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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대생의 심야서재 Jun 21. 2021

공심재 문을 닫습니다.

내가 풀타임 직장인으로 돌아간 이유


위기는 언제든 찾아온다. 비교적 안전한 침대 위 이불 속에서도 에그 마요가 추가된 비엘티 샌드위치를 사러 가는 판교의 솜사탕 같은 구름다리 위에서도 새벽 6시 간헐적으로 사람들이 드나드는 지하철 첫 번째 칸에서도 위기는 불쑥 내 일상의 맨살 속으로 파고든다.


몇 달 전, 나는 그때 심각한 위기가 닥쳐왔다고 판단했다. 요즘 두드러지게 달라진 내 특징은 신속한 판단력인데, 그때는 정말 내가 방금 전에 구사한 문장처럼 동물적인 판단력을 구사했다고 믿는다. 바라면 이루어진다고 했나? 딱히 종교는 아니지만 믿으면 무엇이든 종교가 되는 현상을 우리는 목격할 수 있다. 몇 달 전의 나처럼.


아무튼 몇 달 전의 나는 일생일대의 아주 중요한 결정을 내렸다. 문장에서 ‘중요한’, ‘의미심장한’ 이런 형용사와 ‘아주’ 따위의 부사를 걷어내야 한다고 한 목소리를 설파하는 글쓰기 선생으로서 그 자격이 부끄럽게도 ‘중요한’ 게다가 ‘아주’까지 써먹어야 하는 상황에 봉착하고 말았다. 그래 쓸 때는 대놓고 써먹자, 괜히 뒤에 숨어서 안 그런 척하지 말고. 이럴 땐 뻔뻔한 맛도 있어야 한다. 그게 나라는 사람의 매력이 아닌가.


그 결정이란 건 풀타임 직장인으로의 금의환향이었다.(순전히 내 생각) 정말로 비단옷이라도 입고 출세라도 한 사람처럼 떳떳하게 직장인의 한가운데로 걸어갔으면 좋으련만, 사실 나는 덩케르크에 버려진 패잔병과 그리 다를 바 없었다. 내 인생에서 어떤 총체적인 규모의 결단을 빠르게 내려야 할 상황에 처해버리고 말았으니까. 그 결단이란 건 서두에서 언급했듯 풀타임 직장인으로의 복귀였는데, 그 문장에 괄호 친 부분에 숨은 것은 바로 '비즈니스의 포기'라는 문장이기도 했다.


나는 비교적 포기가 속사포처럼 빠른 사람이다. 실행력에 쉽게 불붙는 사람은 꺼뜨리는 것도 아주 쉽게 한다. 나에게 오래 타는 일이란 거의 없다. 한 번 장전하면 바로 쏘아버리고 불발이면 포 자체를 내다 버린다. 왜 그렇게 쉽게 결단을 내리냐고? 바쁘니까, 시간이 없으니까 일단 결정해놓고 흐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진지하게 관찰해야 할 때도 있지만, 아니나 싶으면 빠르게 집어치우는 게 심장에 무리가 덜 가니까. 그게 내가 오랫동안 이 세계에서 살아남은 고유의 생존 방식이니까.


결정에 부싯돌을 당기면 불이 곧 붙는다. 그다음은 걱정하지 않아도 굳이 내부에서 핵융합 반응을 일으키지 않아도 알아서 불길이 번져간다. 내가 당긴 첫 번째 부싯돌은 '개인사업자의 폐업'이었다. 사실 폐업이라고 하여, 굉장히 심각한 사태가 벌어진 거라고 오해할 독자분이 계실 것 같아서 미리 부연 설명을 하자면, 폐업은 그냥 폐업일 뿐이다. 인간 공심 작가가(제가 고양이는 아니지 않습니까? 난데없는 농담을) 문을 닫는 것도 아니고 브런치 작가로 더 이상 글을 쓰지 않겠다고 절필 선언을 한 것도 아니며 그냥 단순하게 폐업은 폐업 그체일 뿐이다.


공장에서 더 이상 연기가 나지 않는 거라고 생각하며, 뭐 그렇다고 내가 딱히 공장처럼 모임을 찍어낸 건 아니었으니까 공장으로 내 모임을 비유한 건 억지 주장이라고 해두고 싶지만... 아무튼 나는 폐업 처리가 홈택스 사이트에서 지겨운 공인인증 로그인 과정에서 겪어야 될 비교적 순탄치 않은 과정, 그러니까 온갖 욕이 다 튀어나오는 짜증 나는 과정보다 훨씬 간편하다고 생각했을 정도였으니까. 사업자의 폐업은 몇 번의 마우스 좌 클릭의 작동으로 끝날 일이었다니, 그 지난하고 고된 일을 마치고 시원한 아이스 맥주를 마시려던 나의 원대한 꿈이 너무나 쉽게 김 빠진 맥주처럼 가라앉고 말았으니, 어찌 그 작업을 신성한 노동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사업자를 정리하자고 결심했으니 그다음에 진압해야 할 것은 마땅히 잔여 불씨였다. 어쩌면 내가 여기저기에 뿌려놓은 꽃가루였을지도 모르겠다. 공심재에는 어느 날 내가 주도한 모임 외에 수많은 모임들이 생겼다. 대부분 내가 직접 기획한 모임들이었지만, 어느 날 그 모임은 내 영향권에서 벗어날 정도로 성장했다. 파트너들을 졸업시키는 게 마땅하다는 기묘한 논리를 앞세워 나는 신속하게 모임에서 탈출을 도모했다. 물론 그 작업은 치밀했고 신속했으며 완벽해 보였다. 그래, 그렇게 보이기만 했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더 이상 모임이 산불처럼 여기저기 번져가는 것을 구경하고 앉아있는 나 자신이 너무 한심하게 보였달까. 그게 변명이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다. 모임이 내 예상과는 전혀 다른 향방으로 번져나갔기 때문에, 그렇다고 그 일이 내 미래의 먹거리를 책임져줄 것도, 내가 주도하는 미래의 그림과 전혀 일치하지 않았기에, 그저 외형을 키우려는 욕망에서 비롯된 일이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에, 나의 확장은 그쯤에서 멈추는 게 맞았다. 공심재 사업자의 몰락과 더불어.


그렇게 공심재 사업자는 내 인생에서 지워졌다. 십수 년 전, 스타트업을 창업하고 몇 년 동안 기세 좋게 성장하는 걸 지켜본 후, 단지 하기 싫어서, 누군가의 배신을 지켜보는 게 싫어서 어쩌면 내 생명과 비슷한 취급을 받은 회사에서 스스로 떠난 것처럼, 그렇게 비교적 달아올랐을 때 떠나는 게, 아니 물러나는 게 멋있다고 생각했던 것처럼 나는 출구전략을 짜고 있었을지도.



신속한 출구 전략과 함께 나는 사업자를 권좌에서 끌어내리고 녀석?(공심재)의 권위를 무너뜨렸다. 그래, 나는 나 자신을 파괴한 것이다. 이게 묘하게 쾌감이 있다. 나 스스로를 망가뜨리는 것에서 쾌락을 느낀다? 왠지 에피쿠로스적인 쾌락과는 거리가 멀 것 같지만, 앓던 이가 빠지는 쾌감?이라고 정의한다면 지나친 과장일지도.


사업자는 제거됐고 나는 자유 신분을 획득하여 회사로 돌아갔다. 음, 회사에서는 비교적 큰 환대를 받았다.(49인치 와이드 모니터와 맥북 M1 에어가 장비로) 이사에서 이사로 돌아갔으나 이전의 이사와는 대우가 다른 어떤 황홀한 느낌. 그 느낌을 어찌 말로 설명할 수 있을까. 단지 오랫동안 놓아버린, 부채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일을 다시 맡게 되어 어떤 감격스러움이 찾아와 풀타임 출근 첫째 날부터 야근을 시작했다면, 일을 사랑하는 나의 미친 마음이 조금이라도 이해가 될까.


욕망을 버리라는 것, 그러니까 돈을 좇지 말라는 것, 그런 말은 욕망을 추구하는 대상에서 한 발짝 뒤로 물러서거나 욕망을 내려놓거나 유보하는 뜻으로 해석되겠다. 물론 나는 욕망을 완벽하게 버리지 못한다. 마치 미니멀리즘 주의자라거나 금욕주의자라도 된 듯이 세상의 모든 물질적인 유혹을 거부하겠다는 말로 나를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여전히 돈의 맛이 좋고 쇼핑몰에서 무언가를 주문하는 게 즐거운 사람이니까.


나는 앞으로도 욕망을 완벽하게 절제하지 못할 것이며 금욕적인 생활을 펼쳐나갈 자신도 없으며 누군가에게 무한정 베푸는 삶을 살 생각도 없으며 언제나 무료로 내 가치를 제공할 사람으로 살 생각도 없다. 나는 오직 나라는 인간을 포장한 어쩌면 아직 미완성인 세계를 완성하고 있을 뿐이니까. 그러니 어떤 결정이든 되돌릴 수는 없어도 그 결정을 내려놓을 권리는 있는 것이다. 하루아침에 사업자를 화로에서 불태워버린 것처럼. 나 자신을 처단해버린 결정을 하는 것도 나니까.


그렇게 욕망을 내려놓자 이상한 사건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잡지에서 원고를 보내달라는 청탁이 날아오고, 새로운 강의 요청이 메일로 쉐도하고, 강사 에이전시에서 협업 제안이 긴급하게 타전되고, 브랜딩 포유(장이지 대표의 하이업 에듀)에서는 전속 강사로 활약할 예정이고, 소수의 브런치 작가들만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고, 게다가 뷰티 업체에서 협업 제안까지 왔다. 내가 감성적인 글을 쓰는 사람이니 화장품 후기도 그렇게 쓰는 게 가능하지 않겠냐라는 짐작으로. 에라이.


이상한 일이 연이어 일어난다. 직장에서는 새로운 프로젝트가 계속 생겨서 오랜만에 면학? 분위기가 조성되는 마당에 외부의 솔깃한 제안이라니. 내가 이 모든 일들을 과연 완벽하게 처리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내 능력의 내부와 외부를 어떻게 규정해야 할지, 그 부분을 제대로 가늠해본 적이 없어서 혼란스럽기만 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있다. 설령 외부에서 귀가 솔깃할 만한 제안, 그 제안이 내 미래에 찾아와 성공을 포착하게 해줄지도 모르지만, 어디까지나 그것은 가설뿐이라는 얘기다. 나는 한 발을 안전하게 직장이라는 정원에 안착시켜놓고 나머지 발은 요리조리 휘둘러볼 것 같다. 양다리라고 당신이 욕한다고 해도 할 수 없다. 인생을 오랫동안 살아오면서 내가 얻은 인생의 진리니까. 욕망에서 멀어지려면 별다른 방법이 없다. 욕망을 욕망하지 않는 삶, 다만 그 욕망을 수치스럽게 여기지 않는다면 욕망이 나를 조금 안쓰럽게 봐줄지도.


그런데 정말 큰 위기가 아닌가. 사업을 재개하는 일은 절대 없어야 할 텐데 말이다. 정말로 큰 위기가 닥치고 말았다. 난 위기에 결코 패배한 적이 없다. 언제나 위기는 극복할 대상이었으니까. 그 선택은 전적으로 나에게 유리하면 그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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