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만과 편견>을 읽고...
고전(Classic)이 우리에게 각별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오래되어도 자신의 고유한 빛을 잃지 않으며, 무구한 세월이 흐르고 또 흘러도 사람들에게 여전히 한결같은 모습으로 사랑받는 것, 특정 시대 - 근대 - 의 사회, 인간군상들의 면모를 엿보기 위하여 과거로 여행을 떠날 수 있는 나만의 즐거움을 체험하게 하는 것, 우리가 처한 시대적인 환경과 터득한 지식, 가정환경, 교육에 따라 내 마음대로 해석할 수 있는 자유로운 힘 때문일지도 모른다. 몇 백 년을 넘도록 이 땅에서 여전히 살아 숨 쉬며 사랑을 받고 있는 고전에는,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더 특별하고도 강렬하게 숨겨져 있다.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고, 사람들의 눈이 닳아빠지도록 읽고 또 읽히게 하는 감동을 반복하게 하는 것은, 읽어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시대를 뛰어넘는 서사적인 유려함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변화한다. 태어나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사람은 자신이 처한 환경에 따라서 스스로를 변화시키며 적응해 나간다. 자라나는 것은 지금의 변화된 육체적인 모습뿐만 아니라, 고전에 기록되어있는 옛사람들이 가르치고자 했던 내면의 이야기, 그리고 시대가 변화되어도, 가치가 변화되어도, 모진 역사 속에서도 꿋꿋하게 살아남은 고전이 전달하는 묵직한 메시지도 내면적인 변화의 한몫을 차지한다.
<오만과 편견>이라는 제목이 전달하는 강렬한 주제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비록 수동적인 강요란 부담을 안고 읽는 것을 시작하긴 했지만, 책 두께의 규모 - 600페이지 육박! - 에서 전해지는 장중함 속에서도 정신을 놓지 않고 마지막까지 집중을 다하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고전을 대하는 나의 자세는 실로 엄숙했다. 5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을 감당하기에는 주어진 여건과 시간이 부족한 것도 사실이었다. 이 책을 읽기 위해서 나는 주말 하루 동안 끈기와 투지만으로 버텨냈다. 카페에서 들은 이 책에 대한 선입견은 연애소설, 남녀 간의 좌충우돌 사랑이야기였다. 이 책에 대한 나의 첫인상 역시 애석하게도 오만과 편견이었다. 하지만 다양한 등장인물들과 그들의 가계도를 둘러싼 관계 설정, 시대적인 묘사, 인물들의 개성, 자연환경에 대한 설명 등 작가가 설명하고자 하는 작은 부분에까지 세세한 관심을 기울였고, 필요한 부분은 노트에 메모를 하는 정성을 다했다. 결국 하루 동안 나는 이 책을 독파할 수 있었고, 리뷰를 하기 위하여 글을 쓰고 있지만, 사랑 이야기를 글로 전하기에는 필력이 모자람을 느꼈다. 소설을 다 읽고 나서 전해 들은 얘기에 의하면, 2005년에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가 개봉되었다는 사실이었다. 리뷰를 쓰기 위하여 영화를 볼 것인가 잠시 고민을 하긴 했지만, 소설로 전달받은 감정을 충실하게 전달하기 위하여 영화 감상은 잠시 미루기로 하였다.
<오만과 편견>은 남녀 간의 연애, 사랑, 결혼을 이야기한다. 작가인 '제인 오스틴'은 이 작품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이 작품은 너무 가볍고 밝고 반짝거려서 그늘이 필요하다." 이 작품이 쓰일 당시 '제인 오스틴'은 결혼이 좌절되는 쓰라린 경험을 했다. 1795년 그녀의 결혼이 좌절된 후, 집필을 시작하여 1년 만에 탈고가 되었다. 그 이후로도 무려 10년 동안 작품이 사장되어있다가 현재의 형태로 발표되었다고 한다. 제인 오스틴은 이 소설이 밝고 가볍다고 이야기하지만, 소설 전반에 걸친 영국 사회에 대한 조소와 상류 사회에 찌들었던 오만함, 타성에 젖은 인물들에게 내재되어있는 깊은 편견들을 시종일관 들추어내고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특히 여성으로서 차별당하고 남성들의 힘에 억압당했던, 사회적 약자인 여성에 대한 요구, 그리고 그들이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들을 등장하는 인물들의 행복 성취의 과정을 통하여 전달한다.
독립적이며 주체적인 여성의 자율 의지를 등장인물 제각각에게 주입시킴으로써, 자신의 원하는 대로 이상향을 건설하려는 진지한 이야기를 담았다. 어떤 여성은 자신의 당찬 의지대로 생각하고 판단하며, 어떤 여성은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을 타개하지 않고 순응하며 살아가는 수동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행복한 신데렐라의 꿈을 꾸는 '남자들에게 의존하려는 여성'들에 에게 간접적인 경고 메시지를 역설적으로 전달하고 있었다. 소설의 주인공들은 동화에서 묘사하는 신데렐라처럼 반짝반짝한 꿈을 실현하는 것에서 만족하지 않는다. 시대의 자화상을 반영한 현실적인 신데렐라의 모습이라고 할까? 나는 과거에 보았던 <브리짓 존스의 다이어리>에서 소설 <오만과 편견>과 유사한 이미지를 떠올렸다.
이 소설은 연인들 간의 달달한 사랑이야기를 다룬 로맨스 소설이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쟁취하기 위하여 용감하게 맞서 싸우는 백마 탄 왕자님과 그를 흠모하는 아리따운 여인의 만남 그리고 행복한 결혼, '그들은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다.'와 같은 동화풍의 이야기도 아니다. 남자가 보유한 사회적 지위, 재산, 명예와 같은 물질적인 배경을 사랑의 가치라 생각하지 않는, 오직 진정한 사랑을 최고의 가치라 여기는 주인공 '엘리자베스'를 중심으로 한, '베넷' 가족의 현실적이며 이상적인 경계에선 가족들의 결혼 이야기다.
어느 날, 네더빌드 파크에 세를 들어오는 잉글랜드 북부 출신의 갑부 청년인, 빙리가 이사를 오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베넷 가족은 주인공 엘리자베스를 비롯한 딸 다섯과 자식들의 교육에는 무관심하며 가정사에는 냉소적이기만 한 아버지 - 베넷 - , 온갖 허영과 사치에 물들어, 갑부인 빙리의 출현을 오직 자신의 딸들의 결혼 목적과 그 수단으로 출세하려는 생각뿐인 경박한 어머니 베넷 부인, 첫째는 제인으로서 처음 보는 사람과 쉽게 사랑에 빠질 것만 같은 금사빠였고 - 순수하고 아름다움 - , 조금은 냉철하고 현실적인 엘리자베스, 오직 책 읽는 것만을 좋아하는 셋째 메리, 철없고 무식하고 오직 남자 - 군인 - 생각만 하는 넷째 - 캐서린 - 와 다섯째 - 리디아 - 로 구성되었다.
소설 <오만과 편견>의 등장인물들은 기본적으로 오만함이라는 성격을 갖추고 있다. 그 오만함은 다른 사람을 판단할 때, 내면적인 모습을 찾지 못하도록 편견이라는 장벽을 만든다. 편견은 사람의 올바른 모습, 진정한 모습을 비관적인 형태로 포장한다. 사람이 감정을 서로 교환할 때, 편견은 우리의 눈을 불투명한 벽으로 막아 세우며, 상대방이 가지고 있는 진실된 모습을 보지 못하도록 방어한다. 헌신적인 사랑의 실현을 방해하는 오만함, 자신의 생각만이 유일한 선이며 절대적이라는 교만함은, 남녀 간의 진정한 사랑을 확인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며, 쓸데없는 오해들을 양산하도록 방치한다.
엘리자베스에 눈에 비친 '다아시'는 배려 없고 독단적이며 오만한 첫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다아시는 완벽하게 모든 것을 갖추고 있는 자신을, 비판적으로 대하는 엘리자베스의 불편한 선입견을 이해하지 못한다. 자신이 가진 배경과 능력, 외모 정도라면 어느 여성이건 단숨에 사랑에 빠지게 할만한 남성적인 매력이 충분할 것이라고 자만한다. 그런 오만함은 엘리자베스에 대한 즉흥적인 청혼을 낳게 한다. 하지만 예상하지 못한 엘리자베스의 격한 거부 반응을 얻게 된 다아시에게는 충격, 공포, 억울함 뿐이었을 것이다. 다만 그는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진 않았다. 억울한 감정을 가라앉히고, 자신을 오해한 엘리자베스를 향한 솔직한 편지를 쓴다.
편지를 쓰는 혼자만의 시간을 통하여, 자신을 오해한 엘리자베스의 불가피한 선입견을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오만했는지, 다른 사람의 감정을 배려하지 않았는지, 후회와 깨달음을 느끼고 겸손한 모습으로 변화의 과정을 얻는다. 그의 능력과 배경, 사회적 지위만으로도 청혼을 한다면, 당연히 엘리자베스의 승낙을 취할 것이라 의심하지 않았지만, 결혼이라는 것에 필요한 것은 물질적인 배경, 경제적인 조건이 전부가 아님을 시간이 흐름에 따라 내면이 변화하는 과정을 겪으며 성장하게 된다.
제인 오스틴은 오만함에 대하여 아래와 같은 정의를 내린다.
“오만은, 내가 보기에는 가장 흔한 결함이야.” 메리가 자신의 깊은 사고력을 뽐내며 말했다. “내가 지금까지 읽은 바로 미루어 볼 때, 오만이란 실제로 아주 일반적이라는 것, 인간 본성은 오만에 기울어지기 쉽다는 것, 실재건 상상이건 자신이 지닌 이런저런 자질에 대해 자만심을 품고 있지 않은 사람은 우리들 가운데 거의 없다는 것이 확실해. 허영과 오만은 종종 동의어로 쓰이긴 하지만 그 뜻은 우리 스스로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와 더 관련이 있고, 허영은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해 주었으면 하는 것과 더 관계되거든. “ - P.31
메리는 오만이 인간이 가지고 있는, 결함 중에서 아주 흔하게 발견할 수 있는 허점이라고 정의한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 자신이 가장 똑똑하고 잘났다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남과 자신을 비교하는 것은 열등감이라는 극복할 수 없는 문제점들을 낳기도 한다. 오만은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판단을 하게 된다. 그것은 자존감과 깊게 연관이 되어있고, 허영은 다른 사람을 비교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하며 이것은 일종의 자존심, 열등감과 연결이 되어있다. 허영은 남과 자신의 처지를 비교하며,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을 똑같이 욕심내고, 내가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을 탐하려고 하는 사치, 물질적인 욕망과 관련이 있다.
결혼이란 것은 무엇일까? 사랑보다는 현실적인 조건을 선택한 엘리자베스의 친구 샬럿은 아래와 같이 이야기한다.
결혼에서 행복이란 순전히 운에 달려 있어. 서로의 취향을 아주 잘 알거나, 혹은 서로 아주 비슷하다고 해서, 그것 때문에 둘의 행복이 더 커지는 건 결코 아니야. 취향이란 건 계속 변하게 마련이라 나중에 누구든 짜증이 날 만큼 달라지게 마련이야. 평생을 같이 살 사람의 결점은 될수록 적게 아는 것이 더 나아. - P.35 (샬럿)
샬럿은 엘리자베스에게 청혼을 했던 콜린스에게 청혼을 받아 낸다. 콜린스는 분별력이 없고, 비굴했으며, 자만심으로 똘똘 뭉친 기회주의자 같은 인간이었다. 그는 엘리자베스에게 청혼을 거부당하자, 바로 샬럿에게 구애를 하여 결혼을 승낙받게 된다. 블랙 코미디와 같은 콜린스의 결정을 두고 나는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근대 영국 사회의 일반적인 모습이었을까? 사촌 간의 근친결혼을 통해서 가문의 권력과 재산을 세습하고자 하는 욕망에 조소를 날리지 않을 수 없었다.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이야기의 흐름은 주인공인 엘리자베스와 다아시의 선입관, 오해, 갈등의 사건을 뛰어넘어, 스스로의 오만함을 깨닫고 겸손해지는 과정, 서로를 이해하고 화해하는 과정, 서로의 상처를 치유하고 조력하는 과정, 서로에 대한 감정을 확인하는 행복한 결말로 치닫는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이야기에는 큰 충격이나 절망적인 사건은 존재하지 않는다. 결혼이라는 주제를 놓고 물질적인 조건과 사랑 중에서 어떤 것이 행복을 전달할 것인지, 그것에 대하여 생각할 시간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결혼이 전달하는 핵심적인 뜻은 무엇일까? 서로 다른 집안이 만나서 새로운 가족을 형성하는 것? 사회적인 지위 또는 물질적인 재산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어울리는 것?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만나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것? 수입, 부, 지위, 능력과 같은 편견을 벗어나 남녀 간의 순수한 사랑의 힘을 찾는 것이 결혼의 목적이 아닐가? 생각해본다. 1700년대 영국 사회와 현재 대한민국에서 결혼을 대하는 태도는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주 오래전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현재의 결혼에 관한 세태를 비교하여도 큰 이질감을 발견하지 못하게 된다.
엘리자베스는 다아시를 처음 본 순간, 거만한 태도를 느꼈고, 그것이 그의 전부라 생각했다. 섣부른 판단, 그 자체야말로 신분과 지위를 떠난 오만함일지도 모른다. 어떤 사람을 외모와 지위만으로 판단하는 것, 저 사람은 획일적으로 그럴 거야 하는 생각이야말로 오만함일 것이다. 이렇듯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기본적인 오만함을 갖추고 있었다. 그 인물들은 자신이 배운 교육, 습성, 생활환경에 따른 가치관을 굳게 믿고 의지한다. 자신의 생각과 판단에 사소한 의심조차 하지 않는다.
제인 오스틴은 21살 때, 자신의 낮은 신분 탓으로 결혼에 성공하지 못했다. 사회적인 신분에 따라 사랑이 결정되는 당시 영국 사회의 계급론, 여성 불평등에 대한 꾸짖음을 소설로 전달하려 했을지도 모른다. 사회적인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으며, 구조적인 모순을 넘어선 사랑의 실현을 소설로서 그려내고 싶었을 것이다. 자기가 꿈꿨던 이상과 같은 결혼 생활을 이루지 못한 자신의 한계들을 소설로서 극복하고자 했을 것이다. 이 소설을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서, 시시콜콜한 사랑을 그린 연애 소설로 치부할 수도 있을 것이고, 사회의 모순을 뛰어넘으려 고군분투하는 용감한 여성의 모습을 그린 화해와 성장 소설로 평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남자지만, 다아시의 변치 않는 사랑에 감동적인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 그리고 그의 끈질긴 구애를 받아 든, 엘리자베스의 화해와 내면의 성장에 찬사를 보낸다. 두 사람에게 펼쳐진 미래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행복한 것들로 채워졌음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들은 오래도록 행복하게 살았다고 한다. 나의 결말은 동화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