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단편 소설
나는 인간 지우개다. 내 손에 닿는 것은 완벽하게 흔적도 없이 말살시켜 버린다. 어떤 일이든 의뢰만 들어오면 나는 그 물건을 마치 단 한 번도 인간의 손에 닿은 적 없는 것처럼 새 물건으로 둔갑시켜 버린다. 말하자면 옛것의 더러움들은 파괴시키고 새것으로 깔끔하게 치환시켜 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나에겐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인간 지우개라는 것은 내 손이 아니라 사실 오른 손가락 검지에만 해당되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내 오른손 검지는 타노스의 손이나 마찬가지다. 다만 손가락을 툭 튕기는 게 아니라 뭔가에 대고 슬슬, 아니 벅벅 문질러야 한다. 그렇게 한참 땀을 흘려가며 애써야 내 손가락 끄트머리가 가진 신적이 능력이 증명된다.
하지만 지금까지 나에겐 단 한 건도 의뢰가 들어온 적이 없다. 왜냐하면 나의 능력은 사람들에게 알려진 사실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나는 골방에 숨어 들어서 오직 나만 나의 재능을 혼자서 찬양하고 뽐내고 지금도 여전히 언젠가 쓸모가 생길 거라며, 손가락 끝을 갈고닦고 있을 뿐이다. 다만 현재는 오른 손가락 검지를 보호하기 위해 손가락 보호대를 씌워주거나 생각나는 대로 올리브오일이나 코코넛오일을 바르며 윤기를 내고 있을 뿐이다. 후일을 도모하자며.
나는 워낙에 소심한 사람이라, 내 재능이 사람들에게 시기심을 자아낼 것 같아서 얌전하게 명상 체어에 앉아서 기도만 할 뿐이다. 제발 나의 재능을 알아봐 주고 불러줬으면 좋겠다고…
어떻게 내 능력을 알아본 것인지 아니 알려진 것인지, 몇 차례 의뢰가 들어온 적은 있었다. 예를 들어, 고독사한 누군가의 집을 말끔하게 이전의 상태로 돌려달라는 것과 같은… 하지만 나는 그 일을 거부했다. 아무리 내 능력이 마치 이전으로 시간을 되감는 일처럼 신비로운 것이라고는 하지만, 죽은 사람의 집을 건드리는 건 어쩐지 꺼림칙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손가락 하나로 커다란 공간을 지우기엔 역부족이 아닌가. 또한 그런 일은 전문적으로 행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아무 일이나 하지 않는다. 기분이 내키는 일, 일을 마치고 나서 상쾌한 일만 가려하자는 철학을 갖고 있다.
그러다, 이대로 늙다간 단 한 번도 내 능력을 세상에 선보이지 못하고 죽게 되겠구나 하며 신세한탄에 빠진 날, 한 남자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그 남자는 누군가의 대리인이었다. 막대한 재산을 사회에 환원한 어떤 늙은 남자의 법정 대리인? 뭐 그런 거였다. 그 남자는 자신이 누군가의 하수인이 아니라며 단순히 부탁받은 일을 대신 처리하고 있다며, 자신이 나에게 요청할 일이란 도서관에 기증할 책들을 깔끔하게 지우는 일이라고 말했다. 오직 그 말이 전부였다.
책? 뭘 지우라는 거야? 어쨌든 내가, 아니 소중한 내 오른손 검지가 인간 지우개인 건 사실이고, 책을 지우는 일 따위는 시체의 외상 흔적을 지우는 일이나 고독사한 집을 지우는 일보다는 훨씬 수월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게다가 곤궁해진 가계를 고려했을 때 수락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 하수인, 아니 대리인의 차를 타고 우린 어딘가로 이동하기로 했다. 차에 타자마자 그들은 내 입에 재갈을 물리고 귀에는 노이즈 캔슬링 헤드폰을 걸치고 눈에는 검은색 안대를 씌웠다. 헉, 이것은 완전히 납치당하는 꼴이었다. 굳이 이렇게까지 보안을 강화할 필요가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다가 그만 나는 잠이 들고 말았다. 잠에서 깨어나자 나는 도서관? 아니 누군가의 장서관이라고 연상되는 곳에 앉아 있었다. 재갈과 안대도 노이즈 캔슬링 헤드폰도 모두 사라져 있었다.
나는 천정에 붙은 CCTV에 윙크를 했다. 왜 그렇게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하면 누군가 이쪽으로 오지 득달같이 달려오지 않을까 내심 기대했던 것 같다. 예상대로 그 대리인이라는 남자가 5분 후에 도착해서는 내가 해야 할 일감들에 대해 짧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지워!” 남자가 명령했다.
“뭘 지워?” 나도 똑같이 앵무새처럼 대답했다.
“지우라고, 넌 지우는 쪽의 꽤 전문가라며. 그러니 모조리 지우라고” 남자가 비웃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뭘 지우라는 거야?” 내가 다시 물었다.
“말해야 알아먹어? 책을 한 권씩 꺼내서 밑줄이든 메모든 완전히 말살시켜 버리라고!”
“근데 왜 당신 아까부터 반말이야?” 내가 따지듯 물었다.
“아 제가 반말을 했습니까? 죄송합니다. 아무튼 모조리 지워버리라고 네 재능을 한 번 증명해 봐”라고 다시 남자가 반말로 말했다.
“알았어” 나도 똑같이 응수해 줬다.
남자는 그렇게 말하더니 양복 속주머니에서 빨간 사과를 하나 꺼냈다. 아주 탐스럽게 생긴 사과였다. 그리곤 남자는 양복 안감에 대고 몇 번을 벅벅 문지른 다음 크게 한 입 베어 물었다. 그리곤 침을 튀기면서 쩝쩝 소리와 함께 사과를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남자는 나에게 “사과 하나 줄까?”라고 물었으나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하지 않으려다가 한 마디만 했다. “너나 실컷 처먹어"라고…
그리곤 잠시 고민을 하다가 슬쩍 일어섰다. 만족스러운 듯이 두 손을 감싸곤 여러 번 슥슥 비벼댔다. 그리고 요리 셰프처럼 두 손으로 연속으로 박수 소리를 내가며 공중에 먼지를 털어냈다. 슬슬 시작해 볼까!
서고 앞으로 가서 한 권씩 책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한 장씩 한 장씩 천천히 넘기며 밑줄이든 메모든 뭔가를 찾아내려고 애쓰다가 갑자기 짜증이 치밀어 올라, 내 고결한 재능을 이런 쓸데없는 곳에 소모하다니,라는 생각이 들어, 대충대충 훑어보는 것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나중엔 그것도 귀찮아져서 훌훌 넘기다가 밑줄이 그어진 곳을 찾아내곤 지우개처럼 생긴, 아니 지우개와 똑같이 작동하는 오른손 검지를 책에 대고 몇 차례 문질렀다. 밑줄은 말끔하게 제압되었다. 밑줄이건 메모 건 내 손가락을 당해 내는 건 없었다.
한 권의 작업을 마치니 기분이 뿌듯해졌으나 뭔가 일이 잘못되어가고 있음을 직감했다. 맙소사, 원래는 아무 일이 없어야 하는데, 뭔가 기묘한 방향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었던 것이다. 오른손 검지 끝에 남은 지문이 거의 사라진 것이었다. 말하자면 손가락 끝이 조금 닳았다고 할까? 하지만 그것은 그저 느낌에 불과할 거라고 믿었다. 작업을 마치고 다음 책을 꺼냈다. 이번에는 연필이 아니라 볼펜으로 덕지덕지 낙서가 된 페이지를 발견했다. 시험 삼아 손가락을 슬쩍 비벼봤다. 느낌인 지는 모르겠으나 아까보다 더 지문이 훼손되어 있었다. 아뿔싸, 나는 늙은 남자였던 것이다. 이렇게 하다간 내 손가락은 닳아서 없어질 게 분명하다. 마지막으로 내 능력을 꽃피울 자리에서 나라는 존재가 사라질지도 모른다.
나는 뒤를 슬쩍 돌아봤다. 남자의 동태를 살펴야 했던 것이다. 남자는 사과 한 개를 다 먹고 이제 두 번째 사과로 넘어가고 있었다.
"왜 사과 하나 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