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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대생의 심야서재 May 25. 2021

인간이 되는 건 피곤한 일이다.

내가 원해서 이런 화가, 이런 인간이 된 건 아니다. 그저 이런저런 사정에 휩쓸리다 보니 어느새 스스로를 위한 그림은 그리지 않게 되어버렸다. 결혼하고 생활의 안정을 고려해야 했던 것이 하나의 계기였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사실 그전에 이미 ‘나를 위한 그림’을 그리려는 의욕이 식었던 것 같다. 결혼생활은 핑계였는지도 모른다. 나는 이미 청년이라 할 수 없는 나이였고. 갈수록 무언가가 - 가슴속에서 뜨겁게 타오르던 불길 같은 것이 - 내 안에서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그 열기가 온몸을 덥히던 감촉이 점차 잊혀갔다.

무라카미 하루키 <기사단장 죽이기> 중에서…


지금의 나는 정녕 과거의 내가 되고 싶던 그 모습일까. 나는 어떤 인간이 된 걸까. 아니 인간은 맞을까. 내가 인간이라고 착각하는 건 아닐까. 내가 시스템이 만들어낸 프로그램-194가 아니라는 증거는 어디에 있단 말인가. 내가 이런 이상한 생각을 도출해냈다는 게? 그것이 내가 인간이라는 마지막 증거가 될 수 있단 말인가. 인간이라는 주장도, 그렇다고 인간이 아니라는 주장도 모두 납득되지 못한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이상한 상태, 그것이 현재의 내 실존을 대변한다고 볼 수밖에. 하지만 가설이라고 치부하는 모든 주장은 나로부터 기인한다. 오직 내가 주장하고 내가 논증하는 - 재판관과 범죄자가 동시에 존재하는 - 사실에 정당성을 제공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다만 분명한 것은 지금의 '내가 글을 쓰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건 현재의 내가 인증하고 지켜보는 사실이니 납득시키지 않아도 될 것이며, 이 글을 읽는 사람이 그 사실을 입증해 줄 것이다. 하지만 정말 그러할까? 글을 쓰는 시점도 계속 과거로 달아나는 중인데? 나는 그 사실을 어디에도 기록(인증)하지 못하고 있으며 단지 그 생각을 글이라는 형태로 옮길 뿐인데?


오늘 아침, 나는 흙비를 피하려고 옆으로 계속 달아났고 달려오는 버스의 숫자를 대충 확인하곤 의식 없이 승차했다. 교통 카드를 무의식적으로 기계가 있을 거라고 예측되는 위치에 태그 했으며 빈자리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았다. 그리곤 하루키의 <기사단장 죽이기>를 꺼내들었다. 눈이 좋지 않았다. 글자들의 불규칙적으로 흔들리는 거 같았으나 버스 때문인지 불안한 아침 기운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눈을 오른쪽으로 돌리면 버스는 어느 순간 몇 개의 장면을 순간 건너뛰었다. 몇 십 명의 높고 낮은 사람들, 검은색과 흰색의 체크무늬 우산, 파란 줄무늬 우산, 짙은 파란색의 청바지, 회색 원피스, 온간 표정의 사람들이 흙비 사이로 사나운 물결을 이루다 침몰하곤 했다. 그 장면은 흑백필름처럼 상영됐으나 속도가 너무 빠른 나머지 내 시각엔 작은 잔상으로만 존재할 뿐이었다.


다시 하루키의 책에 집중하려고 머리를 좌측으로 15도쯤 돌렸지만 눈꺼풀은 더 무거워졌고 더 멍해졌으며 피곤하다는 생각만 깊이 인식됐다. 하루키가 고대한 인간, 나는 어떤 유형의 인간이 되었나?라는 질문이 다시 찾아와서 나에게 결론을 요구했다. 이런저런 사정, 그래, 인간에게는 모두 각자의 사정이 존재한다. 그 사정 때문에 현재의 내가 됐고, 미래의 나도 빚어지게 될 것이다. 그것은 비교적 정제된 상태일까. 정제되지 못한 - 더 다듬어져야 하는 - 그저 불순물만 가득한 상태일까.


나를 위한 그림은 무엇일까? 나를 위한, 나?, 나는 현재 나를 위해 글을 쓰는가? 타인을 위해 쓰는가? 나는 적당한 합치를 찾으려고 내 속 이면의 또 다른 나에게 설득당하고 있는 건 아닐까. 어쩌면 모든 게 인식의 부족이거나 망각 때문일까? 나를 위한다는 생각, 그것을 저편으로 밀어두고 원하지도 않는 거짓 타협에 나서는 나는 어떤 그림을 그리고 싶었나?


그림이든 글이든 손에게 책임을 맡겨야 한다는 사실, 그러니 나는 이 손에게 주어진 운명을 앞으로도 꽉 거머쥐라고 말해야 한다. 그 말은 그림 혹은 글로 표현되어야 한다. 생각은 어떤 형태로든 번역되어야 한다. 내가 원하는 인간상을 그리기 위해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기운을 감지하기 위해 나는 매일 써야 한다.



눈을 감았다. 무거웠으므로 들뜨는 의욕을 잠시 재우려고 나는 세상을 향한 응시를 잠시 멈추었다. 나는 무의식의 상태로 진입했으며 버스의 진동이든 생각의 훼방이든 그 모든 곳으로부터 분리됐다. 그리고 몇 십 분의 시간이 훌쩍 지나갔고 나는 번개처럼 눈을 뜨곤 버스에서 뛰어내렸다. 마침내 지상으로 탈출한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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