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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대생의 심야서재 Jul 07. 2024

하나의 공간과 시간의 비선형적인 흐름

《여기서(Here)》


* 읽고 쓰고 표현하기의 감각을 글로 쓰는 공간입니다.


《여기서(Here)》 2017년에 출간된 그래픽 노블이다.


1.

리처드 맥과이어는 《여기서(Here)》에서 비선형적인 시간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이 그래픽 노블에서 중심은 인간이 아니라 한 공간, 장소다. 이야기는 변칙적으로 마치 끊어진 플롯처럼 제멋대로 변주한다. 1차원적인 시간 흐름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이야기에 리듬을 맞추기 힘들다. 지구상에 사는 인간 중에서 시간을 2차원 이상으로 초월하는 사람은 없을 테지만…


이야기는 시간을 불규칙적으로 서사한다. 야만적인 인디언이 살던 1600년대로 이동하다가도 다시 1943년의 거실로 이동하기도 한다. 게다가 2313년, 어쩌면 인간이 지구에서 사라졌을지도 모를 순간까지 훌쩍 뛰어넘는다. 그러나 카메라는 언제나 한 장소를 고정된 채 비춘다. 그 장소는 숲이기도 하고, 공룡이 출현하던 백악기이기도 하고, 인디언이 사냥하던 숲이기도 했으며, 부자간의 정치싸움이 벌어지는 공간이기도 하다.


다만, 그 공간엔 가족이 있다. 남녀가 만나 부부가 되고 아이들이 태어난다. 거실엔 크리스마스트리가 세워지고 선물이 나타나며 파티가 펼쳐지기도 한다. 그러다 사랑하는 사람이 아파 쓰러지기도 하고 그들 간의 다툼이 일어난다. 그리고 페이드아웃이 된다. 시간은 여기저기로 뛰어넘는다. 2017년에서 1622년으로, 다시 1869년으로 수없이 많은 연도가 페이지에 펼쳐진다. 한 페이지에 너 다섯 개의 연도가 동시에 출현하기도 한다. 


다시 말하자면 서사의 중심은 단 하나의 공간이다. 한 공간에서 일어난 다양한 사건들을 한눈에 본다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 따라서 시간은 사건에 따라 절편 되어 있다. 시간은 의미가 없다. 독자는 오직 공간에 일어난 변화에 적응해야 할 뿐이다.


시간은 무엇일까.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루프 양자중력 이론'을 만든 카를로 로벨리의 말처럼, 시간은 그저 모든 사건들이 그래프처럼 서로 연결된 개념에 불과할까. 사건의 인과성, 결정론 따위는 의미 없다. 사건을 중심으로 공간을 중심으로 시간이 배치된다. 시간은 사건들의 연속이라는 결론을 맺게 만든다. 시간은 이야기의 연속일지도 모른다.


나는 기원전 30억 년부터 미래의 22175년까지의 시간을 통과했다. 이 책을 통해서 지금, 여기, 이 공간이 얼마나 소중하고 이 순간이 얼마나 짧고 일시적인지 새삼스레 알게 됐다면…



2.

장마철이라지만 비 구경을 하기 힘들다. 어쩌면 줄곧 집안에 처박혀서 지내느라 바깥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인지하지 못해서 장마철이 아니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어떤 의미에서는 장마철과 나는 이렇다 할 관계를 맺고 있지 않다. 더위에서도 후텁지근한 습도에서도 한발 떨어져 있다. 


지금, 나는 내 방에 책상 앞에 앉아 글을 쓰고 있다. 가끔 온종일 이 방에 앉아 있으면 궤도가 없는 공간을 혼자 무심하게 이동하고 있다는 착각이 들기도 한다. 여러 생각이 무한한 생각의 핏줄기를 타고 지나다닌다. 선풍기 한 대가 외롭게 시원한 바람을 공급하고 있지만 작은 창에서는 질투라도 하듯이 바람이라는 외부자가 스민다. 


대부분의 하루는 기다란 원목 책상과 그 책상 위에 놓인 49인치 와이드 모니터 안의 내부에서 이루어진다. 이 책상과 슬라이드 책장이 놓인 이 방이 나의 본거지인 셈이다. 이곳에서 회사에서 지령을 받아 최대한 천천히, 하지만 효율을 최대 출력으로 높이며 일을 한다. 그 와중에 시간을 아주 크게 쪼개서 원고를 쓰고 이렇게 작은 균열을 내서 블로그에 올릴 글도 쓴다. 하루는 어제와 오늘 거의 비슷하다. 주말이든 평일이든 다를 바 없다. 단지 회사일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차이뿐이다. 생각이 여기에 있느냐, 저기에 있느냐, 그 차이일 뿐이다. 단지 타인 지향적인 삶을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을 뿐이다.


가끔 이렇게 개인적인 생활을 주제로 글을 쓰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생각을 하기도 한다. 그런 생각을 하면 책장에서 소설책 한 권을 뽑아들고 내가 아닌 타인의 생활로 관심을 돌린다. 


아, 그리고 거실 마샬 스피커에선 마침 류이치 사카모토의 Tong Poo가 나오는 중이다. 


https://youtu.be/2OAhagMUWlI?si=_hE-LNrirgr7EIU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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