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공대생의 심야서재 Jan 06. 2023

글을 잘 쓰지 못하는 사람의 변명

요즘 나는 글을 자주 쓰지 않는다. 아마도 이것을 보는 사람은 대체로 의문을 나타낼 것이다. 지금 접하고 있는 이것도 그렇고 최근 며칠 동안 블로그와 브런치에 계속적으로 글처럼 생긴 무엇을 게시하는 것으로 아는데(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잘 알고 있겠지만...), 글을 쓰지 않고 있다니 대체 내가 관찰하는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라고 나를 의심하는 마음이 점점 증폭해갈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글이 아니다.라고 강력하게 규정한다. 물론 외관상 글의 형태를 갖추고 있는 것 맞다,라고 긍정한다. 어떤 면에서 본다면 글이 아니다,라고 정의하기도 곤란할 테지만 어쨌든 나는 글을 쓰지 않고 있다. 그러니 이것도 역시 글로 간주할 수 없다. 글의 덩어리 정도는 된다고 억지 주장을 펼칠 수는 있겠다. 그러나 굳이 그러고 싶진 않다. 왠지 자존심이 상하는 기분이다. 겨우 이따위 심경 고백도 아닌 낙서장에나 끼적거릴 일기 같은 글을 두서없이 늘어놓는 나의 태도가 영 석연치 않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런 궤변은 어떻게 해석되어야 옳은 걸까? 이것이 글이 아니라면 대체 무엇이 글이냐고 재차 묻는 사람에게 답변을 해야 한다면, 음... 그것은 내가 쓰고 싶은 글과 거리가 꽤 멀기 때문이라고 그래서 나는 이것을 글로 인정할 수 없다는 모호하거나 과장된 답변을 내릴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2차 질문이 나에게 위해를 가해 올 것이라 예측한다. 글 다운 글, 내가 생각하는 글의 정체란 무엇이냐고 말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것을 알았다면 나는 진즉 어린(?) 나이에, 어제 감동적으로 완독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쓴 괴테 정도는 될 수 있었겠지만, 나는 괴테는커녕 문학인으로 불릴 만한 그 어떠한 테두리 안에도 들지 못했다. 


결국 내가 이 시점에서 냉정하게 판단하는 것은 글을 쓰려고 노력하고 발악할수록, 글을 써온 역사가 그리 오래되진 않았지만 쓰면 쓸수록 더욱 이해하기 힘든 세계가 글이라는 사실이다. 나는 점점 더 글의 이상적인 형태와 멀어지고 이러다 종국엔 글과 완전히 떨어져 철천지원수 지간이 될까 두렵다. 


그래, 글 다운 글, 내가 생각하는 글의 형태 그것은 카오스에서 코스모스로 향해가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모호하고 추상적이다. 오늘 검사한 '버크만 검사' 결과에 따라 나는 모호한 형태로 이곳에 진술하고 있다. 정돈된 형태로, 점점 진보된 형태로 나아가는 글이 내가 생각하는 글인데, 막연하고 잿빛 하늘에 휘갈겨 놓은 희미한 구름 같기만 하다. 그저 열심히 절대적인 시간에 종속되지 않고 내 생각을 탄력적으로 조절해나가면서 젊음을 더 가열하게 충전해 놓은 상태를 유지하면서, 규정도 없는 작품 세계를 반복적으로 유지하면, 나도 괴테의 하수인 정도는 될 수 있으려나. 괴테의 하수인이 되려고 글을 썼던가, 생각해 보면 모든 것은 욕망의 술수 때문인 것 같다. 욕망이 인생을 그르치는 걸 당신은 생방으로 보고 있다.


나는 글을 한 인간의 상을 대표하는 커다란 축이라고 생각한다. 그 글은 실로 깊고 비좁은 마음의 세계로 표현해 내긴 힘들지만, 이런 글 말하자면 내 마음속의 어떤 부분 - 건드리고 싶지 않거나 숨기고 싶은 - 이 나를 자꾸만 움츠려 들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이야말로 요즘의 나의 생활과 정말로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솔직하게 털어놔야지,라고 각오했던 다짐조차 잊어버리고 또 만연체로 긴 문장을 당신의 폐 건강을 - 긴 호흡의 글 - 해쳐가면서까지 늘어놓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답변을 던지는 것도 근본적인 이유가 아닌 기묘한 사유에 해당될지는 모른다. 이 공간이 그저 편안하고 내 마음대로 내 감수성의 폭만큼을 담아낼 수 있는 공간이기에 그냥 적어내는 것뿐일지도 모르니. 어쩌면 이것은 마음의 지령이다. 지금 이 순간 내 방에 혼자 앉아서,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 이 고독한 책상 앞에 앉아서 무엇이든 쓰고 싶다는 생각이 찾아와서 일기인지 산문인지를 구별하기 힘든, 이곳에 잠시 멈춰 선 어떤 생각을 꺼내보고 싶었다는 게 전부랄까. 그러니 의미가 담기거나 사상을 표현하거나 아름다운 문체가 담긴 그런 시적인 글을 기대하거나, 어떤 중차대한 정보가 숨어있을 거라고 기대했다면 이것은 당신의 기대를 무참히 무너뜨리고 말 것이다.


당신은 왜 이 글을 읽고 있는가. 그저 요즘 내가 읽고 있는 책, 그 책에 대한 나의 느낌이 궁금해서 클릭하거나 여기까지 읽는데 성공했는가? 아니라면 그저 우연히 이 글이 블로그나 브런치 최신 피드에 떴기 때문인가. 읽다 보니 어떻게 해서 여기까지 당도하게 되었는가. 당신이 생각하는 글이란 무엇인지 나는 궁금하기만 하다.


사실 내가 의도했던 것은 글을 쓰면서 내 안에서 사라져 버린 어떤 창작에 대한 굳은 결의 따위를 찾고 싶다는 거였다. 요즘의 나의 생활은 실로 단조롭고 단순할 반복의 연속일 뿐이다. 재택근무에 돌입한 이후로, 오히려 일의 집중도는 더 증가하고 그에 따라 생산성도 비약적으로 증가해서 평상시 회사에서 짜내는 양보다 훨씬 양질의 소스코드를 생산해 내고 있지만, 그런 성공적인 결과를 놓고도 나는 불만족스럽다. 내가 현실적인 것들과 진지하게 협상에 나섰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나는 변화를 추구하고 낯선 경험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게 버크만 진단에도 그것이 분명하게 검증됐지만, 나는 진단 결과와는 상관없이, 이상적인 목표 지점과는 다른 방향으로, 나이 들어버린 나의 인격과 적당하게 타협에 나서버린 것이다. 게다가 나는 그 협상 테이블을 스스로 차려버렸다. 그러니 이제 내가 원하는 삶이 진정으로 무엇인지 이해하기 힘든 지경까지 오고 만 것이다.


요즘의 나의 생활은 대체로 이렇다. 아침에 8시 정도에 일어나서 9시부터 업무가 시작되면 보통 6시에서 7시까지는 내 방에 처박혀서 오직 프로그램만 짠다. 외부와 완벽하게 격리된 채로 말이다. 심지어는 아내도 나에게 말을 걸어오지 않는다. 내 방문은 굳게 입을 다문 채 침묵을 유지한다. 모든 업무는 디지털의 체계로 흡수된다. 개발 툴과 업무 공유 시스템, 커뮤니케이션 시스템, 모두 대인 접촉 없이 컴퓨터 하나로 모든 작업이 원활하게 돌아가는 것이다.


나머지 일에서 해방된 시간엔 책을 읽는다. 고도의 집중을 다해서 책을 읽는다. 주로 고전문학 위주로 책을 읽는데, 보통 하루에 한 권 정도를 완독하는 편이다. 완독하게 되면 간단하게 블로그에 리뷰를 남긴다. 서평이라고 굳이 나의 결과를 높여 부르고 싶진 않다. 그저 느낌과 별점을 매기는 정도다. 어쩌면 별점은 작가를 맥이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어쨌든 그 흐름을 오래도록 유지하고 싶다. 한 달에 30권 정도의 책을 읽는 상태를 죽을 때까지 유지하고 싶다면 욕심일까.


그렇게 나의 하루는 회사 일과 독서 두 가지로 양분되는데, 그 사이로 글이 비집고 들어올 구석이 없다. 그저 간단하게 책의 기록을 남기는 게 전부다. 개인의 신변잡기나 일상을 기록하는 일조차 큰 각오를 해야 하는데, 창의적인 소설이나, 일상에서 경험한 일들에서 철학적인 사유를 남기는 글은 더욱 쓰기 곤란한 것이다.


결국 모든 것은 에너지의 문제며 자원의 배분 문제다. 세상은 물리의 법칙을 따라 모든 물질은 대체로 어지러운 상태, 혼란스러운 상태로 돌아간다는, 그러니까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형태로 변해간다는 데, 그 원리에 따르면 나의 글 역시 점점 엔트로피가 증가된 형태로 변질될 공산이 클 테니, 내가 숙원 하는 완성된 글의 형태를 갖추긴 점점 어려워진다는 얘기가 아닐지.


쓰다 보니 괜히 글자만 키워놓은 꼴이 됐다. 여기까지 읽어준 당신에게 경의를 표할 뿐이다. 역시 오늘도 실패다.


내가 선호하는 것, 흥미


평상시 나의 행동


나의 욕구


욕구가 충족되지 않았을 때 스트레스 반응


나는 내향적이며 계획적이며 관계 지향적인 인간이었다.


역시 문학인이 되어야 했다. ㅠㅠ


매거진의 이전글 공대생의 심야서재의 2022년 결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