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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대생의 심야서재 Jul 12. 2021

무엇이든 배울 수 있는 6개월 무료 쿠폰이 생긴다면?

신나는 글쓰기 5기 미션 첫 번째 - 단편 소설

  나는 지금 지독한 무력증에 빠져 있다. 무력증에 빠진 지 대충 새어 보니 벌써 1년을 훌쩍 넘겼다. 사실 그 시간적인 구간은 특별한 의미가 없다. 1년 전과 오늘, 특별히 달라진 건 게 없으니까. 나는 침대 위 가로 1미터, 세로 2미터쯤 되는 공간에서 숙식 중이다. 그러니까 나는 지금 무언가에 강하게 흡착되어 있다. 어쩌면 바닥에 커다란 자력이 나를 끌어당길지도 모른다. 침대 밑바닥에 알 수 없지만 어떤 장치가 매달려 있을 가능성도 있다. 나는 거머리일지도 모른다. 어떠한 가설이든 나의 무력증을 설명하지 못한다. 물론 그 이유를 굳이 설명하고 싶지도 않다. 단지 내가 이유 없이 붙들려 있다는 게 더 중요할 테니까.


  나는 딱히 이곳에서 빠져나갈 생각이 없다. 그럭저럭 생활이 가능하니까. 물론 침대 위에서 전혀 움직이지 않는 건 아니다. 화장실에는 하루 한 두 번은 간다. 기어서 가든 걸어가든 그건 그때그때 컨디션에 따라 다르다. 내 몸과 마음의 형편에 따라, 그날이 전하는 조짐에 따라, 어쩌면 날씨에 영향을 받을지도.


  그렇게 매일 무력증에 빠진 채로 살아오다, 익명으로부터 메시지 한 통을 받았다. 아무 날이었다. 어제, 어쩌면 그제와 같은 날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하루와 또 하나의 하루를 구획하는 일이 크게 의미 없는 그런 따분한 날 중의 하나였다. 메시지의 내용은 이런 것이었다. 무엇이든 원한다면 무료로 배울 수 있는 쿠폰을 지급한다는. 무료라 그리고 6개월이라 어떤 과정이든 상관없다. 왜? 나에게 이런 기회를? 뭐 극빈자를 위한 혹은 나처럼 삶의 방향키를 잃은 사람에게 지급하는 정부의 혜택이려나? 복권은 아니지만 복권에 당첨된 것 같은 기분이다. 참 이상한 것이 묘하게 사람의 구미를 당기게 하는 게 그곳엔 있었다. 이제 침대에서 벗어날 때가 된 건가, 라는 생각까지.


  침대 위에서 이불을 칭칭 감고 몇 번을 구르고 굴러봤다. 공짜? 6개월, 수강 쿠폰 이런 단어가 어떤 장면을 계속 생산해내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곳에 속해 있게 될 나의 모습을 그려봤다. 무언가에 열중하는, 새로운 일에 호기심을 갖고 뛰어드는, 내가 전혀 보지 못했던 새로운 내가 그곳에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기는 쉽지 않아 보였다. 나는 이 침대 위가 너무 편하고 먹고사는데 큰 지장이 없는 형편이고, 무엇보다 그곳에 뛰어든다는 게 공포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니까.


  한편으로는 이런 제안이 과연 다시 올 수 있을까, 라는 생각. 하지만 이런 익명의 제보자에게 도착한 메시지를 쉽게 신뢰한다는 거 자체가 우습기도 했다. 나처럼 의심이 많고 예민한 사람이 단 한 통의 메시지로 넘어갈 수 있다니 믿기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단 한 가지 가능성이 있더라도 이제는 그것을 부정하고 싶지 않았다. 때로는 무한적인 신뢰가 요긴한 역할을 할 때가 있지 않은가.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유용할 때도 있지 않은가.


  나는 정보의 출처를 일단 확인하기로 했다. 익명의 누군가가 보내준 사이트로 접속했다. 사이트에 회원가입을 마치고 쿠폰 번호를 입력해봤다. 음, 그의 이야기는 거짓이 아니었다. 확실히 그 쿠폰이 어떤 강력한 효력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 사이트는 오랫동안 무력증에 시달리고 있는 나와 같은 부류들에게 희망을 전해주고 싶었던 것이다. 


  신청이 가능한 목록을 조회했다. 파이썬 전문가 과정, 구글 스크립트 벽돌 깨기, 쇼팽 부럽지 않은 피아노 연주가 되기, 십만 원을 천만 원으로 부풀리기, 소설가로 새 삶을 시작하기 등등 여러 과정이 존재했다. 내 관심을 끈 것은 ‘소설가로 새 삶을 시작하기’였다. 물론 통장 잔고 십만 원에 더 눈길이 간 건 사실이지만. 새 삶이라는 단어가 유독 눈에 띄었다.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새로운 삶이 아닌가. 충동적이더라도 무언가를 시작한다는 게 나에겐 필요했다. 그렇다! 나에겐 출발, 어떤 전환점을 맞는 것, 그래서 그동안의 모든 회피와, 불안정함과, 억제해왔던 삶의 동경을 이제야 제대로 직면해야 될 시기가 도래했다고 믿은 것이었다. 


  소설가가 되는 일이란 과연 무엇일까. 삶에 어떤 영향들을 미치게 될까. 나는 물론 글을 써본 적이 거의 없다. 그쪽에 딱히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책도 거의 읽지 않는 편이다. 내가 소설가와 연결되는 지점은 단 하나도 없다. 하지만 그 공허함이 나를 끌어당겼다. 묘하게 생겨먹은 그 추상적인 것들이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줄 것 같았다. 


  나는 ‘소설가로 새 삶을 시작하기’ 과정을 클릭했다. 6개월 동안 등단한 소설가와 함께 소설을 쓰게 된다. 물론 그것에는 공부가 다소 필요할 것이다. 무력증에 빠진 내가 배움에 뛰어들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섰다. 하지만 어쩌면 그것은 이 비좁은 침대 위에서 기능할 수도 있다. 바깥에 굳이 나가지 않아도 된다. 이곳에서 머물러도 충분히 가능한 세계다, 소설을 쓰는 일이란. 


  커리큘럼을 천천히 검토하고 소설을 쓰는 일이 비록 무위한 일일지라도 그 행위가 내 삶에 엔진 역할을 해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하며, 나는 과정을 신청했다. 흔들림은 없었다. 그냥 그렇게 되도록 나는 과거로부터 이곳까지 당도한 것이다. 그건 어쩌면 예비된 일이 아닐까. 나는 정해진 운명대로 향할 뿐이다.


  결정을 하고 보니 갑자기 에너지가 생기는 기분이 들었다. 침대 바깥으로 잠시 나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두려웠지만 침대 바깥으로 한 발을 내밀었다. 다행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세상의 균형이 무너지는 일도 침대가 한쪽으로 기울어지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용기를 얻고 나머지 발도 내밀어 보았다. 역시 세계는 멀쩡했다. 아직, 아무런 사건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계속해서 멀쩡했고 에너지가 안으로 수축되는 일도 없었다. 세상은 계속 앞쪽으로 팽창 중이었다. 그동안 나만 과거로 수축 중이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앞으로 걸어갈 필요가 있었다. 물론 그것에는 적잖은 용기와 충만한 도전 의식이 필요했다. 단순히 의지만으로 되는 일도 아니었다. 어떤 계기가 필요했다. 그것이 무료 수강 쿠폰이건, 누군가의 제안이건 나에겐 작은 기폭제가 필요했던 것이다. 


  나는 이제 상반신을 일으키려 한다. 침대에서 떨어지기 위해 작은 움직임을 시작한 것이다. 나는 침대에서 엉덩이를 떼고 허리를 일으켜 세운다. 그리고 걸어가려고 애쓴다. 하지만 반응은 느리다. 관성적으로 뒤로 이끌리려고 한다. 나도 모르게 뒤로 넘어질 것만 같다. 그래도 다시 기력을 보충한다. 나는 이 침대 밖에서도 안전할 것이다 라고 주문을 외운다. 물론 그 주문은 전에는 들어본 적이 없다. 나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다. 순전히 내 의지만으로 생산된 순수한 나의 결정체인 것이다. 


  나는 그렇게 여러 번의 도약을 거듭하며 내 집에서 벗어난다. 현관문을 열고 어디론가 나선다. 방향이 정해져 있지는 않다. 아마도 가까운 곳이 될 것 같다. 그래 순간적으로 떠오른 곳은 편의점이다. 무엇이든 파는 곳, 필요한 물건이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그 물건을 파는 곳이 편의점이다. 그리고 그곳에 가보기로 한다. 한 걸음씩 천천히 보폭을 옮겨 본다. 누군가 옆에서 내 느릿한 동작을 지켜보는 느낌이 든다. 나는 그런 시각을 뒤로한 채 걷는다. 무의미한 시선을 무시하고 다만 걷는다. 어느새 횡단보도 앞에 나는 서 있다. 어느새 걷다 보니 이곳에 도착한 것이다. 


  나는 신호를 기다리며 건너편의 편의점으로 시선을 보낸다. 햇살이 따뜻하다. 모든 것이 평화롭게 흘러간다. 옆에 서 있는 6살쯤은 됐을까. 엄마 손을 붙잡고 서 있는 아이에게 윙크를 던진다. 신호는 곧 붉은색에서 초록색으로 바뀐다. 나는 자랑스럽게 앞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허벅지가 탄력 있게 반응한다. 힘차게 용기를 모아 희망을 충전하여 순조롭게 앞으로 나아간다. 그런데 별안간 좌측에서 트럭이 한 대 나타났다. 그것은 멈추지 않을 태세였다. 나 역시 멈출 수 없었다. 두 세계는 힘의 균형을 찾지 못할 태세였다. 나도 멈출 수 없고 트럭도 멈추지 못했다. 물론 나는 그 힘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다만, 나는 건너편으로 향해야 하니까, 그게 내 운명이라면 왼쪽에서 달려오는 트럭과 충돌하는 것도 내 몫이다. 나는 그 힘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낙엽처럼 공중에 떴다가 그러니까 잠시 날았다가 바닥으로 추락할 것이다. 분명하다.


  나는 예정대로 걸었고 역시 그 육중한 세계와 충돌했다. 그건 역사적으로도 의미가 있다. 적어도 나 개인에게는 말이다. 내가 침대 위를 박차고 일어났다는 것, 그것이 작은 회오리바람을 일으켜서 지금 이 순간까지 이끌었고 그 결과가 어떤 참혹한 일을 일으켰다고 할지라도 그 일은 내가 선택했으니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다. 내 생각은 여기까지다. 나는 그 이후에 어떤 생각도 하지 못한다. 내 인생이 과거에서 현재까지 흘러와서 어느 순간 막을 내린다는 것, 조용하게 무대가 가려졌으면 좋았겠지만 그렇게 되지는 않는다. 나는 꽤 오랫동안 하늘을 날아간 것 같다. 그곳에서 꽤 자유롭게 유영했다. 이후의 순간은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나는 눈을 감는다. 그렇게 세계는 막을 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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