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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대생의 심야서재 May 18. 2016

소설가로서의 꿈을 꾸다.

하루키의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를 읽고

나의 정체성 찾기


글 쓰기에 관심이 이입된 이후로, 어떤 글을 써야 할지 명확한 정체성을 갖추지 못한 채, 나는 혼란스러운 나날을 보내고 다. 글을 쓰면 쓸수록 이야기의 중심이 나를 중심으로 쏠린다.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부터, 관점들은 주로 나를 향하고 있었고, 내가 경험한 것들, 나로부터 출발한 이야기들이 주요 주제가 되고 다. 나와 비슷한 환경, 세대, 직업에 공감할 수 있는 처지에 놓인 사람들이라면 협소하나마, 어느 정도 그분들과 공감을 나눌 수 있지 않을까 기대감이 크다고 할까?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나의 의식을 지배하는 것은 사실 단 하나였다. 나의 범위를 넘어서 우리, 그리고 세대를 극복할 수 있는 내가 아닌 사람의 이야기, 이 세상에 실존하지 않은 가상의 이야기를 글로 꾸며야 한다는 욕망이 심층 가운데에서 솟아났다.



시원한 정답은 구할 수 없어도, '그것에 가장 가까운 근사치의 답은 구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믿음을 서점에서 찾았다. 시각이 한쪽으로 쏠리는 와중에, 내 눈길을 환하게 사로잡는 소름돋는 책이 한 권 있었다. 눈에 잘 뜨이는 곳에 있다고 해서 반사적으로 그런 책을 선택하도록 손을 내미는 것은 아닐 것이다. 책 스스로 자신을 슬며시 내어주는 것도 아닐 것이다. 사람을 향한 첫인상의 느낌과 마찬가지로 본능적인 이끌림에 따라 선택을 당할 수밖에 없는 그런 운명의 책이 있다. 그 책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였다.





소설가


이 책은 최근 하루키가 자신의 소설가로서의 인생을 정리하며, 소설을 쓰게 된 사소한 계기, 왜 소설을 쓸 수밖에 없었는지, 그리고 소설을 쓰면서 어떤 희로애락을 얻고 사는지 지금까지 살았던 자신의 삶을 구체적으로 돌아보며 쓴 진솔한 에세이다. 나는 성공한 소설가의 삶이 궁금했다.  글 쓰기 관련 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지만, 소설가라는 흔하지 않은 명함을 가진, 단 한 사람의 따끈한 이야기가 듣고 싶었다. 나는 하루키의 작품을 단 한편도 읽어 본 적이 지만, 그가 전 세계적으로 얼마나 많은 독자들을 보유하고 있으며, 얼마나 열정적인 사랑을 받고 있는지 익히 알 다. 그가 어떻게 글을 쓰고 있는지, 소설가의 삶은 어떤 모습일지 궁금했다.



글을 써야 한다고, 퇴근 후 찾아오는 휴식 시간조차도 무심히 지나칠 수 없다고, 시간의 흐름조차 망각하고 싶었을 때, 그렇다면 나는 어떤 글을 써야 할 것인가? 그것이 요즘의 주요 화두였다. 나는 어떻게든 소설을 써야 할 것만 같았다. 소설을 써야 한다면 어떤 이야기들을 풀어 나가야 할 것인가. 내가 직접 경험한 이야기들, 내 시야로 각인되는 기억들, 내 청각을 휘어잡는 다른 사람의 수근거림들, 수없이 많은 생각에 사로잡힌 채, 시간이 흘러가는 것을 하릴없이 지켜보고 있노라니 답답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소설을 쓰기에 아직은 내가 부족하구나. 아직은 때가 안되었다며, 조금 더 경험이 필요할 것 같다. 더 큰 내공을 쌓아야겠다.'며 변명하는 부끄로운 내가 보였다. 마침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얘기했던 짧은 일침을 떠올렸다.




그러니까 허구한 날 전기, 자서전, 자전적 소설, 소설적 자전 따위나 쓰는 거지. 하나의 세계를 창조할 수 없는 작가들은 결국 자기들의 세계를 묘사할 수밖에 없지....

내가 보기엔 말이야.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가 오늘날에 처음으로 출판되었다면 베스트셀러 목록에 들어가지도 못했을 거야. 그 책은 아마도 환상 문학이나 공포 문학 속에 들어갔겠지. 외눈 거인 키콜 로페스, 뱃사람을 홀리는 세이렌, 그 밖에 많은 괴물들이 나오는 이야기니까 아마 우리 같은 애들이나 읽어 주겠지"



나의 상상력 부재를 탓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음속으로 소설을 써야 한다면서도, 상상력의 빈곤, 이야기 거리의 풍성하지 못함, 이야기를 다채롭게 전개할 수 없다는 한계를 핑계로 내밀며, 나의 보이지 않은 약점들을 늘어놓고 있을 때, 베르베르의 충고를 들었고 하루키의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를 동시에 접하게 되었다. 두 사람과의 우연한 만남을 통해서 내가 꿈꾸는 소설가의 삶을 간접적이나마 체험하고, 갇혀있는 나만의 세계에서 벗어나야겠다는 결심을 하게됐다.



누구나 소설 따위는 쓸 수 있다.


하루키는 소설가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단정적인 의견을 제시한다.


'내가 하는 일, 내가 쓰는 글이 가장 올바르다. 특별한 예외를 제외하고 다른 작가들은 많든 적든 모두 틀려먹었다' - P.10


소설가는 외골수다. 작가들은 자신들의 생각이 전적으로 옮다고 생각하며, 다른 작가를 인정하지 않는다. 자신을 제외한 나머지를 일종의 적군으로 간주한다. 하루키는 자신의 위치에서 최대한 자존심을 지키려 하지만, 작가의 영역으로 진입하려는 새로운 행위를 자신의 밥그릇을 침범하는 것으로 보지 않는다. 그는 마음먹으면 누구나 소설 따위는 쓸 수 있다고 한다. 다만 중요한 것은, 오래도록 끈질기게 그 세계에서 버티는 것이라고 한다. 누구나 소설가가 되겠다고 이 바닥에 쉽게 뛰어들지만, 자신처럼 꾸준하게 작품 활동을 하는 사람이 드믈다고 말한다.




소설가는 다른 전문 영역의 사람이 로프를 넘어 소설가로 등단하는 것에 대해 기본적으로 포용적이고 대범한 게 아닐까요? 자 올 테면 얼마든지 오시죠 - P.17


그는 자신 있게 외친다. 누구나 이 세계에 들어올 수 있도록 관문은 언제나 열려있다고, 누군가 소설을 쓴다고 해서 기존의 좁은 출판 시장에서 기성 작가의 입지가 줄어드는 것도 아니라며 강조한다. 다만 소설을 쓴다는 것은 문장을 주물럭거리는 일이기 때문에 자신의 내면과 충돌하여 이겨낼 자신이 없는 나약한 사람이라면, 소설가로서의 자질이 없다고 딱 잘라 이야기한다. '도저히 나는 소설을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다'라거나 '넘치는 상상력을 수용할 수 있는 뇌 공간이 모자란다'라거나 '주체 없을 만큼 용솟음치는 상상력을 글로 풀어내야겠다'는 의식 없이는 유지할 수 없는 것이 소설가의 이라고 한다.



다양한 경험


하루키는 음악을 사랑한다. 그에게 소설이란 클래식, 재즈 같은 음악을 커피의 은은한 향기처럼 집안을 그득하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 음악은 이야기의 원천적인 재료였다. 그는 소설을 쓰기 전, 자그마한 카페를 했었고, 그것 나름 성공적이었다. 그는 젊어서 분명히 고생을 했고, 견디기 힘든 고생을 했다. 하지만 늘 그는 긍정적이었고, 자신이 하고 싶은 선택을 하며 살았다. 곤경에 처했으나, 삶에서 늘 희망을 보았고, 꿈을 잃지 않았다.


만일 지금 당신이 뭔가 곤경에 처했고 그걸로 상당히 힘겨운 마음이 든다면 나로서는 "지금은 좀 힘들겠지만 나중에는 그게 결실을 맺는 일이 될 겁니다"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 P.39


장사를 하며 바쁜 하루 속에서도 글 쓰기를 놓지 않았던 어느 날, 야구를 보다가 갑자기 소설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하늘에서 툭 떨어졌다. 그에게 소설은 미래에 대한 새로운 자극이었고, 자신의 힘으로 새로운 돌파구를 찾을 수 는 희망이었다. 거짓말처럼, 갑자기 그에게 소설이 찾아왔으며, 그는 소설가로서의 삶을 살기로 결심한다.



어느 날 돌연 뭔가가 눈앞에 쓱 나타나고 그것에 의해 모든 일의 양상이 확 바뀐다. - P.46



소설가로서의 삶


그는 자유분방했다. 자유로운 사고를 강조했고, 특히 클래식 음악과 재즈를 통해서 고전의 중요성을 이야기한다. 고전이 우리에게 바래지 않은 아름다움을 오랫동안 뽐낼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원래 지니고 있는 '오티'라고 한다. 오리지낼리티는 내가 갖고 싶다고 쉽게 얻어지는 속성이 아니다. 시간이 오래 지나서 후대의 사람들에게 인정되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가치를 인정받는 클래식 음악, 그림 등 당시에는 인정을 받지 못했지만 후대에 재평가받는 그런 작품을 말한다. 작가라고 한다면 자신만의 독자적인 오리지낼리티가 있어야 한다. 자신이 내놓는 작품이 한 철 사랑받는 일시적인 작품으로 머물러 있지 않아야 한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글을 써야 할까? 그리고 소설을 쓴다면 1인칭의 관점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야 할 것인가? 고민이 찾아왔다. 나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구성한다면, 아마도 내가 겪은 경험들, 베르베르가 경고했던 자전적인 이야기가 바탕이 될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앞섰다. 이야기는 다시 과거로 돌아가고 말았다. 역시 나의 상상력의 한계란 것인가... 하루키는 이야기할 소재가 빈곤하다면, 우선 책을 읽으라고 말한다.




소설가가 되려고 마음먹은 사람에게 우선 중요한 것은 책을 많이 읽는 것입니다. - P.118


그리고 닥치는 대로 이것저것 읽으라고 말한다. 사물을 볼 때마다, 즉 내가 출근하는 길, 비즈니스를 하며 사람과 만나는 일, 여행하면서 경험하는 일 등 자신의 주변에서 접하는 사물들을 자세히 관찰하고 그것의 속성을 내면화시키는 작업에 몰두하라고 한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사소한 습성마저 내가 쓰는 소설 속, 가상 인물들의 성격으로 묘사될 수 있으며, 이야기를 풀어나갈 수 있는 좋은 재료가 된다고 한다. 즉 자신의 주변을 세밀하게 펴야하며, 다양한 경험이 부족하다면 책을 읽으라는 것이다.


자기 주위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일이나 매일매일 눈에 들어오는 광경, 일상생활 속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소재로서 자신 안에 받아들이고 상상력을 구사하여 그런 소재를 바탕으로 자기 자신의 스토리를 꾸며나가면 됩니다. - P.136


나는 그런 네거티브한 일을 맞닥뜨릴 때마다 거기에 관여한 사람들의 겉모습이나 언행을 세밀히 관찰하는 데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 P.239



소설을 쓰는 방법


그는 외국에 나가서 종종 글을 썼다. 낯선 환경에 머무는 것이 그의 새로운 글감에 좋은 바탕이 됐다. 마음 가는 대로 자신의 의식이 주문하는 대로 흐름에 모든 걸 맡겼다. 자신을 이끄는 내면에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았다. 어떤 얽매임에 사로 잡혀서 자신의 한계를 긋는 행동은 그에게 자유인으로서 용서되지 않은 부분이었다.


소설가란 예술가이기 이전에 자유인이어야 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내가 좋아하는 때에 나 좋을 대로 하는 것, 그것이 나에게는 자유인의 정의입니다. - P.150


재미있는 것은 그가 쓴 글의 평가를 위해서 종종 아내의 조언을 들었다는 것이다. 나도 가끔 내가 쓴 글의 객관적인 평가를 위해서 아내에게 의견을 묻는다. 그도 아내에게 원고를 읽어달라고 했고, 글에 대한 의견을 부탁했다. 하지만 그도 인간이기에 아내의 비판적인 말을 듣고, 거침없이 화를 냈으며, 감정적인 상태가 됐다. 나도 아내의 의견을 물으면서, 공격적으로 방어를 한 적이 있다. 자존심이 상했지만, 아내의 의견을 존중하여 어색한 문장은 고쳐 썼다. 하루키와 같은 세계적인 작가도 나와 같이 유사한 절차를 밟는다고 하니, 신기하고 재밌었다. 그리고 하루키는 아내의 의견에 따라 문장을 고쳐 쓰고, 잘 썼다고 판단해도 여러 번의 퇴고의 과정을 거친다고 한다.





본인이 아무리 '잘 썼다' '완벽하다'라고 생각해도 거기에는 좀 더 좋아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퇴고 단계에서는 자존심이나 자부심 따위는 최대한 내던져버리고 달아오른 머리를 적정하게 식히려고 노력합니다. - P.160



나의 주관적인 느낌


소설가는 내적인 충동에 따라 소설을 쓴다고 한다. 나는 내면이 꾸미는 형상들을 현실화시키기 위하여 온종일 고뇌하고 있다. 생뚱맞게 늦은 나이에 찾아온 새삼스런 작가의 타이틀이 나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올 것인지 진지한 질문을 던진다. 엄밀하게 따진다면 남들에게 비치는 객관적인 나의 모습은 이미 성공한 형상 일지도 모른다. 남부럽지 않은 지위, 행복한 가정, 어쩌면 풍족할지도 모를 연봉 등 이미 나에겐 채워진 것들이 한아름이다. 하지만 여전히 나를 배고프게 하고, 한없이 나를 작게 만드는 것은 글쓰기, 그리고 작가의 삶이었다. 이것은 하루키가 즐겨하는 '마라톤'같은 긴긴 자신과의 싸움이다. 늦은 나이에 시작했지만, 작가로서의 삶은 앞으로 나의 내면이 소멸되기 전까지 지속적으로 승부해야 할 외로운 싸움이다.



나는 어느 때보다 나의 내면과 깊은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다. 내면이 전달하는 의미를 이해할 수 있도록 나의 견문을 넓혀야 하는 숙제를 안고 있다. 하루키는 내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소설가의 기본은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말을 바꾸면 의식의 하부에 스스로 내려간다는 것입니다. 마음속 어두운 밑바닥으로 하강한다는 것입니다. 큼직한 이야기를 하려고 할수록 작가는 좀 더 깊은 곳까지 내려가야 합니다. - P.188


의식의 하부 세계로 내려가는 것은 쉽지 않다. 세상은 매일 시끄러운 이야기로 들 끊는다. 조용한 공간에서 잠시 책 한 권 읽기도 쉽지 않은 세상이다. 대한민국에서 생존해야 하는 문제는 순수한 작가의 삶을 방해한다. 글을 쓰고 작가를 한다는 것은 생존의 문제다. 내가 현재 글을 쓰고 있으며, '작가가 되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은 가까운 몇 명의 가족만이 알고 있는 사실이다. 아마도 회사에서 이 사실을 안다면 나에게 불이익이 찾아올지도 모르겠다. 내가 무책임한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서 글 쓰는 것에 나의 모든 것을 바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글 쓰는 것과 나의 직장은 서로 공존하고 있다. 어느 것 하나 함부로 치부할 수 없고, 이왕이면 양쪽에서 인정받고 싶다면 큰 욕심일까? 나는 전부를 해내고 싶다. 하루키가 언급한, 자유로운 글 쓰기, 지속적으로 이어나갈 수 있는 작가를 꿈 꿔본다. 꿈은  어느 때보다 가까이 다가와 있다.





나는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중년의 남자다. 하지만 작가 지망생이기도 하며, 동시에 무명작가이기도 하다. 하지만 분명 나에게도 감사한 팬들이 계시다. 먼 미국과 독일에서도 응원을 주시는 분들이 계시다. 또한 국내의 목포에서도 응원을 해 주시는 한 선생님도 계시다. 글 쓸 때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내키는 대로 쓰던 시절이 있었다. 요즘은 한 글자, 한 문장을 이어나가는 것에 더 공을 들여야 한다. 글은 나를 위해서 쓰는 것이지만, 그것으로 인하여 다른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의미도 포함된다. 하루키는 자신을 평범한 남자라고 설명한다. 나도 평범한 남자, 그리고 그가 말하는 보통 사람이고 싶다면, 욕심일까?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는 나에게 큰 울림과 자극을 주었다. 앞으로 삶을 살아갈 때, 어떤 자세로 살아갈 것인가, 나도 하늘에서 쿵 뭔가가 떨어지는 충격이 다가와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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