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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대생의 심야서재 Jan 29. 2023

돈 받고 글을 씁니다.

2023년 일간 공심 구독자 모집


글에는 쓰는 사람의 정신이 담겨 있다. 정신은 대체로 자기만이 이해할 수 있는 폐쇄적인 구조를 갖추고 있다. 그것의 핵은 내 마음속 일지, 머릿속일지 알 길 없지만 어쨌든 어딘가 분명히 새겨져 있다. 그걸 발견하고 꺼내는 작업, 그러니까 쓰는 행위를 통해서 바깥으로 표출하는 일이 글쓰기다. 하지만 그 작업은 고되고 표현은 늘 한계에 직면한다. 한계를 돌파하는 일은 꾸준히 무던하게 달팽이처럼 1밀리미터씩 진보하는 방법(꾸준하게 쓰기)을 교과서적으로 모두가 추천하는 편이지만, 그렇게 해서 달라진 점이 무엇인지(성장)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


나는 아마추어에 여전히 머물고 있지만 어떤 형태로는 쓰는 행위는 멈추지 않고 있다. 게다가 글쓰기를 통해서 먹고사는 처지도 아닌데도 글을 쓴다. 그런데 기묘하다. 글을 잘 쓰면 어디서든 요긴하게 써먹을 수 있다. 어떤 방식으로든 어디서든 나는 쓰는 행위를 멈추지 않고 있다. 


회사에서는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장인이다. 나는 스스로를 장인이라고 인정하는 편이다. 일못할러가 25년 넘게 잘리지 않고 버틸 수 있는 원동력에는 어쩌면 재능보다 그 기간 동안 한 분야에만 담금질한 덕분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오직 소프트웨어 만드는 일에만 내 열정을 투자하지 않았다. 일종의 외도를 한 셈이라고 봐야 할까? 소프트웨어를 만들면서도 개발자들이라면 거의 모두가 기피하는 글쓰기에도 관심을 가졌다. 회사에서 일하면서 코드만 만진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회사에서도 글쓰기는 꽤 여러 방면에서 활용되는 편이니까. 


나는 업무적으로 글쓰기를 활용했다. 예를 들어, 정부에서 투자를 받기 위해 쓰는 제안서나 사업계획서도 글쓰기 영역에 속한다. 이메일이나 보고서 작성도 글쓰기 영역이 아닌가. 게다가 슬랙의 채팅 메시지까지 글쓰기다. 중요한 것은 그 분야에서 성과를 내는 일이다. 어떤 일에 내 시간을 투자한다는 것, 그것에는 성과라는 소득이 반드시 따라다녀야 한다. 성과를 내지 못하면 해당 분야에서 도태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나는 새롭게 뛰어든 일에서 성과를 냈다.


그래, 어쩌면 나는 폴리매스라고 부르는 것이 마땅하겠다. 폴리매스는 여러 분야에 걸쳐서 두루두루 폭넓은 지식을 갖고 그 분야에 자신의 재능을 발휘하여 성과를 내는 사람을 일컫는다. 한 분야에서 깊은 지식을 보유하는 것보다, 여러 방면, 말하자면 서로 관련 없는 분야의 지식을 기르고, 그것을 서로 연결시키고 나아가 새로운 아이디어나 방법론을 창출하는 사람을 이끌어가기도 한다. 내가 폴리매스일지는 모르겠지만, 폴리매스가 추구하는 철학대로 일하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맞는 것 같기도 하다.


나는 폴리매스일까?


나는 소프트웨어를 만든다. 소프트웨어의 바탕엔 소스코드라는 텍스트가 집합된 어떤 총체적인 구조가 존재한다. 글 역시 텍스트의 집합이다. 하지만 소스코드와 글은 모두 구조적인 아름다움, 치밀한 논리, 방대한 분량, 전혀 다른 결과물을 탄생시키는 원리, 생각의 깊은 숙성, 글자의 예술, 이런 공통적인 존재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나는 단순히 쓰는 행위에만 집착하지 않는다. 다양한 분야를 폭넓게 드나들며, 그 세계에서 배운, 그러니까 도구들을 소프트웨어 만드는 일과 글 쓰는 일에 투입했다. 짜고(소프트웨어) 쓰는(글쓰기) 일에 효율을 내기 위해서다. 


어떤 분야든 하나의 분야를 정복하면 다음 분야로 넘어가는 일은 비교적 쉽다. 여기서 정복은 깊게 완전히 정복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완전히, 혹은 완벽하게, 도 추상적이다. 정복이라는 것도 상대적이다. 사람에게 모두 다르다. 자신이 생각하는 정복의 기준도 다르다. 나에게 정복은 그저 밥 먹고 사는 정도에 불과하다.


예컨대, 나는 여러 분야의 일에 도전할 때마다 도구를 꽤나 잘 활용하는 인간이었다고 할까. 태생적으로 힘이 없으면 도구라도 잘 쓸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경쟁에서 낙오하지 않고 입에 풀칠이라도 할 수 있을 테니까. 그래서 나는 소프트웨어를 만들면서도 온갖 도구에 의존했고, 회사 일이 아닌 개인 범주의 일에서도 도구를 썼다. 노션을 배운 이유도, 스크리브너를 통해 원고를 작성한 일도, 독서 후에 남은 밑줄과 생각들을 남긴 구글 킵도, 메모를 통해 생각을 끄집어내는 제텔카스텐 기법 같은 것, 그 밖의 구글 설문지, 캔바, 구독하는 미디엄까지 모두가 도구에 해당된다. 도구는 물론 거의 물리적인 형태를 갖추고 있다. 외관이 존재한다는 얘기다. 그 도구를 이용해서 뭔가를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글은 원천이 된다. 글자가 없이는 아무것도 생산해 낼 수 없다. 내가 지금 쓰는 글도 스크리브너와 맞춤법 검사기라는 도구를 통해 몇 차례 검증될 것이다. 또한 마지막엔 브런치 에디터에서 보기 좋게 다듬어질 것이다. 모두가 도구가 작용한 덕분이다. 내 머리를 짜내는 일도 의식을 걸러내는 머릿속의 도구가 작용했기 때문이다. 내가 멈추지 않고 소득을 내지 못해도 글을 쓸 수 있는 기반이 되는 것은 생각을 표현해 내기 위한 도구라는 기법을 활용하기 때문이다.


쓴다는 것, 정의하기 힘들다. 여전히 쓰고 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 의미는 무참하게 살육당한다. 나 자신이 주도하는, 내가 주인공인 무대에서 내 글은 찬탈을 당하는 처지에 놓여 있다. 내 글은 구원이 필요한 걸까?


나는 쓴다. 쓰지만 방향성의 정립에 대해서 아주 오랫동안 고민하며 주저하기도 했다. 물론 그 고민에 역사적이거나 기념비적인 어떤 철학적 잣대를 세우긴 곤란하다. 이것은 취미적인 걸까. 관심의 다른 표현인 걸까. 살아가고자 하는 내 삶의 역동성을 잠시 낚아채려는 얄팍한 술수에 불과한 걸까. 살아내기 위한 본능인 걸까.


나의 정체성은 어디에 있을까. 쓰는 사람, 쓰지 않는 사람. 주관을 가진 사람, 주관 없이 대충대충 사는 사람. 나는 이곳에도 있고, 저곳에도 있다. 물론 대상은 정의되지 않은 정신이다. 나는 정신적으로 어디든 닿을 수 있다. 랜선 따위에 의지해서 그런 물결을 타고 어디든 흘러간다는 게 아니다. 그저 개념적으로 나는 무엇에든 관심을 가질 수 있고, 잠시 그것에게 내 영혼을 결탁시킨 채, 내가 내가 아닌 것처럼 행세가 가능하다는 얘기다. 이런 방법으로 나는 완벽한 타인이 될 수 있을까. 그것이 구현된다면 나는 물리적인 것을 뛰어넘은 존재가 되는 걸까.


이런 문장들, 꽤 추상적이고 주관적이다. 객관적이면서도 포괄적인 그러니까 아주 이해하기 쉬운 그런 글과 전혀 닮아있지 않다. 내 글은 뭔가를 숨긴다. 숨기려는 것은 내 허점이자, 약점이다, 감정이 여러 갈래로 분화된 것들의 모든 모순점들이 향한 곳은 심연, 불완전한 사고의 핵이다. 그래, 나는 그것을 감추고 싶으면서도 또 드러내고 싶은 양가적 감정에 휩싸여 있다.


이 글을 뭐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 역시 의식의 흐름대로, 오고 가는 생각 따위를 흡수하지 못하거나 처리하지 못한 몹쓸 마음의 공정 탓에 나는 이 공간에 무위를 겹겹이 쌓아 올리고 있다. 허술한 바벨탑, 언젠가 쓰러지고 마는 생각의 허약한 갈래들.


그래, 나는 이제 결론에 도달한다. 내가 원하는 글, 쓰고 싶은 글은 나의 허위를 감춘, 나르키소스적인 망상을 그럴싸하게 포장한, 심연의 세계를 삶의 외면으로 길어 올리는 일이다. 그래서 어렵고 이해하기 힘들고 무한한 가능성, 어떻게 해석하든 읽는 사람의 자유의지에 달린, 무색이지만 유취의 형태를 갖춘 것이 내 글이다.




이런 글을 한 달 동안 보내드리려고 합니다. 논픽션을 기반으로(주제) 하지만 아마도 대부분 소설의 형태가 될 것입니다.  시를 쓰는 것도 좋아합니다. 어쩌면 산문시와 시의 색채가 혼합되어 저라는 인간을 더욱 집요하게 감싸고 둘러싼, 상상이 날조한 세계를 창조하는 것, 이러한 저의 추상적 세계관을 글쓰기로 곤고하게 구축하여 그것을 보내드리려고 합니다. 제 글이 궁금한 분들이라면 일간 공심을 구독해 주시기 바랍니다. 월 구독료는 만 원입니다. 3월부터 연재를 시작합니다. 한 달간 연재를 하고 한 달은 다시 쉬고 그다음 달에 연재하는 방식으로 일간 공심을 진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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