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의 맛, 혹은 무색무취의 오후
글쓰기에는 두 가지 '생각'이 존재한다.
글쓰기에는 두 가지 '생각'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 첫째 생각은, '어떤 생각' 혹은 '무엇'을 생각하느냐다.
글을 쓰려고 책상 앞에 앉으면, 머릿속은 마치 텅 빈 진공 같다는 생각을 한다. 여기 이 암흑 속에 '무엇'을 그리고 '어떤 생각(소재와 내용, 주제 의식 같은 것들)'이 존재하는지, 애초에 유용할 만한 게 들어있기는 한 건지 알 수 없다. 어떤 날은 충만한 하루처럼 꽉 차 있지만, 어떤 날은 무의미한 택배 박스처럼 횅댕그렁하다. 일단 중요한 건 이 꽉 잠긴 문을 여는 행위 그 자체, 그러니까 '뭔가 있겠지'하는 막연한 기대감으로 더듬거리는 일이다. 대단한 성과를 거두겠다는 생각은 그다음이다. 어쩌면 영원히 다음으로 미뤄질지도 모르지만.
둘째는 '어떻게' 생각하느냐다. 사고방식이나 논리, 표현력이 해당된다. 첫째의 '어떤 생각'이 아무리 좋고 독창적이어도 그것을 논리적으로 구조화시키거나 구체적으로 모양을 빚지 못하면 무용지물이다. 독자에게 읽히는 글은 '어떻게'가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어떤 생각'을 조직하고 적절한 어휘나 문장으로 표현하고 또한 흐름을 매끄럽게 디자인해야 설득력이 올라간다.
그럼 나는 왜 두 가지 생각에 대해 언급했을까?
그것은 며칠 전 회사에서 벌어진 사건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다. 두 가지로 생각의 요건을 정리했다.
1. 어떤(무엇) 생각: 경쟁 프레젠테이션의 실패
2. 어떻게 생각: 그 실패를 어떻게 글로 쓸 것인가
프로젝트의 실패
6개월 넘게 프로젝트를 준비했다. 그 프로젝트는 어떤 기관과 긴밀하게 소통 끝에 만들어진 결과물이었다. 그러니까 그 결과물은 기관이 원한 청사진의 핵심이었다. 한 달에 2~3차례 담당자와 미팅을 진행했고 담당자의 피드백을 곧바로 반영했다. 계약은 물론 되지 않은 상태였지만, 계약까지 이어지는 데는 문제가 없으리라 판단하고 그 기능을 구현했다. 회사 입장에서도 내 입장에서도 미래에 대한 투자라고 할까.
우여곡절 끝에 용역 입찰 공고가 떴다. 요건은 우리 회사에 다소 유리했다. 총 다섯 군데의 회사에서 입찰에 응했다고 전해졌다. 그리고 지난주, 프레젠테이션에 발표자로서 참여했다. 발표는 그냥 의례적인 행사라고 생각했다. 예행연습 따위는 주니어 시절에나 경험하는 일이니, 발표 자료의 흐름만 익히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 건 기본이라고 믿었다. 발표는 무난했고 질의응답도 큰 문제는 없었다.
발표 다음 날 결과를 들었다. 예상치 못한 결과였다. 경쟁자? 혹은 복병이었을까? 생각하지도 못한 회사가 선정되었다는 통보를 들었다. 더 충격적인 것은 그 회사는 입찰가의 80%, 우리는 95%로 제안했다는 것이다. 어쩌면 1점이라는 미세한 차이가 선정과 탈락을 가른 것일지도 몰랐다.
다음 날, 전화벨이 울렸다.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가 기묘하게 낯설게 느껴졌다. 마치 질척한 뻘에서 들려오는 소리 같았다. '상무님... 다른 회사가 선정됐답니다...'라는 말 뒤에 몇 마디가 더 이어졌지만, 단조로운 박자처럼 느껴졌다. 그냥, 그런 거다. 세상일이란. 우리가 써낸 숫자는 95였고, 그들이 써낸 숫자는 80이었다고 했다. 15%라는 숫자의 간극이 그렇게나 거대했던가.
회사는 말이다. 보통 이런 상황을 놓고 영업을 한다. 담당자와 오랜 교감도 일종의 영업이겠지만, 회사는 가용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영업에 뛰어든다. 그것은 생존하기 위한 본능적인 절차이기 때문이다. 회사에는 'OB'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대거 포진되어 있다. 그들은 동굴 속에서 잠들다 깨어난 곰처럼, 중요한 프로젝트 철이 되면 어슬렁거리며 나타나지만 기민하게 움직인다. 그들이 정확히 뭘 공작하는지는 잘 모른다. 다만, 그들이 움직이고 나면 가끔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기도 하고, 때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뭐 나는 개발자니까, 그런 건 잘 모른다. 알아서 좋을 것도 없고.
탈락하고 보니, 온갖 감정이 밀려들었다. 책임자의 위치에서 나에게 쏟아질 비난, 충분히 대비하지 못했다는 비난이 난무할 것 같았다. 애지중지 키우던 화분이 창밖으로 떨어져 산산조각 난 것을 멍하니 바라보는 느낌이랄까. 물론 직접적으로 나를 비난한 사람은 없었다. 그것은 그저 내 육감일 뿐이었다.
실패한 원인은 무엇인가.
실패하면 원인을 분석하려 든다. 다음번에는 비슷한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다. 물론 실수가 실패를 만든 필연적인 원인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내 입장에서 따져볼 수 있는 것은 오직 실수뿐이다.
실패. 그러고 나니 이런저런 생각이 떠오른다. 마치 썰물 뒤 버려진 조개껍데기처럼. 우선, 내가 너무 게을렀던 건 아닐까. 직원들 책상 위의 오래된 서류 뭉치처럼, 프로젝트는 그렇게 방치되었던 건지도 모른다. 가끔은 잔소리꾼 시어머니처럼 시시콜콜 캐물었어야 했나. 발표 자료에 그동안 개발한 결과물을 간단하게 삽입하거나, 준비 과정을 담을 수 있지 않았을까.
둘째, 왜, 나는 예행연습을 하지 않았을까. 주니어 시절이 생각났다. 그때는 직원들과 모의 발표를 늘 진행했다. 예상 질문을 수집하고 간단명료하게 대답하도록 철저하게 사전에 연습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자료를 읽고 마음속으로 시뮬레이션만 했다. 안이했던 것이다.
셋째, 경쟁 상대의 정보를 제대로 수집하지 못했다. 기관의 담당자에게 물어보지 않아도 어쩌면 충분히 정보를 수집할 수 있다. AI가 있으니 이 사업에 뛰어들만한 업체 정보는 쉽게 찾아낼 수 있다. 만약 업체를 4~5군데 압축할 수 있었다면, 95%의 입찰가를 제시하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미래의 가능성을 보고 투자하는 사업인데, 80%와 95%는 얼마나 큰 간극이 있는 걸까. 역시 어리석었다.
감정의 출렁거림
사업에 실패하고 나서 나에게 찾아온 감정은 허탈감이었다. 6개월 넘게 진행한 과정이 공중으로 분해된 느낌. 그 분해되고 조각난 기분은 어떠한 자극으로도 회복되지 않았다. 그저 멍하게 하늘을 바라보며 큰 한숨을 쉬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은 없었다. 그때의 좌절감은 어떠한 긍정적인 감정으로도 채워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인간의 감정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바닥으로 꺼질 것 같은 패배감도 이유 없이 회복된다는 것이다. 나는 그 이유를 내면에서 찾을 수 없다. 감정이란 이성적으로 분석할 수 없는 영역의 일이니까. 세상이든 직장이든 이런 사건은 크고 작게 펼쳐진다. 단지 이번 사건은 비교적 큰, 심각한 축에 속한다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사건이 크다고 실망감이나 좌절감이 그만큼은 아니라는 거다. 또한 사건이 사소하다고 해서 또 실망감이 작지도 않다. 감정은 도저히 재단이 불가능하고 정량적으로 측정할 수 없다.
기묘한 것은 사건이 발생한 후 시간이 지날수록 감정이 평탄한 지점으로 수렴됐다는 것이다. 지나치게 저점으로 추락한 것도 아니고 또 조증 환자처럼 고점으로 치솟은 것도 아니다. 들쭉날쭉, 이런 감정 따위는 내게 없다. 어쩌면 나에겐 <이방인>의 뫼르소처럼 감정을 좀체 느끼지 못하거나, 감정에 자유로운 인간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감정은 예측하기 힘들다. 감정은 그냥 흘러가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사람은 무엇이든 실패하면 원인을 분석한다는 것이다. 바둑을 즐기는 사람은 그것을 복기한다고 말한다. 원인을 찾으면 '다시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거야'라고 선언한다. 그러면서도 다음에는 또 비슷한 실수를 반복한다. 사람은 망각하는 게 습관이고 개선하는 것은 더 에너지를 요구하는 일이며, 또 누구나 귀찮아하니까. 그래서 관성적으로 실패를 반복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그 일을 여기에 애써 기술한다. 실패를 만회하려는 것도, 불특정 다수에게 위로를 받으려는 것도, 그 기관이 어디인지 유추하게끔 간접적으로 의도하려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그저 기록하는 의식적인 절차에 불과하다. 기록하면 그나마 조금이라도 뇌세포의 이번 실수를 더 강력하게 각인할 수 있을 거라는 어떤 기대감이 있으니까. 그 작은 기대에 취해 이 글을 쓰는 것이다.
위의 글에 대해 AI는 다음과 같은 피드백을 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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