상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는 단 한 가지, '죽음'이라는 사실에 직면한 '죽음의 수용소'에 속한 인간 집단의 다양한 특성과 그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삶의 작은 희망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조차 극복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그는 인간이 소유한 무한한 잠재 능력과 인간의 생(生) 향한 원초적 본능을 들려주고 있다.



사진 출처 : Google 이미지(CCL)



그는 수용소에서 자신과 수감자들의 정신을 치료할 수 있었던 그 만의 비법인 <로고테라피>를 창안했으며, 이것은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는 극도의 인간성이 상실된 상태에서도, 자신의 존재론적인 의미와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의지를 찾기 위한 독특한 '정신분석학 이론'이다.



사진 출처 : 플리커 이미지(CCL)



이 이야기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프랭클 박사가 직접 경험한 것과 오직 공포와  두려움뿐인 극한의 상황에서 용기와 희망을 끝까지 놓지 않았던 자신의 경험담을 극 사실적으로 들려주고 있다. 수용소 생활이 언제 끝날지 예측조차 할 수 없으며 미래가 없는 마지막 삶을 살았던 '프랭클' 박사,  살아남을 자신조차 없었던 프랭클 박사가 마지막 죽음의 문턱 앞에서 자신의 영혼과 1대 1로 조우하며 스스로를 구제할 수 있었던, 죽음마저 스스로 다스릴 수 있었던 솔직한 자기 고백의 이야기다.



도저히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온갖 극한의 상황을 견디어낸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일까? 체력적으로 강한 자들일까? 반대로 정신적으로 건강하고 의지가 강한 사람들일까? 그들은 어떻게 죽음의 유혹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으며, 자신이 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실존적인 질문에 절실하게 대답할 수 있었을까?



"내가 만일, 프랭클 박사처럼 똑같은 운명에 처한다면 과연 어땠을까?"



사진 출처 : 플리커 이미지(CCL)
나는 최근에 소설로 읽었던 <마션>이 떠올랐다. 주인공인 '와트니'는 화성에서 임무를 수행하다, 불의의 사고로 인하여 홀로 화성에 남겨지는 고립무원의 위기에 처하게 된다. 그가 화성에서 구조될 수 있을 때까지, 남아 있는 식량만으로는 도저히 버틸 수 없는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는 낙담하지 않고 실망하지도 않았으며 터벅터벅 화성의 걸음을 이어나갔다.



'와트니'는 최악의 상황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고 그 어떤 위기도 견뎌 내겠다는 강한 삶의 의지를 불태웠다. 만약 내가 '와트니'였다면, 내가 아우슈비츠의 '프랭클'이었다면, 분명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죽음의 신을 기다리는 산 송장이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엄슴해왔다.



수용소의 삶



사진 출처 : http://www.thetimes.co.uk/tto/arts/books/fiction/article2518613.ece

나는 이 책에서 전달하는 수용소의 처절한 삶이 내 가슴을 세차게 때리는 울림을 전달받지는 못했다. 이미 오래전 영화 <홀로코스트>, <쉰들러 리스트>, <밴드 오브 브라더스>, <인생은 아름다워>등 다양한 필름들 속에서, 인간의 모든 존엄성과 가치가 상실된 죽음이 가득한 '수용소의 삶'을 가슴 깊이 이해하고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했기 때문이었다. 나에게 프랭클 박사가 이야기해주는 아우슈비츠의 참상들은 더 이상 생소하거나 새로운 충격의 이야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프랭클' 박사만의 특별한 정신분석학 이론을 바탕으로 다양한 인간들의 심리상태를 심층 관찰하고 있는 측면이 꽤 흥미로웠다. 자신의 처지를 돌볼 여유조차 없었던 박사가 다른 인간들의 행동에서 심리적인 상태를 분석하고 파악하여 하나의 이론을 정립한다는 것에 신기하기도 했고, 경탄하기도 했다. 누구보다 박사 자신이 경험한 수용소의 삶의 정신적인 연구는 감각적으로 나의 사상 속으로 새겨지게 되었다.



출처 : https://nickmatthews.ca/ 영화 밴드오브브라더스 수용소 장면중에서



사진 출처 : 플리커 이미지(CCL)
나는 군 시절에 겪은 가혹했던 시간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92년, 강원도 춘천의 훈련소 그곳은 나에게 '아우슈비츠'이상의 극한의 공포를 안겼던 뜨거운 분노가 치밀었던 곳이다. 젊은 우리들은 훈련소에서 인간이 아닌 하찮은 통나무 같은 취급을 받았다. 우린 제대로 잠을 잘 수 없었고, 먹지도 못했으며, 몇 주동안 씻지도 못했고, 제대로 숨조차 쉴 수 없는 고통을 겪었다. 조교들은 아우슈비츠의 '감시병'이었으며, 몇몇 동료들은 아우슈비츠의 '카포'였다.

또한 아우슈비츠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동료를 식별할 수 있었던 유일한 수단은 서로의 '식별번호' 뿐이었다.

'676번 훈련병 OOO!'  676번 - 이 번호를 아직까지 기억하다니.. - 은 나를 식별하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내가 훈련소에서 개죽음을 맞을지도 모른다는 극도의 공포심은, 물론 아우슈비츠의 그것보다는 못하겠지만, 두려움은 분명 아우슈비츠에 비견될만한 '죽음의 공포' 그 자체였다. 나는 아직도 꿈속에서 그때의 공포가 되살아나는 망령을 경험한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삶은 삶과 죽음의 경계선이 언제나 맞닿아있었다. 한 발짝만 헛디디는 순간 그들은 삶을 놓을 수 있었다. 단 한순간의 선택으로 삶과 죽음의 명암이 갈릴만큼 죽음은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강요에 불과했다. 수감자들이 가지고 있는 것은 자신들의 벌거벗은 빈  몸뚱이뿐이었으며, 그 어떤 위험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는 방법은 있지 않았다. 다만 그들이 처한 악조건 하에서 선택할 수 있던 것은, '가스실' 덕분에 언제라도 죽음과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이었고, 그것 때문에 굳이 자살로 위로받을 필요 없다는 단순한 논리뿐이었다.



사진 출처 : 플리커 이미지(CCL)


그가 책을 쓰게 된 동기



이 책은 그가 죽음의 수용소에서 체험하고 분석한 이야기가 핵심이다. '그가 체험한 경험의 정확한 본질은 무엇일까?' '오늘날 살아남아 편안한 삶을 누리는 우리들을 수용소의 체험 속으로 강하게 빨려 들어 버리게 되는 강렬한 목적들은 대체 무엇일까?' 단순하게 수용소에서 벌어진 참혹한 참상들을 객관적으로 전달하려는 사실성보다는, 정신의학자로서 자신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내면의 극복 이야기들 - 정신 분석학적인 면에서 - 이 세상에 남기고 싶어 한 것이 주목적이라 생각한다.



사진 출처 : 플리커 이미지(CCL)



이것은 수용소에 실제 머물러있던 사람만이 들려줄 수 있는 객관적이며 공정한 사실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죽음마저도 겸허하게 수긍하고 받아들인 용기를 가졌던 숭고한 한 영혼의 이야기이다. 사실 그곳에서의 참상은 지나치게 과장되더라도 적당하게 눈감아 줄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지만, 프랭클 박사는 객관성을 잃지 않으려 나름 공정한 시각으로 수용소를 바라보며 얘기를 전개한다. 프랭클 박사는 스스로의 신념을 지키기 위하여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수감자의 다양한 심리 상태



수용소 안에 머물며, 그는 수감자들을 관찰하기 시작한다. 수용소에 들어온 직후 수감자들은 초반에 자신이 수용소에 들어온 사실을 거부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충격'의 상태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점차 수용소에 적응하게 되면서 상대적으로 미래가 없는 것을 직감하고 '무감각'의 상태에 빠져 '정신적인 죽음'을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석방되어 자유를 얻은 후에는 '불신', '비통', '환멸', '슬픔', '환희'의 감정을 경험하게 된다. 해당 감정 상태를 프랭클 박사는 '감정 결핍' 현상으로 설명하고 있다.



사진 출처 : 플리커 이미지(CCL)



혐오, 공포, 동정심의 감정이 사라진 수감자들은 결국 죽음을 일상적인 것, 무감각의 형태로 해석한다. 그들의 삶은 삶을 지탱하기 위한 단 한줄기 햇살 같은 희망마저 사라졌다. 그러나 극한의 고통 속에서도 놓지 않은 단 한 가지 마지막 감정이 있었다. 그것은 자신의 생명과 친구의 생명을 잃지 않겠다는 정신적인 과제였다. 그것은 사랑이라는 인간이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숭고한 목표에 해당이 된다. 고통 속이었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행복했던 순간을 떠올리면 그 어떠한 현재의 고통도 잊어버릴 수 있었다.



수감자들은 특별하게 예술의 활동에 심취했다. 노래, 시낭송, 촌극 등에 빠져들었는데, 그들이 예술활동에 활발하게 참여했던 이유는 암울한 그들의 현실을 잊기 위한 좋은 방법이었다.



사진 출처 : 플리커 이미지(CCL)


수용소에서의 작은 행복



몇몇 수감자들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유머를 잃지 않았다. 극한의 상황을 딛고 일어서게 하는 원동력은 작은 유머였다. 인간이 유머를 구사하고 사물을 유쾌하고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은 사피엔스가 오래도록 진화되어 살아남을 수 있는 가치의 수단이다.



그들은 일상생활에서 작은 행복을 느끼곤 했다. 비록 다른 수감자들과 비교하여 느낄 수 있는 상대적인 행복들이긴 했지만, 시련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의지를 박탈당한 최악의 상황에서도 행복의 가치를 누리길 원했다. 그들이 수용소에서 누렸던 행복은 일종의 소극적인 행복이었다. 인간에게 모든 것을 빼앗아갈 수 있어도 단 한 가지, 마지막 남은 인간의 자유,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태도를 스스로 결정하고, 자기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만은 빼앗을 수 없는 그들의 마지막 자존심이자, 마지막 행복이었다.



사진 출처 : 플리커 이미지(CCL)


자유를 향한 의지



수감자 중에서 아주 적은 사람만이 충만한 내면의 자유를 누리고, 시련을 견딤으로써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있었다. 수감자의 내면 상태는 결국 자신이 만들어가는 또 하나의 삶이었고, 수감자는 제한된 자유 긴 했지만 정해진 틀 안에서도 스스로의 자유의사에 따라 삶을 만들어나갔다. 물론 끝을 알 수 없는 수용소의 삶이 일시적일 것인지 영원할 것인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기는 했지만... 결국 시련과 죽음이 닥쳐와도 삶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영혼의 자유에 대한 갈망일 것이다.



수감자는 미래의 목표에 대한 기대 - 탈출하는 것 - 로 희망을 잃지 않은 사람들은 살아갈 수 있는 '용기'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삶의 목적을 상실하고 그저 '죽음'을 기다릴 뿐이었다. 미래에 대한 기대는 '삶'으로, 미래에 대한 상실은 육체의 면역력을 저하시켜 결국 '죽음'이라는 결과를 낳게 할 뿐이었다.



사진 출처 : 플리커 이미지(CCL)



인생은 치과의사 앞에 있는 것과 같다. 그 앞에 앉을 때마다 최악의 통증이 곧 찾아올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러다 보면 어느 새 통증이 끝나 있는 것이다. - 비스마르크

나를 죽이지 못한 것은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들 것이다. - 니체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저마다의 시련들을 통해 세상에서 얻을 수 없는 '두려움 극복'에 대한 자신감을 얻었다. 과거의 고통 속에 갇혀 평생을 멍에 속에 갇혀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신 이외에는 두려워 할 것이 없다는 자신감으로 인생을 경이롭다 생각하고 자신만만하게 사는 사람도 있다. 갇혀있다가 석방된 죄수들에게서는 모든 것이 꿈같고, 비현실적인 '이인증'이라는 정신적인 증상도 발견되었다.



로고테라피


사진 출처 : 플리커 이미지(CCL)
- 환자의 미래에 초점을 맞춘다.
- 악순환을 형성시키는 송환 기재를 통하여 고통을 약화시킨다.
- 환자 스스로 삶의 의미를 깨우치게 한다.









실존적 좌절(누제닉 노이로제) 이란

1) 존재 그 자체

2) 존재의 의미

3) 개인의 삶에서 구체적인 의미를 찾는 노력

의 모든 의미를 찾으려는 인간의 의지가 좌절당하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에게 실제로 필요한 것은 긴장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가치 있는 목표, 자유의지로 선택한 그 목표를 위해 노력하고 투쟁하는 것이다. - 정신적인 역동성 필요



사진 출처 : 플리커 이미지(CCL)



실존적 공허(권태) 란

1) 동물적 본능을 잃음

2) 전통의 와해 : 자신이 원하는 삶을 상실함

인간이 진정한 의미의 인간이 된 후 겪는 정신적인 손실을 의미한다.



삶의 의미를 찾는 세 가지 방식

1) 무엇인가를 창조하거나 어떤 일을 함으로써

2) 어떤 일을 경험하거나 어떤 사람을 만남으로써

3) 피할 수 없는 '시련'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도록 결정함으로써 삶의 의미에 다가갈 수 있다.



로고테라피의 기본 신조는 '삶에서 어떤 의미를 찾는 것'이다. 인간의 잠재력은 한 개인의 비극을 승리로 만들고, 곤경을 인간적 성취로 바꾸어 놓는다. 인간은 시련을 겪으면서 고통을 승리로 승화시키고, 스스로 시련을 견딜 수 있는 용기를 생산한다. 마음속의 두려움이 공포의 대상을 만든다.



로고테라피에서 강조하는 것은 '과거의 집착에서 벗어나'라는 부분이다. 이것은 아들러의 '열등감'과 여러모로 비슷하다.  '왜 살아야 하나 하는 인생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나갈 수가  있다.'는 니체의 말처럼 살아야 할 분명한 이유가 있는 사람은 절대 생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진 출처 : 플리커 이미지(CCL)



죽음의 수용소였던 '아우슈비츠'에서도 삶의 의지를 끝까지 불태웠던 프랭클 박사처럼, 짧은 인생은 삶의 의미의 과제를 묵묵히 수행하는 과정일 것이다. 무한한 우주에 존재하는 '나'는 오직 하나이며, 삶은 영원히 지속될 수 없다.



분명한 자신의 존재를 자각하고 어떤 어려움과 고난 속에서도 자신의 가치를 찾는 것,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충만한 행복을 누리는 것, 누구나 행복할 자격을 갖추고 있다는 것, 지금이 힘들지만 언젠가 갈망하는 영혼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꿈을 꾸는 것 등의 삶의 의지를 끝까지 잃지 않는 것이 '로고테라피'가 추구하는 지향점일 것이다.



죽음 속에서도 삶의 의미를 찾은 '빅터 프랭클' 박사에게 경의를 표한다.



사진 출처 : 플리커 이미지(CCL)









매거진의 이전글 카피책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