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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대생의 심야서재 Jun 01. 2024

불은 꺼져간다. 불 밑엔 수많은 부조리들이 깔려 있다.

잊을만하면 혹은 기억에서 점점 뭔가가 잊혀가면 나는 글을 쓴다. 누군가에게 나를 보여주려는 근원적인 욕망이 점잖게 앉아있다가, 에너지를 사로잡고 들끓기 시작하면 그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무작정 써 내려가곤 한다. 그것은 꽤 즉흥적인 움직임이다. 어쩌면 어떤 틀에 맞춰진 정교한 쇼맨쉽일지도 모르겠다. 그 쇼에 취해서 이리저리 글자의 율동에 따라 어떤 심각한 잘못을 저지르는 기분이 들지만, 멈춤 없이 진보해야 한다. 


욕망은 단순하다. 쓰는 방식으로 보여준다. 오직 하나의 명제만 존재한다. 보여주려는 대상은 바로 나다. 나는 지금 꽤 미적지근한 기분에 취해있다. 그래서 탄산수를 냉장고에 꺼내곤 투명한 유리잔에 반 병을 쏟아붓는다. 아내는 이미 자신만의 방에서 고요히 은거 중이다. 아마도 잠을 자고 있겠지. 나는 아내가 방에서 무엇을 하다 잠들었는지 잘 모른다. 부부에게도 각자의 사생활이 있는 것이다. 나는 아내의 투명한 고요함을 지켜주기 위해서 유리잔에 탄산수와 디카페인 원두를 탈탈 털어 넣고 붉은색의 실리콘 티스푼으로 휘휘 젓는다. 하얀 거품이 북적거리며 솟아오를 때까지 숨을 참고 표정을 내리누르고 그리고 거품의 태동을 구경한다. 마지막으로 마치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키는 신의 최종적인 몸짓처럼 커다란 얼음덩이를 하나 툭 떨어뜨린다. 그리고 속으로 한마디를 걸친다. 이건 하이볼이야! 암암 그렇게 생각하면 그만이라고. 그리고 아내는 자신만의 방에서 자신만의 테이블에 앉아 자신만의 시간을 꾸민다.


나는 뭔가를 보여주려 노력했다. 노력은 내밀했고 나름의 밀도를 가졌다. 내가 꾸며낸 말들은 어딘가를 어기적저기적 걸어 다녔다. 그러나 그 보여주려던 하나의 장면, 아니 내 마음속에서 스쳐 지나간, 뭔가를 건드린 어떤 흔적들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흘러갔는지 어슴푸레할 뿐이다.


보여주려는 욕망은 쓴다는 것으로 대체되는데, 쓴다는 것과 보여준다는 것의 차이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쓰면서 보여준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갖는 걸까. 어떻게 써야 제대로 보여줄 수 있을까. 제대로라는 말에는 얼마나 깊고 맑고 푸르름이 잠재되어 있을까.


쓰면서 나를 보여준다? 어불성설이다. 대체 나에겐 무엇이 있고 무엇이 없을까? 있다가도 없어지고 없는 것들은 계속 없는 것으로 남아 있다. 없는 것들은 있는 것들로 절대 대체되지 않는다. 그 속엔 원래 아무것도 없는 완벽하게 투명한 무의 상태일 테니. 그런 무의 관념은 그저 허술한 장치에 속하는 것일 뿐이다. 거대하게 부풀어가는 관념의 덩어리들을 지켜보면서 나는 그 세계를 보여주려고 의미 없는 향유를 거칠게 뿌려대고 있는 게 아닌가.


불은 꺼져간다. 불 밑엔 수많은 부조리들이 깔려 있다. 차가운 탄산수로 그 기운을 잠재워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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