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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대생의 심야서재 May 12. 2021

출근길을 대하는 나의 자세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이야기가 봄바람처럼 나부끼는 아침. 가벼운 셔츠차림이 어울리는 늦은 봄 언저리쯤이었다. 출근 시간보다 적어도 30분 이상은 일찍 도착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오늘도 나는 회사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버스는 반갑게도 5분이나 일찍 도착했으나 빈자리를 찾아볼 수 없어 나는 위태롭게 서 있어야 했다. 가다 서다를 반복하며 흔들거리는 버스, 창밖에서 반짝이는 햇살의 낮은 출렁거림, 미세먼지를 가볍게 머금은 바람, 잠시 후 내려야 한다는 방송이 들려왔다. '글쎄 이곳이 내가 내려야 할 곳일까. 더 이상 전진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의미 없는 생각이 번들거렸다.


다른 사람을 따라 버스에서 내렸다. 걷다 보니 어느새 나는 암사역 입구로 들어섰고 말없이 걸었다. 기억나지 않는 어떤 장면들, 이를테면 얼핏 흘러가버린 맞추지 못한 꿈의 조각들을 건드리다, 나는 길을 잃을 것 같았다. 


방향을 잃은 사람처럼 이정표를 힐끔 바라보거나 사람들의 옷차람을 잠시 바라보거나, 바닥에 찍힌 점자 안내 표식, 깜빡이는 초록색 불빛을 따라 움직이기만 했다. 그러다 기다란 에스켈레이터에 발바닥을 불안하게 올렸다. 끝이 없는 높이, 예리한 경사 때문에 어질어질했으나 빈자리를 꽉 채운 사람들 덕분에 안정을 찾았다. 보이는 거라곤 무표정, 차분함을 넘어서 가라앉은 사람들의 얼굴뿐이었지만.


지하철 입구에는 신경림 시인의 <특급열차를 타고 가다가>가 보였다. 우연을 가장한 필연적인 그 무엇이.


'이렇게 서둘러 달려갈 일이 무언가

환한 봄 햇살 꽃그늘 속의 설렘도 보지 못하고

날아가듯 달려가 내가 할 일이 무언가'


...


'이르지 못한들 어떠랴 이르고자 한 곳에

풀씨들 날아가다 떨어져 몸을 묻은

산은 파랗고 강물은 저리 반짝이는데'


그래, 무엇을 위해 이렇게 매일 같은 구간을 일정하게 오고 가고 있을까. 행복을 더 많이 사기 위해? 바쁘게 살아야 무기력을 떠나보낼 수 있기 때문에? 아니면 그 무엇이든 간에. 느리게 걸어가면 잊힐 것 같아서? 원래 바쁘게 뛰어왔으니까? 대답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잠시 느리게 살아보고 싶었다. 신경림 시인의 시 앞에서라도. 화살표는 반듯하게 걸어가면 된다고 지시했지만.


좌석에 앉은 사람들의 표정도 에스컬레이터 위를 오르내리던 사람들의 표정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들도 한없이 가라앉았고 완벽하게 핏기 없는 얼굴이었다. 어딘가를 향해 가지만, 출발지 일지, 종착지 일지 말할 수 없는 단조로움 같은 것들에 둘러싸인 채.


지하철 잡상인을 오랜만에 만났다. 꽤 시끄러운 소음이 귓속으로 굴러 들어왔으므로 읽던 이태준의 <문장 강화>가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소음으로 치부할만한 것도 아닌, 단조로운 일상을 깨뜨리는 명쾌함 같은 것이었기에,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물건은 꽤 쓸만해 보였다. 스마트폰을 고정시켜주는 거치대였다. 무엇이든 착착 그 물건에 달라붙었다. 단 돈 2천 원. 너무나도 가볍지만 내 지갑엔 늘 존재하지 않는.


나는 그 물건에 구미가 당겼으나 현금을 지참하는 일이 없으므로 카드로 결제가 되는지 물어보는, 그러니까 생각 없는 인간도 아니었으므로 물건을 자랑하는 진기한 손놀림에 넋을 잃다 다시 스마트폰 화면으로 되돌아가야 했다.


회사까지는 아직 1시간 이상 남았고 지하철은 부산스럽지도 않았다. 나는 여유를 오래간만에 가득 안고서 일정을 잠시 확인하곤 다시 <문장 강화> 들었다. 나는 왜 이렇게 바쁜 삶을 살고 있는가. 글을 쓰는 삶을 살겠다고 굳은 각오를 다지면서도 가끔 그 단단함이 풀어지는지 알 수 없다. 그런 흐트러진 부스러기 같은 마음들을 다시 주워 들어야 한다.


시간은 흐르고 나는 어디든 장소를 바꿔서 사는 사람이 된다. 그렇게 바쁘고 정신없이 어디든 오가다 보면 억울한 마음도, 아니 잘못의 원인을 나에게 돌리는 행위도 줄어들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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