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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대생의 심야서재 Jan 04. 2023

죽기 위해 벨기에로 떠난 여자

《나의 마지막 여름》, 안 베르


짧은 평(《나의 마지막 여름》, 안 베르, 위즈덤하우스)


아무리 인간에게 자유가 주어져있다고 할지라도, 적어도 죽음이라는 커다랗고 절망적인 전제 하에서는 자유는 영속적이지 않다. 그 자유란 것은 유통기한이 비교적 짧고 그 제한적인 자유도 당장 마감될 수 있다. 그런데도 우린 100세를 살 것처럼 자유를 우주적인 범위로 확장해놓고 남은 생을 바라본다.



이 책의 저자인 '안 베르'는 자유의 평범한 가치를 독자에게 화두로 던진다. 그 자유는 모두가 잘 알고 있는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한에서 누릴 수 있는, 말하자면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권리다. 센스가 있는 사람이라면 책의 제목을 보고 바로 어떤 의미를 연상할 수 있으리라. 


안 베르는 시한부 선고를 받은 사람이다. 죽음이 그의 자유를 끝장낼 것이다. 죽음은 그의 남은 생을 강력하게 통제할 것이다. 그러니 죽음을 앞둔 자에게 자유는 아무것도 아닌 의미를 지니는 셈이다. 죽음 앞에서 우리 모두는 허풍선이다. 하지만 그는 생의 마감을 다른 방식으로 주도했다. 죽음에서 조연이 아닌, 주연으로써 자신이 각본을 직접 쓰고 무대를 연출하고 등장인물까지 캐스팅했다. 모든 것을 완벽하게 스스로 해버렸다. 타인의 권위에 눌리지 않고 자발적인 죽음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존엄사다.


현재 지구상에서 존엄사를 선택할 수 있는 국가는 지극히 제한적이다. 대부분 존엄사에 대해 보수적인 입장을 취한다. 이 최종적인 자유조차 제대로 누릴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자살을 잠시 떠올려볼까? 존엄사는 자살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지만 죽음을 지원해주는 사람들이 존재하고 그것이 합법적이라는 사실이 자살과 품격을 달리한다. 불치병에 걸린 사람이 더 이상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없을 때, 단순하게 기계에 의지해서 식물인간처럼 연명하며 죽음을 의미 없이 기다릴 때, 우리는 존엄사를 마지막 카드로 써먹을 수 있지 않을까? 이성적인 판단이 가능할 때, 죽음을 요구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이 누릴만한 최소한의 자유, 그것이야말로 반드시 보장해야 될 진정한 자유가 아닐까.


안 베르는 프랑스에서 태어났다. 프랑스는 존엄사를 인정하지 않는다. 존엄사를 선택하려면 다른 국가로 이동해야 하고 비용도 꽤 많이 들어갈 것이다. 그 부분에 대해 나는 잘 알지 못한다. 지금 현재로서 존엄사에 얼마나 많은 비용이 소요되는지 궁금하지도 않고 구체적으로 검색할 시간도 않다. 나는 아직 팔팔하고 분당 1,000타 이상으로 타이필을 칠만큼 활력도 있으니까. 아직 그럴 만한 나이도 존엄사를 고려할 만큼 병약하지도 않다.


안 베르는 루게릭 환자였다. 루게릭이 불치병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한 번 병에 걸리면 완치가 불가능하다는 사실도 우린 잘 안다. 이 책은 안 베르가 루게릭 병에 걸리고 난 후부터 죽음을 스스로 결행하기 전까지의 일상을 기록한 것이다.


안 베르의 문장은 비교적 침착하다. 안 베르는 아침에 핀 라일락을 보며 꽃향기를 들이마신 후, 다시는 만날 수 없는 계절의 유한성을 그린다. 루게릭을 진단받은 이후, 안 베르가 만나는 세상은 모두 마지막 장이 된다. 라일락, 여름, 정원, 올빼미의 노래, 깨새, 방울새, 티티새, 꾀꼬리가 만드는 전원 교향곡, 진하고 따뜻한 커피, 남편과 딸 그리고 손자들, 안 베르가 만나는 모든 장면은 모두가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는 것이다. 게다가 그것이 오직 단 한 번만 재생될 수 있다면? 반복재생도, 녹화조차도 불가능하다면. 


죽을 날을 받아놓는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안 베르처럼 기록을 남긴다는 건 작가의 집념일까, 의무일까, 한 인간의 책무일까. 안 베르에게 죽음은 아마도 투쟁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죽음을 넘어서지 못했다. 모두가 그랬던 것처럼 안 베르도 결국 최종적으로 죽음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태어난 날은 우리가 선택하지 않았지만 죽을 날이 그렇지 않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축복이 될까, 저주가 될까? 죽음이 언제 닥쳐올지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의 최후의 날이 언제인지 몰라도 되기 때문에, 그 불확정성 때문에 우리는 남은 나날을 긍정적으로 예측하며 열심히 살아갈 수 있는 조건이 되는 건 아닐까. 누군가 그 사실을 알려준다고 속삭여도 나는 그것을 듣고 싶지 않다.


죽음을 생각하지 않아도 죽음은 미래의 확신이고 매일 죽음을 떠올리며 불안해하며 살아간다고 해도 죽음은 우리를 회피할 수 있다. 집착하는 것도 무시하는 것도 모두 옳지 않다. 그저 현재를, 오늘의 무탈한 하루를, 누군가를 열렬히 사랑하고 그리워할 수 있음을, 이렇게 책을 우연히 읽고 저자를 생각하며 그의 편안한 내세를 기원하는 것을, 나 역시 겸허하게 삶을 되돌아볼 수 있음을, 나에겐 5킬로그램 덤벨쯤은 우습게 들어 올릴 수 있는 근력을 소유했음을, 벽돌책이라도 언제든 거뜬하게 한 손으로 떠받쳐 읽을 수 있음을, 이렇게 글을 쓰며 살아 있는 나의 세계를 증명할 수 있음을, 이 모든 사실을 감사하며 살아가련다.


세상은 오늘 아침에도 차분하게 일어났다. 나는 운 좋게 오늘 아침에도 변함없이 따뜻한 물 한 잔을 마시며, 화단에 길게 늘어선 햇살의 자애로운 행렬들을 오래도록 관람할 수 있었다. 어쩌면 그다지 의욕적이지도 않고 열정적인 측면도 없는 일상이지만, 잠시 시간의 흐름에 빗겨 서서 충만한 현재를 관조할 수 있다는 사실이 삶을 더 빛내고 있었다. 죽음조차 삶의 일부라는 인정할 수 없는 사실, 정신 나간 사람처럼 죽음을 유쾌하게 대하지 못하더라도 오늘 아침처럼 아름답게 느낄 수 있다면, 그 두려운 죽음도 마지막엔 나의 친구가 될 수 있을까? 물론 그 감정조차 미리 겪어볼 필요는 없겠지만.


종합 책식지수: 4.7


책 속의 한 문장


사랑이 인생의 모든 순간을 어렵게 만든다. 하지만 나를 지지해주는 것도 사랑. 나의 친구,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이런저런 유쾌한 배려를 고민하고 또 고민해내어 내 고통을 덜어준다. 나는 그들에게 바짝 붙는다. 그렇게 근근하게나마 빛 안에서 살아간다. 그들이 나의 힘, 나의 약점이다. 나의 길잡이, 나의 상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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