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병철 교수의 <투명사회>를 읽고...
이번 달 '북살림' 선정 도서는 한병철 교수의 <투명사회>였다. 간단한 책의 소개를 받고 궁금증을 견디다 못해, 선정 당일날 바로 서점을 찾았다. 서가에 반듯하게 진열되어있는 <투명사회>의 겉에서 풍기는 두께와 가벼움은 나의 내면을 깃털처럼 가볍게 했고, 이번 달은 잠시 쉬면서 여유 있게 리뷰를 쓸 수 있을 것이라는 즐거운 상상으로 흠뻑 기대감을 채우게 했다.
책의 첫 장을 넘기고 두 장을 넘기면서, 순간 나의 섣부른 예감은 무너지고 말았다. 첫 장을 넘기는데, 첫 번째 문장이 전달하는 개념조차 이해하기 버거웠다. 제대로 된 임자를 만났음을, 어쩌면 15일이라는 넉넉한 리뷰 시한을 초과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엄습하기 시작했다. 손은 바르르 떨리기 시작했고, 눈 앞의 시야는 희미해졌고, 두 다리는 후들거리기 시작했다. 책을 움켜쥔 손에 더 강한 힘이 전달되기 시작할 무렵, 앉을 수 있는 모퉁이 자리 하나를 찾고는 처음부터 차근차근 다시 읽어보기로 했다. 과거 나에게 좌절을 안겨주었던 마르크스의 <자본론>, 칼 세이건 교수의 <악령이 출몰하는 세상>과 같은 무거운 책들의 환영(幻影)들이, 쉴 새 없이 머릿속을 헤집고 다녔다. 나는 그 순간, 마치 뇌 고문을 당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에게 그나마 위안을 안긴 것은, 번잡하고 분주한 오후의 서점이라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물밀듯이 지식에 굶주린 사람들처럼 여기저기 몰려들었고, 구름처럼 모여드는 사람들 틈바구니와 소음 속에서 조용히 집중해가며 책을 읽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했다. 북적거리던 그 공간을 뜨기로 했다. 결제 하고 집으로 돌아가 조용한 책상 앞에 앉아 다시 집중해보기로 했다. 그러나 100페이지라는 짧은 용량조차 나에게 위안을 주지 못했다.
저자 한병철은 고려대학교에서 금속공학을 전공하고 독일로 유학을 떠나 하이데거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땄다. 대학교 졸업과 함께 독일로 떠난 이후, 약 30년간 국내에는 돌아오지 않았다. 2000년에는 스위스 바젤 대학교에서 교수자격을 취득했다. 그의 중점적 연구분야는 18세가-20세기 철학, 윤리학, 사회철학, 문화철학 등이라고 한다. 그의 대표적인 저서로는 국내에서 소개되어 큰 반향을 일으킨 바 있는 <피로사회>와 <심리정치>, <에로스의 종말>등이 있다.
그의 저서는 대부분 독일어로 되어있었다. 독일에서 큰 반향을 일으킨 그의 서적들은 한국어로 다시 번역되어 출간되었다. 한국어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오역이 있지 않았을까? 오해를 하기도 했다. 읽다 보니 철학서적이란 원래 자국어로 쓰인다고 하여도 이해하기 힘든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철학에 철저히 문외한이었던 나의 얕은 지식이, 어려운 해석에 대한 원인임을 알게 되었다.
투명사회는 비밀이 없는 사회다. 개인의 삶, 개인의 일거수일투족이 타자에게 공유되는 사회다. 타자의 삶을 엿볼 수 있다는 것의 의미는, 그만큼 올바르고 도덕적인 삶을 살고 있다고 남들에게 증명해야 하는 부담감을 각자에게 안긴다. 투명의 반대는 불투명이다. 불투명하다는 것은 비밀스러우며 사적인 공간이 나에게 존재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투명하다는 것은 나를 보호할 수 있는 든든한 껍질과 같은 외부의 장치가 없음을 뜻한다. 투명사회란 이런 것이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기본적인 보호막 조차 없는, 벌거숭이처럼 발가벗겨진, 감추고 싶은 부끄러운 과거, 상처마저 드러난 삭막한 사회를 말한다.
그렇다면 한국은 투명사회라 할 수 있을까? 투명한 것은 원래 긍정적인 것을 의미한다. 한병철 교수가 강조하는 집단이 추구하는 투명의 가치 속에서 사회 구성원들은 각자를 불신하고, 감시, 통제하고 있다. 이것은 투명의 역설적인 문제점으로서, 신뢰할 수 없는 현대 신자유주의의 기능적인 한계를 뜻하기도 한다.
투명한 사회 - 정치, 경제 - 는 그 집단에 서식하고 있는 구성원 들에게 무한한 신뢰를 요구한다. 서로를 신뢰하려면 상호 감시할 수 있는 통제시스템이 필요하다. 정보가 투명하게 공개되면, 시스템을 구성하고 있는 구성원들은 조급해진다. 모든 구성원들은 서로 비슷한 외형으로 투명한 틀에 갇힌 채, 획일적인 형태로 진화한다. 모범적인 답안을 제출하도록 서로 강요한다.
사람들은 시스템에 규제당하고 억압당하며, 점차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사람들은 변화를 두려워하게 된다. 투명성이 요구하는 틀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자신의 민낯이 남들에게 공개되는 것에 반기를 들지 않는다. 그저 시스템에 순응한 채 살아간다. 투명은 결국 폭력적인 것이어서 사람들이 가진 모든 걸 외부로 공개하도록 이끈다. 그것은 정보라는 형태로 왜곡된다. 사람들은 그것이 빅데이터라는 용어로 둔갑한 채, 자신의 프라이버시 영역마저 정보의 바다라는 곳에서 자유롭게 둥둥 떠다니며 활용되는지 짐작조차 못한다.
투명성은 속이 들여다보이는 유리 인간을 만들어낸다. - P.7
자유로 포장한 사람 간의 커뮤니케이션은 개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강압적인 형태를 띤다. 디지털 사회의 구성원들은 자신의 개인 정보를 SNS라는 네트워크로 한정하고 그곳에서 개인의 영역을 투명하게 드러내고, 자랑하는 것을 서슴지 않는다. 소셜 네트워라고 불리는 틀 안에 사로잡힌 채, 제한적인 자유를 누리며 살아간다. 우리는 페이스북과 같은 공간에서 내 정보가 어떻게 흘러 다른 사람들에게 비치는 줄도 모른 채, 벌거벗은 유리 인간으로 산다.
투명성이 지배하는 사회는 정보의 공개를 특정 분야에 한정하지 않은 모든 시스템에 폭넓게 적용한다. 서로 투명하게 정보를 오픈하려면 부정적인 시그날은 용서되지 않는다. 투명성의 바탕은 긍정이다. 서로 의심하면 안 된다. 사회가 만든 시스템에 - 교육, 행정, 직장의 계급 구조 - 반기를 들어서도 안된다. 소수의 목소리는 금지되고 저항은 반기 시 된다. 국가의 유지라는 패러다임 앞에서 개인의 호기심, 시스템에 대한 부정은 묵살된다.
정보의 자유라는 맥락에서 투명성은 강력하게 요구되고 있다. - P.13
행위는 조작이 될 때, 즉 계산하고 조종하고 통제할 수 있는 과정에 종속될 때 투명해진다. - P.14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에 가격표라는 태그를 들이댄다. 사물은 돈에 결부되면서 그 가치를 갖는다. 모든 사물을 돈의 가치로 평가되는 포르노 시스템에 종속된다. 인간의 죽음 역시 돈으로 계산되는 사회가 되었다. 작금의 우리 사회가 그렇지 않은가? 세월호 침몰, 강남역 사건, 신안 성폭행 사건, 위안부 할머니들... 국가가 내린 결정에, 집단의 전체적인 목소리에 한 목소리로 제청해야 하는 강압적인 시대에 우린 살고 있다.
투명성은 시스템의 강제력을 수반한다. 투명성의 스피드를 얻으려면 모든 사회 집단 구성원들이 동일한 사고를 유지해야 한다. 그렇게 될 때, 최대의 퍼포먼스를 낸다. 스피드를 저해하는 부정적인 생각은 배척되고 무시된다. 사회는 부정적인 에너지를 원하지 않는다. 결국 이것은 획일적 사고를 낳게 된다. 모든 구성원들이 한 목소리를 내야 하는 부담감 속에 저항은 침묵에 묻힌다.
그 누구도 어떤 말속에서 다른 사람이 생각하는 것과 완전히 똑같은 것을 생각하지는 않는다. - 훔볼트
인간의 영혼은 자유롭다. 투명성은 인간의 자유로운 사고를 침해하고 억압한다. 영혼은 들여다볼 수 없는 깊은 바다와 같은 속성을 가지고 있다. 투명성은 인간의 내면까지 외부로 드러내도록 강요한다. 인간의 영혼은 언젠가 사라질지도 모른다. 하나의 사이보그와 같이 기계와 인간이 서로 구별할 수 없는 상태가 될지도 모른다. 인간성은 머지않은 미래에 상실될지도 모른다.
자아는 무의식이 거침없이 긍정하고 갈망하는 것을 부정한다. 프로이트 - P.17
사람들은 모두 다르다. 각자의 개성은 인간 그 자체로서 아름다움을 지닌다. 다양성을 지닌 인간의 본질에 획일적인 투명성을 강요하는 것은 인간의 고유한 속성을 파괴시킬 수 있는 촉매제가 된다. 적나라하다. 비밀이 없이 모든 것이 공개된다. 개인의 사생활을 보장할 수 없다. 파파라치, CCTV, 블랙박스와 같은 도구에게 우리는 추적당하며 살고 있지 않은가?
투명성의 강제에는 바로 이러한 섬세함, 즉 결코 완전히 제거할 수 없는 다름에 대한 존중이 결여되어 있다. - P.18
너는 반드시 깨달아야 한다. 이러한 종류의 무지가 없다면 삶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그것이 살아 있는 자가 스스로를 보존하고 번성할 수 있는 필수 조건이라는 것을 - 니체 - P.19
오직 긍정만을 요구하는 자는 변화되지 않는다. 사고가 정지되고 만다. 오직 긍정하듯이 왜?라는 질문조차 존재하지 않고, 고개만 끄덕거릴 뿐이니깐... 긍정사회는 고통을 느끼지 못하도록 인내를 끝없이 요구한다. 적당한 부정은 건강한 내면을 깃들게 하지만, 투명사회 속에서 인간은 수긍할 뿐이다.
인간 영혼의 깊이, 위대함, 강인함은 바로 부정적인 것에 머무름으로써 나온다. 인간 정신도 산고의 결과이다. - P.21 - 니체
사랑은 길들여지고 긍정화되어 소비와 안락의 상투형이 된다. - P.22
정치는 전략적인 행위이다. 이이 이 이유 때문에라도 비밀스러운 영역은 정치와 잘 어울린다. 전면적인 투명성은 정치를 마비시킨다. - P.23
비밀스러움이 사라진다면 국가 간의 외교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국가 정책과 시스템이 상대국에게 훤히 들여다보이는 마당에... 어떤 철학으로 국가를 운영할지 근본적인 정책도 없는 마당에 적대국에게 우리의 약점이 그대로 훤히 들여다보인다. 비밀이 사라진 정치는 정치가 더 이상 아니다. 정치의 종말을 의미한다. 투명성은 색깔이 없다. 의견이 없는, 아무런 주장도 없는 정당이 정치에 등장한다.
국가를 유지하기 위해서 투명성은 효과적이다. 기존 정치의 문제점을 솎아내지 못하도록, 몰 이해하도록 강요한다. 시스템 하에서 길들여진 채 살아가도록 훈육한다. 이러한 시스템 하에서 국민투표의 결과는 명약관화하다. 무조건적인 "좋아요"을 강요한다. 좋아요를 기준으로 집단이 규정된다. 서로 정치색이 다른, 목적이 다른 집단은 서로 대립한다. 좋아요를 누르지 않은, 의견이 다른 집단과 서로 배척하고 공격한다. 서로를 절대 동일시하지 않는다.
접근할 수 없는 공간에 제의적 물건을 보관하고 누구도 볼 수 없게 하는 관행은 제의 가치를 더 높이는 효과를 낳는다. - P.28
투명사회에서는 상품들이 모두 보이는 형태로 전시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투명해야 하니깐... 전시되지 않는 가치는 의미가 없는, 더 이상 상품의 가치가 없는 사물에 불과하다. 남에게 드러내기 위하여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고 빛내야 한다. 페이스북과 같은 소셜 네트워크 시스템이 해당된다. 이것은 자본주의의 산물로써, 더 이상 개인의 신비주의 전략은 먹히지 않는다. 우리는 페이스북과 같은 소셜 네트워크 시스템에서 자신의 가치를 포장하고 전시한다.
사진은 사람의 얼굴을 숭배하는 과정에서 제의가치로서 빛난다. 그러니 시대가 변화하면서 전시가치가 제의 가치의 영역을 침범한다. 전시가치는 보다 우월한 영역을 확보하기 시작했다. 페이스북 시대에 인간의 얼굴은 더 이상 '시선의 아우라'를 지니지 못하고 있다. 아날로그 사진이나 그림은 바스러질 수 있는, 소멸할 수 있는 자유를 지녔지만, 디지털 사진은 영원히 사멸할 수 없는 운명을 지녔다. 부정성을 가지지 않는다. 탄생도 죽음도 없는 투명성을 지녔다.
사진은 과거에 존재한 것에 대한 증서이다. 따라서 슬픔이 사진의 근본 정조가 된다. - P.32
전시되는 사회는 포르노적 사회이다. 모든 것이 겉으로 나오고, 벗겨지고, 노출된다. 과도한 전시의 결과로 모든 것이 "어떤 비밀도 없이 즉각적인 소비에 내맡겨진" 상품으로 전락한다. - P.32
모든 것을 커뮤니케이션과 가시성의 영역에 내던지는 강압적 힘은 외설적이다. - P.34
사람들은 자신의 외양을 뜯어고친다. 성형 수술, 피트니스 클럽 등 전시가치의 극대화에 목적을 둔다. 모든 것은 하나의 이미지로 균일화, 획일화되어간다. 한 이미지를 향한 압박이 늘 존재한다. 본질을 잃고 겉으로 보이는 전형적인 모습만 가시화된다. 따라서 투명성은 폭력적이다. 거리가 사라졌다. 가까움이라는 단어가 사라진다. 가까움을 측정할 수 있는 공간이 사라진다. 공간을 스스로 파괴한다. 투명성은 모든 대상의 거리를 균일하게 한다.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존재로 전락시켜버린다.
쾌락에 적대적이다. 쾌락은 인간이 기본적으로 추구하는 가치다. 비밀, 베일 속에서 개인의 쾌락은 깨어난다. 가면을 쓴 인간은 그래서 쾌락을 추구한다.
투명성과 명백성은 에로스의 종언을 초래할 것이다. 즉 포르노의 세계가 시작되는 것이다. - P.39
투명성이라는 무기로 상호 간의 비밀을 폭로하는 '포스트 프라이버시'의 파괴적 작용이 넘친다. 삶은 명확성, 불명확성의 상호 작용이며, 일정한 혼합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삶의 진정한 모습이다. 우리가 사람에게 매력을 느끼는 것은, 그 사람이 가졌지만 뚜렷하게 보이지 않은 신비한 매력 때문이다. 투명성은 그러한 불투명성이 가진 매력을 배척한다. 투명성은 상상력을 마비시킨다. 투명함 속에 비친 선명하고 사실적인 이미지들은 환상을 마비시키고 상상력의 나래를 금지시킨다.
상상력은 확고하게 한정되지도 않고 분명한 윤곽선도 없는 놀이 공간을 전제한다. - P.40
불명확성은 가장자리에서부터 시작되어 사물 전체를 비밀스러운 광채로 감싸는 것이다. 신성한 것은 투명하지 않다. - P.42
심오한 것은 모두 가면을 사랑한다. - P.44
심오한 정신은 가면의 보호 속에서 생성된다. - P.45
우리는 모두 가면을 쓰고 있다. 온라인 공간에서 또 하나의 모순된, 내가 아닌 또 다른 나를 생산한다. 그리고 그 나를 매일 소비한다. 온라인이라는 가면을 쓰고 있기에 우리는 그곳에서 자유롭다. 투명성이 요구되는 공간에서는 자유로운 사상, 상상을 통해 자신의 숨겨진 내면을 드러낼 수 없다. 우리는 공간 속에서 안정을 느끼며, 그곳에서 보호를 받는다.
신은 더 많은 기쁨을 생산하기 이해 은유를 동원하여 성서를 의도적으로 불분명하게 만든다. "이러한 것들은 비유의 외투로 덮인다." - P.46
감추어져 있다는 부정적 특성은 해석학을 에로티즘으로 만든다. 발견과 해독은 벗기는 쾌감을 일으킨다. 반면 정보는 적나라하다. 벌거벗은 말은 매력을 상실하고 평범해진다. - P.47
아름다운 것은 베일 속에 감춰졌을 때, 가려졌을 때, 본질적인 빛을 잃지 않는다. 포르노는 감추지 않는다. 적나라하게 모든 치부를 드러낸다. 그 벌거벗음에 아름다움은 존재하지 않는다. 벌거벗은 것은 숭고한 것이다. 숭고한 것에는 본질적인 미가 존재하지만, 형식이나 형상이 없다.
전시로 인해 피조물의 숭고함은 파괴된다. 숭고함은 제의 가치를 생산한다. - P.51
시선에 노출되어 있다는 의식이 공허를 창출하고, 얼굴에 생기가 돌게 하는 표정의 작동 과정을 폭력적으로 중단시킨다. - P.53
다른 사람에게 나의 시선을 강탈당하는 순간, 얼어붙을 듯한 긴장한 얼굴로 변화한다. 투명한 사회에서는 나의 시선이 외부로 노출된다. 자본주의에서는 인간 역시 상품화된다. 사회 속에서 포르노적인 가치의 수단이 된다. 벌거벗은 몸에는 에로틱한 광채가 없다. 오직 순수한 매끄러움만이 존재한다. 투명성은 에로틱한 순수성을 잃는다.
과다 활동, 과다 생산, 과다 커뮤니케이션은 외설적이다. - P.64
투명성을 위해서 계산할 수 있는 가치 - 더하기와 같은 단순 가산적 과정들 - 들이 숭상된다. 그것들은 속도를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서사적 과정은 배척된다. 인간의 사유는 예측할 수 없는, 자신이 알지 못하는 미지의 영역을 개척하는 과정이다. 불확정성을 내포하고 있는 인간의 사유는 투명성 앞에서 굴복되고 무시된다. 인간은 사유를 통해서 자신의 내면을 변화시킬 수 있다. 투명성은 이러한 프로세스를 거부한다. 모든 것의 결과가 동일한 것으로 판단되는 투명성 앞에서 인간의 서사적인 사유 과정은 무의미하다. 변화의 과정은 무시된다.
행렬은 서사성을 지니는 까닭에 고유한 시간의 흐름을 따른다. - P.66
모든 것이 프로세스가 된 사회, 그리하여 "더 이상 아무런 장면도 없고 모든 것이 철저히 투명해진" 사회는 외설적이다. - P.67
순례의 길은 가능한 한 빨리 지나가야 마땅한 통로가 아니라, 풍부한 의미를 지닌 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길 위에 있다는 것은 참회, 구원, 감사 등을 의미한다. 이러한 서사성 때문에 순례 여행은 가속화될 수 없는 것이다. - P.67
우리가 순례를 하는 이유는, 고난의 과정 속에서 미래를 찾기 위함이다. 순례길을 걷는 것은 길 위에서 나의 존재를 확인하는 방법이며, 잃어버린 나의 본질을 찾는 것이다. 미천한 나의 영혼이 구원받을 수 있는 마지막 여행이다. 우리는 지구라는 길에서 목적지를 잃어버린 지구의 방랑자, 나그네다. 순례 길은 볼거리를 찾아 헤매는 자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매끈하고 굴국 없이 평탄한 길은 외설적이다. 그런 길에서는 누구나 똑같은 경험을 하게 되며, 똑같은 감정만을 공유한다. 더 이상 생산적인 프로세스는 존재하지 않는다. 모두가 같은 방식으로 소비할 뿐이다.
오늘날 기억은 긍정화되어 쓰레기와 데이터의 더미로, "고물가게"로, 또는 "보존 상태가 좋지 않은 다량의 온갖 이미지와 닳아빠진 상징들이 완전히 뒤죽박죽으로 꽉 차 있는 창고"로 전락한다. - P.69
아름다운 것은 지금 당장의 스펙터클에서 뿜어나오는 현란한 빛, 혹은 즉각적인 자극이 아니라 고요한 잔광, 시간이 남긴 인광이다. 사건과 자극의 빠른 교체는 아름다움의 시간과는 거리가 멀다. - P.70
오늘의 세계는 행위와 감정이 재현되고 읽히는 극장이 아니라 내밀함이 전시되고 판매되고 소비되는 시장이다. 극장이 재현의 장소라면, 시장은 전시의 장소다. 그리하여 오늘날 연극적 재현은 포르노적 전시에 밀려난다. - P.73
사람들은 소셜 미디어를 통해서 외부의 한 까풀이 제거된 형태로 자기와 비슷한 유형의 사람들을 만나 소통한다. 그 세계는 서로 좋아하고 긍정할 만한 이야기들이 주류를 이룬다. 부정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여러 사람들이 모인 공적인 광장이지만, 그 안에서 사람들은 하나의 공동적인 운명체를 이루고, 자기들끼리 친목화된 형태로 보이지 않는 카르텔을 형성한다.
개인(Person)의 본래 의미는 가면이다. 가면은 가면을 통과하여 울려오는 목소리에 성격, 즉 형식과 형상을 부여한다. 드러내고 노출하는 투명사회는 모든 형태의 가면, 모든 형태의 가상에 대해 파괴적으로 작용한다. - P.75
사람 간의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친밀성은 새로운 사람들 사이의 교류를 불가능하게 한다.
나르시시즘은 자기 자신과의 거리 없는 친밀성, 즉 자신에 대한 거리의 부재에서 온다. - P.76
우울한 나르시스트는 자기 자신에 대한 무한한 친밀성 속에서 익사한다. - P.77
투명사회는 시인이 없는 사회다. 시인은 연극적 환상 세계를 연출하고, 가상의 형태, 제의적, 의식적 기호를 통하여 사물에 예술성을 가미하는 사람이다. 투명사회에서는 사물의 은유를 허락하지 않으며 직관적인 사실의 형태, 정보 전달자로서의 형태만을 요구한다.
빛은 부정성을 발전시킨다. 빛의 부정 성능 양극화하고 대립을 생산한다. 빛의 부정성은 양극화하고 대립을 생산한다. - P.82
투명사회에서는 빛과 어둠이 존재하지 않는다. 형이상학적인 신성한 빛의 세계는 철저히 무시된다. 빛이 없는 채, 모든 사물이 여과 없이 외부로 노출된다. 훤히 바깥으로 비추게 된다. 투명사회는 공허함 뿐이다. 공허함을 메꾸기 위하여 다량의 정보가 유입된다. 정보의 유입만으로 빛이 없는 세상을 밝힐 수 없다.
정보는 긍정화되고 조작 가능하게 만들어진 언어다. - P.83
루소의 수정 같은 마음. 마음이 일으키는 일들을 숨길 수 없다. 모든 것은 투명하다. 이것은 루소의 마음의 독재와 같다.
18세기의 사회는 하나의 극장이었다. 그것은 연극 장면들, 가면들, 극 중 인물들로 가득 차 있었다. - P.88
모든 베일을 찢어버리고, 모든 것을 백일하게 드러내며, 모든 어둠을 추방하려는 영웅적인 투명성의 기획은 폭력으로 귀결된다. - P.90
투명사회는 전체주의적인 성격을 필연적으로 띠게 된다. 투명사회의 구성원들은 철저히 서로의 행동을 감시하고 감시당한다. 우리는 착취당하고 있다. 알에서 깨어나야 한다.
우리는 원근법적 공간과 파놉티콘의 종말을 경험하고 있다. - P.93
평면적인 사고방식, 디지털 파놉티콘의 습격, 텔레비전이라는 비 원근법적인 독재의 대상에게 우리의 시선을 강탈당한다. 전파가 미치는 곳, 세상 어느 곳에서나 그것의 습격이 이루어진다. 우리는 규율 사회에 길들여진다. 서로가 폐쇄되어 통제된 벤담식 파놉티콘에서 벗어나 현대 통제사회의 주민들은 네트워크화 되어, 서로 정보를 교환한다. 과도한 정보의 교환은 투명성 하에서 작동된다.
투명사회는 상호 신뢰를 요구한다. 권력은 자신의 기밀을 보장되지 않는다. 구성원은 자유를 침해당하고 속박당한다. 긍정적 관계를 요구하는 사회 속에서 구성원은 자신의 존재를 잃는다. 투명성을 요구하는 것은 그 사회가 그만큼 도적적으로 해이해졌다는 것이다. 도덕성이 힘을 잃고 있다는 것을 방증한다.
신뢰 위에 세워진 사회에서는 투명성에 대한 집요한 요구가 생겨나지 않는다. 투명사회는 불신과 의심의 사회, 신뢰가 줄어들기에 통제에 기대려는 사회다. - P.98
투명사회는 정확히 성과사회의 논리를 따른다. - P.99
투명사회에서는 진정한 의미의 공동체가 형성되지 않는다. 단지 공동의 관심을 좇거나 하나의 상표를 중심으로 모인 여러 에고의 집합(브랜트 커뮤니티)처럼, 고립된 개인들의 우연한 무리가 생겨날 뿐이다. - P.100
투명사회에서는 스스로를 착취한다. 스스로를 감시하는 행위의 주체자가 된다. 브랜드 커뮤니티는 가산적인 형태의 에너지를 소비할 뿐이다.
사람들은 자기를 노출하고 전시함으로써 열렬히 디지털 파놉티콘의 건설에 동참한다. - P.102
한병철 교수가 설명하는 투명사회는 아직 우리나라에 적용하기에는 무리가 있을지도 모른다. 독일에서는 정치인들에게 요구되는 투명성이 특정한 정책이나 국가의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한 의견이 아니라, 그들의 스캔들이나 사생활을 들여다보는 측면으로 해석된다고 한다. 얼핏 우리 사회도 비슷해 보이는 측면이 있다. 정치인의 청렴결백, 깨끗한 사생활, 완벽한 모습의 잣대를 요구한다. 정치적인 철학이나 구체적인 정책보다는 그들의 출신지, 외모, 행동을 놓고 포르노적인 잣대를 들이댄다.
투명하게 모든 것을 훤히 들여다보면 그 세상이 더 깨끗해 보일까? 투명해 보이기 위해 사회의 구성원들은 한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부담감을 안은 채, 다른 사람들이 과연 투명한지 늘 감시하고 통제해야 할지도 모른다. 언론은 더 외설적으로 변해가고, 정보의 바다라고 불리는 세상 속에서 우리는 비밀 없이 모든 것을 오픈해야 할지도 모른다. 결국 서로는 획일적인 모습으로 변해갈 것이며, 개인의 개성과 다양성은 철저히 무시될 것이다. 이것은 신자유주의의 요구에 해당하며, 정보를 끊임없이 생산해야 하는 부담감만을 안길 뿐이다. 다량의 정보는 빅데이터로 생산되고 재활용도 되지만, 더 신속한 판단을 내려야 하는 사고의 가속화를 우리에게 안길 것이며, 조용하게 사유하는 공간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살고 있는 안방까지 인공지능 시스템에게 분석당하고 다른 사람에게 데이터로 노출되는 시대에 살게 될 것이다.
온라인의 관계를 생각해본다. 직접 대면하여 호흡을 나눌 수 있는 오프라인과 비교하여 온라인은 투명성에 관대하다. 온라인에서는 나의 본질을 감출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글을 쓰는 나는 편하게 앉아서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할 수 있다. 오프라인은 그런 면에서 보다 형식적이고 나에게 파괴적이다. 글을 쓰는 나는 온라인 뒤에서 숨어 솔직한 의견을 피력할 수 있다. 이러한 장점은 물론 악플과 같은 부정적인 면으로 활용이 되기도 한다. 나는 온라인에서 자유를 획득했지만, 여전히 불안하고 통제 안에서 안정감을 느낀다. 나는 이미 투명사회에 길들여진 걸까? 나는 아직까지 더 비밀스럽고 신비한 존재로 남고 싶다.
나에게 글쓰기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