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나의 일상은 실로 단순하기 짝이 없다. 업무와 휴식, 그리고 또 업무, 이런 단순한 패턴이 어제와 오늘 다를 바 없이 근면하게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반복적으로 매일 비슷한 하루가 이어져도 거기엔 뭔가 다른 점이 있다. 그 덕분에 나는 삶을 다르게 산다고 느끼는 것이다.
재택근무 덕분에 회사에 출근하지 않지만, 이제 1년 가까이 정착된 재택근무는 마치 회사에서 일했던 습관처럼 안정세를 보인다. 출근하지 않기 때문에 3~4시간의 여유가 생겼다. 부스스한 얼굴로 눈곱도 떼지 않고 모니터 앞에 앉아, 주식 시세를 하염없이 바라보는 넋 나간 투자자처럼 모니터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게 하루의 선포를 알리는데, 그렇게 멍텅구리 같은 자세로 앉아서 업무를 시작해도 손가락질하는 인간은 주위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가끔 아내가 지나가다 한심하다는 눈길로 쳐다보긴 하지만, 어쩌면 그것도 내 기분일지도 모른다.
바쁘면서도 한가롭다면 그 생각은 내 착각에 불과할까? 아무튼 바쁘면서도 한가롭다. 아니 평안하다. 바쁘지만 치열하게 한가한 시간을 보낸다. 나쁜 일도 좋은 일도 없이 감정의 굴곡 없이 매일 비슷한 하루를 반복한다. 화를 내는 일도 지나치게 기쁜 일도 없다. 모든 일이 지나치게 평범하고 고요하게 흐를 뿐이다.
이런 삶을 살다 보니 에너지를 쓰는 일에 서툴러졌다. 예전 같으면 한꺼번에 여러 일을 다재다능한 멀티플레이어처럼 해냈을 텐데(라고 쓰고 욕심이었다고 읽는다.), 지금은 자신 없다. 체력도 줄어들었고 게다가 시야도 좁아졌다. 실제로 노안이다! 보이는 것도 느끼는 것도 인식하는 것도 점점 반경이 줄어든다. 체력 탓일까? 선택과 집중이라는 명제 때문일까. 하고 싶은 것과 현실적으로 해낼 수 있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그것이 내 삶을 단순하게 이끌고 있다.
일, 요즘은 묘하게도 일이 즐거워졌다. 그렇게 떠나고 싶어 했던 회사를 사랑하게 되었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진실이 아닐 테고, 아무튼 재택근무 덕분인지, chatGPT 덕분인지, 성실한 직장인이라는 타이틀을 지켜야 한다는 의식 때문인지, 아무튼 일이 기묘하게도 재미있어졌다. 심지어, 그렇게 싫어하던 수학에 흥미가 생길 정도다. 사실 프로그래밍과 수학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긴 하지만, 나는 내추럴 수포자라 그동안 수학이 꽤 높은 담벼락이었는데, chatGPT와 Cluade3 덕분에 수학을 이해하게 되었으니... 이거 뭐 이야기가 갑자기 인공지능으로 넘어가버린 것 같긴 한데, 잡문에 가까운 내 글의 성격상 이런 화제를 끌어들여오는 것도 나쁘진 않다. 어쩌면 일이 재미있어진 이유는 일을 하는 방식 자체를 바꿨기 때문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진단해 본다.
그렇다고 내가 일벌레로 탈피한 것은 아니다. 남들이 나를 보고 평가하는 방법으로는 글밖에 없으니 이 빈약한 정보로는 내가 일벌레로 충분히 비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그렇다고 고성과자라는 사실은 부정하고 싶다. 지독하게 일만 하는 일벌레와 높은 성과는 관계가 없으니까. 나는 그저 회사의 작은 톱니바퀴에 불과하다. 그 인식은 어제나 그제나 오늘도 변함없다. 주어진 일을 얼간이처럼 하지 않고 조금 똑똑, 아니 얍삽하게 해내는 잔기술을 익히고 있다는 게 더 맞는 말인 것 같다.
일은 꽤 실용적인 것이다. 실용적이라는 말은 용도가 정해져 있다는 뜻이겠지. 용도가 없는 물건은 폐기처분 당한다. 다행히 나는 아직까지 실용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 덕분에 먹고사는 데 지장 없으니 굉장히 행복한 일이라는 걸 새삼 느낀다. 나는 행복한가? 행복의 정의를 생각해 본다. 행복은 왜,가 아니라 어떻게,가 정답인 것 같다. 어떻게 세상을 바라볼 것이냐에 따라 행복의 기준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고 믿는다. 회사에 충성하는 것이 아닌 일 자체에 매진하고 그 일에 집중하는 것이 괴로움도 고통도 쓰디쓴 패배감조차 잊는 일이라는 것을 뒤늦게 일에 재미를 느끼며 깨달은 사실이랄까. 24시간이 2시간처럼 흐른다면 나는 꽤 행복한 시절을 보내고 있는 게 아닌가,라고 평가하고 싶다.
물론 죽도록 일만 하진 않는다.(그런데 베트남에서 3일을 밤새고 일했다.) 취미생활도 그럭저럭 펼치는 중이다. 몇 달 전부터 새롭게 시작한 레고에 빠져서 요즘은 여유시간만 생기면 책상 위에 브릭과 조립설명서를 펼쳐놓고 열심히 무언가를 만든다. 그 덕분에 독서생활에 차질을 빚긴 했지만, 어느 일이든 관심이 쏠리는 쪽에 마음을 다하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레고를 딱히 버릴 취미라고 무시하고 싶진 않다. 어른에게 어울리지 않는 취미라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레고가 가진 매력을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는 일이 레고 조립일지도...
레고와 독서는 물론 성격상 일이 아니다. 또한 일이라고 평가할 수도 간주할 수도 없다. 레고와 독서가 실용적인 것으로 평가받으려면 뭔가 생산적인 활동이나 부(수입)와 연관되어야 할 것 같은데, 그렇게 되는 일은 원하지 않는다. 어떤 활동이든 이제 실용적이라는 단어와 연관시키고 싶지 않다. 30년 가까이 실용적인 일에만 매진했으면 이제 충분하지 않은가. 목적이 없어도 용도가 정해지지 않아도 그저 지속적으로 오래 할 수 있는, 그러니까 오직 재미만 추구할 수 있는 일에 빠져드는 것이야말로 이 나이(?)에 어울리는 일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일까, 요즘은 실용적인 것들을 요구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반갑지 않다. 강의, 영상 촬영, 책 쓰기 등등 목적만 강요하는 활동, 결과를 거두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치이며 사는 삶은 더 이상 구경하고 싶지 않다. 그런 것들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지고 싶다. 그런데 대체 일이 재미있고 관심이 가는 이유는 무엇인지 도통 이해할 수 없다.
이 글은 그저 의식의 흐름대로 쓴 글일 뿐이다. 이 글에서 실용적인 의미를 찾고자 한다면 당신은 번지수를 잘못짚은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