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공대생의 심야서재 May 14. 2021

결단의 단축키

나에겐 결단으로 향하는 단축키가 필요하다

몇 달 만에 영상 편집 작업에 들어갔다. 다빈치 리졸브를 실행했으나 어떤 순서로 작업을 해야 하는지 기억이 하나도 나지 않았다. 머리를 쥐어짜고 몇 가지 메뉴를 꾹꾹 눌러봐도. 기억 상실증이라도 걸린 사람처럼 이곳저곳을 클릭했었으나 그 일도 거의 무용했다.


기억을 하나씩 복기해가며 작업을 실행하니 우습게도 그것들이 하나씩 복원됐다. 마치, 단축키 하나만 꾹 누르면 머릿속의 모든 기억들이 차례대로 살아나면 얼마나 좋을까. 그때 한 가지 생각이 번쩍 머리를 스쳤다. 스승이 예전 내 프로그래밍 실력을 테스트할 때, 먼저 체크했던 단축키의 숙달 여부였다. 스승은 알고리즘의 이해도도 중요하지만, 내가 툴에 숙련된 인간인지 살펴보기 위해 단축키를 얼마나 많이 외우고 실제 활용하는지 테스트했다. 단축키가 왜 중요한지 나는 이해할 수 없었으므로, 메뉴에 모든 기능이 포함되어 있다고 웃으며 화답했다. 서툴더라도 마우스를 옮겨서 메뉴를 누르기만 하면 웬만한 문제는 해결된다고 자신 있게 대답까지 했다. 스승은 한심한 눈초리로 내 눈을 쳐다봤지만.


그의 이론은 이런 것이었다. 프로그래밍 실력은 이미 평준화된 지 오래됐다. 인터넷에서 검색만 할 줄 알아도 누구나 필요한 자료 - 고난도의 해법까지 - 를 금방 찾아낼 수 있으며, 고수들에게 질문만 해도 대답을 1시간 안에 받을 수 있는 초연결의 세상에서 우린 산다고.


많은 도구를 써먹을 줄 알고, 지식을 빠르게 습득하여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하는데, 자동화된 단축키의 사용 여부가 더 중요해졌다고. 남들보다 더 빠르게 기술을 사용하는 게 중요한 시대라고 말했다. 나는 왜 단축키의 숙달 여부가 속도와 관계있는지 되물었다. 대표는 생각은 빠르게 나타났다가 거품처럼 가라앉는 속성을 가진다고 말했다. 빠르게 결정하고 행동해야 하는데, 마우스 천천히 움직이며 메뉴가 어디에 있는지 찾아 헤매고, 그러니까 옵션이 저장된 대화 상자가 어디쯤에 있고, 그것의 순서를 머릿속에서 그리지 못한 상태에서 작업에 투입되면, 그 사이에 생각은 사라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단축키는 어떤 명령을 실행하기 위한 중간의 수고스러운 과정을 뛰어넘는다. 코드를 입력하는 순간에 집중하도록 환경을 유지하는 게 가장 중요한데, 단축키는 그런 중간 과정을 생략하니 프로그래밍 자체, 즉 본질에만 집중할 수 있다는 얘기였다.


스승 덕분에 나는 개발 툴에 존재하는 웬만한 단축키를 단기간에 외울 수 있었다. 수만 줄의 소스코드는 통째로 외우지 못해도 수십 줄 정도의 단축키 정도야 외울 수 있었다. 코드를 짜는데 단축키는 요긴하게 활용됐다. 코드만 잘 짜도록 주변부를 깔끔하게 치워줬다. 어떤 기능이 어느 메뉴에 숨어 있는지 찾지 않아도 단축키만 있으면 순식간에 장애물을 뛰어넘을 수 있었으니까. 특히 특정 라인으로 이동하는 소스코드의 북마크 기능은 지금도 가장 자주 써먹는 것들 중 하나다. CTRL +  F 누르며 하나씩 소스를 찾지 않는다. 이런 짓은 하수나 하는 거다.


영상을 편집하다 단축키부터 외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주 사용하는 메뉴의 단축키가 무엇인지 그것부터 정리하고 하나씩 활용해봤다. 1시간 걸리던 컷 편집 시간이 거짓말 보태지 않고 50% 이상이 단축됐다. 단축키 덕분에 생산성이 두 배 이상 향상된 것이다.


나는 마치 프로게이머가 캐릭터를 조종하듯 몇 가지 키를 반복적으로 타이핑했다. 나는 무아지경에 빠져든 사람처럼 그 순간 프로 편집러로 빙의한 것이다. 그래, 어떤 일이든 익숙해지려면 시간이 필요하지만 어쩌면 요령이 더 중요할지도 모른다. 익숙함에 익숙해지려면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데, 단축키는 그런 상황에 치트키 같은 역할을 수행한다. 하지만 반칙이 아니다. 단지 타인과의 경쟁이든, 자신과의 싸움이든 조금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고자 하는 작은 전략 정도가 되겠다.


내 결단을 향하는 내 모든 길에도 단축키가 놓여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은 오래, 코딩은 단번에’,를 철학으로 세운 스승의 선언처럼 모든 작업을 모아놓고 단번에 실행할 수 있으면 좋겠다만, 삶엔 늘 선택과 집중의 시간, 노력과 기나긴 여정이 따른다. 


실패든 성공이든 상관이 없다. 단지 오래도록 생각한 일에 대하여, 추호의 흔들림도 없이 단번에 실행해야 한다. 뭔가 새로운 일을 시작하거나 배워야 할 때, 우리는 많은 변명거리를 댄다. 아직 그 일에 적응하지 못했다고, 배우려면 더 많은 비용과 시간의 투입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런데 가끔은 해결책을 알고도 스스로 두려움부터 내세우는 경우가 있다. 그런 변명은 길을 멀리 돌아가도록, 방향을 잃도록, 단축키를 설정할 기회를 박탈한다. 어떤 일에 도전할 때, 새로운 각오가 필요할 때, 우선순위부터 정하자. 단순하고 반복적인 일은 단축키로 해결하고 어려운 일은 스승의 말처럼 오래 생각하기로 하자. 단, 오래도록 생각한 일은 썩지 않도록 반드시 단번에 실행으로 옮겨야 한다. 반드시 해내고야 말겠다는 투지, 내일이 아니라 오늘 해내야 한다는 자세, 그런 생각은 당신의 마음 가운데에 놓여 있다. 그 생각을 빨리 찾아서 실천하기 위해 지금 당신에겐 단축키가 필요하다. 그런 단축키 하나쯤은 누구나 당장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주간 공심 뉴스레터 구독하기(에세이와 시가 있는)

https://maily.so/gsletter


매거진의 이전글 공심재 무료 일기 쓰기 이벤트 개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