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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대생의 심야서재 Jun 26. 2016

한국 오컬트 영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다.

영화 <곡성>을 보고...

곡성


영화에 대한 아무런 정보가 없는 상태에서 나는 이 영화가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하얀 소복을 입은 '처녀귀신'이 등장하는 무서운 공포 이야기일 것이라 짐작을 했다. 영화의 제목인 <곡성>에서 떠올릴 수 있는 흔한 이미지는 바로 '곡소리'다. 곡소리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곡소리는 처녀 귀신이 사람을 홀릴 때 흔히 사용하는 것으로 어렸을 적부터 나에게 공포의 대명사로 머릿속에 각인되어왔다. 곡성이라는 제목을 최초에 듣고, 오래된 우리나라 최초의 공포 영화 <여곡성>을 떠올렸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영화 포스터 (출처 : 다음 영화)



처녀귀신이 나오는 단순한 공포 영화일 것이라는 나의 짐작은 그저 선입견일 뿐이었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영화 <곡성>은 우리나라 오컬트 영화에 대한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강조하고 싶다. 적어도 나에겐 <곡성> 이전과 이후로 오컬트 영화의 새로운 베이스라인을 그었다고 말하고 싶다. 한 번 더 강조한다면, <곡성> 이후로 오컬트 영화의 새로운 계보를 나홍진 감독이 시작했다고 봐야 한다.



영화감독 나홍진


나홍진 감독의 영화를 최초로 접한 것은 <추격자>였다. 연쇄 살인범 유영철의 이야기라고 하여 아내와 함께 극장에서 더 관심을 기울이며 본 기억이 있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시종일관 가슴을 졸이고 발을 동동 구르며, 마지막까지 긴장을 늦추지 않고 영화 속에 깊이 함몰된 나머지, 영화가 끝나고 난 후, 극도의 심신 미약, 피로 상태를 경험하게 한, 악질적인 연출력을 가진 감독의 영화였다. 영화 <곡성>을 통하여 나홍진 감독의 연출력은 다시 빛을 발한다. 이 영화의 러닝타임은 2시간 30분 가까이 된다. 보통 2시간이 넘는 영화를 감상하는 동안 몰입을 지속적으로 유지한다는 것은, 끈끈한 연출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관객에게 영화와 하나가된 몰아일체의 경험을 주기 어렵다. 영화의 흥행을 위해선 탄탄한 시나리오와 출연진의 빛나는 열연이 가장 우선이지만, 관객을 지루하지 않게 만드는 감독의 탁월한 연출력이 보다 중요할지 모른다.



나홍진 감독 (출처 : 다음 영화)



이 영화는 관객의 영혼을 가출시킨다. 탈출한 영혼은 영화에 깊이 몰입된 나머지, 제자리를 잃고 영화와 함께 방황하다가 영화가 끝난 후, 조용히 자신의 자리로 복귀한다. 나는 영화가 끝난 후, 지긋한 두통에 휩싸였다. 영화에 대한 지나친 몰입은 영화가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영화 속에서 만난 경험이 현실에서 계속 나타날 것이라는 의문의 공포를 안겼다. 나홍진 감독은 그러한 부분에서 관객을 들었다 놨다 할 정도의 연출력의 힘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 지금부터는 영화 <곡성>에 대한 줄거리와 스포일러가 나올 수 있습니다.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줄거리


낯선 외지인이 나타난 후 벌어지는 의문의 연쇄 사건들로 마을이 발칵 뒤집힌다. 경찰은 집단 야생 버섯 중독으로 잠정적 결론을 내리지만 모든 사건의 원인이 그 외지인 때문이라는 소문과 의심이 걷잡을 수 없이 퍼져 나간다.

경찰 ‘종구’(곽도원)는 현장을 목격했다는 여인 ‘무명’(천우희)을 만나면서 외지인에 대한 소문을 확신하기 시작한다.

딸 ‘효진’이 피해자들과 비슷한 증상으로 아파오기 시작하자 다급해진 ‘종구’. 외지인을 찾아 난동을 부리고, 무속인 ‘일광’(황정민)을 불러들이는데...

출처 : Daum 영화



곡성의 배경


영화의 배경으로 '곡성'과 같은 한적한 시골 마을이 설정된 이유는 무엇일까? 도시의 현대적인 문명이 완벽하게 자리잡지 못했고, 한국의 전통적인 샤머니즘 - 무당, 굿 - 의 문화가 서로 공존할 수 있는 공간으로 '곡성'과 같은 시골이 최적의 배경이었다. 시골은 전통적으로 외지인에 대한 배척이 강한 곳이다. 외지인이었던 일본인은 마을 사람들에게 늘 경계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마을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과 관련하여 주민들은 일본인을 제일 먼저 의심한다. 그것은 일종의 선입견이자 의심일 수도 있었다. 우연히 그 일본인이 악마인 것이 맞아떨어지긴 했지만, 시골에서는 단지 외지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갖은 고초를 겪는 경우가 있다. 어쩌면 일본인이 희생양의 제물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관객은 끝까지 그 사실의 확인을 두고 혼란을 겪는다.



영화 이미지 (출처 : 다음 영화)



과학과 문명의 발전은 인간에게 유토피아를 건설해줄 것이라 막연한 기대감을 갖게 한다. 인공지능, 빅데이터, 사물 인터넷과 같은 거대한 네트워크 망에서 작동되는 미래 기술이 인류에게 장밋빛 미래를 제시해줄 것이라는 헛된 믿음은 <곡성>과 같은 잔인한 삶의 현장에서 여지없이 무너져 내린다. 인간이 창조한 과학 기술은 악마가 활개치는 비현실적인 공간에서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인간은 자연 앞에서 아무런 힘도 없는 무기력한 존재이며, 신과 악마들의 전쟁에서 이리저리 휘둘리며 현혹당할 수밖에 없는 나약한 존재였다.



낚시


나는 이 영화를 보고 할리우드의 <엑소시스트>, <컨저링>과 같은 오컬트 영화들을 떠올렸다. <곡성>의 전체적인 이야기를 유지하고 있는 큰 틀은 미약한 인간에 대한 '악마의 현혹'이라 할 수 있다. 악마는 시종일관 인간을 낚는다. 나는 낚시를 좋아하지 않지만, 낚시를 취미로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고기를 낚아서 먹는 것이 주목적이 아닌 낚시 행위 자체를 통해서 희열을 얻는다고 들었다. 즉 악마는 끊임없이 낚시질을 하며 낚여오는 먹이의 존재를 통하여 희열을 느낀다. 그것에 무엇이 끌려나올지는 아무도 예측을 할 수 없다. 아이가 끌려 들어오건, 할머니가 끌려 들어오건 상관없는 일이며 그것에는 자비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영화 이미지 (출처 : 다음 영화)



"자네는 낚시를 헐 쩍에 뭣이 걸려 나올지 알고 허나? 그 놈은 그냥 미끼를 던져분 것이고 자네 딸내미는 고것을 확 물어분 것이여"



그렇다면 악마는 왜 인간을 낚으려는 것일까? 그것도 도시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음침한 시골에서 말이다. 인간이 악마의 계획을 어찌 알 수 있으며 그들의 극악무도한 계획을 어떻게 가늠할 수 있을까? 악마의 움직임을 놓고 갑론을박 하는 것 자체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악마가 선택한 곳이 단지 시골이었고, 도시보다는 음의 기운이 강한 산골의 작은 마을이 그들이 원하는 계획을 펼치기에 안성맞춤이지 않았을까? 악마는 인간을 상대로 게임을 하는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인간을 유혹하여 영혼을 빼앗아가거나 전리품으로 삼는 행위 자체 자체가 일종의 놀이이며 게임인 셈이다. 악마는 낚시라는 게임 요소를 도입하여 나약한 인간의 영혼을 사냥하고 있을 뿐이었다.



전염


악마의 목표는 인간의 영혼이다. 인간의 영혼을 통하여 악마의 군대를 결성하는 것이 그들의 목표라 할 수 있다. 악마의 실체가 기독교적인 세계관을 의미하는지, 한국의 전통적인 샤머니즘을 바탕으로 하는 형상인지 관객은 정확하게 판단하기 어렵다. 다만 악마의 목표는 서두에 언급한 대로 인간의 영혼을 빼앗아 자신의 전리품으로 삼는 것이다. 악마는 자신이 목표로 하는 인간이 낚시의 포위망으로 걸려들면, 그때부터 자신들의 직접적인 공작을 진행한다. 인간의 꿈속에 침투하여 자신의 존재에 대한 두려움을 키워내고 그 두려움을 원인모를 실체에 대한 공포로 확장시키고 결국 마지막에 영혼을 갉아먹는다. 그것이 하나의 전염 프로세스다. 영화에서는 악마가 인간의 마지막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 행위를 통하여 그들의 영혼 수집을 직접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영화 이미지 (출처 : 다음 영화)



인간의 영혼이 악마에게 잠식당하는 것에 대한 직접적인 증거는 몸에서 점차 확산되는 두드러기다. 두드러기 증상은 흔히 감염을 전파하는 구체적인 매개체라 할 수 있다. 두드러기를 통하여 전염병이 확산된다는 샤머니즘적인 공포가 오랫동안 우리의 토속적인 정서로 남아있다. 악마에게 영혼을 빼앗겨 정신의 지배를 받는 상태가 심각해질수록 몸속의 두드러기는 더 넓게 진행된다. 악마에게 영혼을 빼앗긴 사람들은 전부 그것에 대한 증거로 온몸에 두드러기가 퍼져있었다.



그것에 감염된 숙주로서의 인간의 마지막 모습은 마치 좀비와 유사하다. 좀비는 살아있는 시체다. 영혼이 사라진채, 육신만 남은 상태에서 악마에게 조종당하는 것이 좀비다. 영화 <곡성>에서 등장하는 좀비들은 악마에게 영혼을 빼앗긴, 그들의 주술에 따라 인간의 이성을 상실한 악마의 졸병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영화를 감상하기 전, 인터넷에서 수없이 많은 스포일러를 당했다. 그중에서 가장 황당한 스포일러는 좀비의 등장에 관련된 것이었다. 감독이 한국만의 색다른 오컬트 무비의 창조를 위해 과도하게 설정한 불필요한 장치는 아닌 것인지, 영화보기 전에는 의아한 부분이라 생각하고, 고개를 가로 젓기도 했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난 후, 나름 설득력 있는 장치라 이해하게 되었다.



영적인 고통


나는 오컬트 영화 - 악마의 현상을 그린 영화 - 를 그리 즐겨하는 편이 아니다. 특히 악마에게 인간의 영혼이 팔려 그들의 노예가 되는 암울한 배경의 영화는 더욱 기피하는 편이다. 기가 약한 사람에게 <곡성>과 같은 영화는 그들의 심신을 미약하게 만들며, 영화 속의 고통이 현실로 계속 이어져, 확대 재생산 될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그러한 연유로 극장에서의 감상을 꺼리게 되었고, IPTV에서 출시하게 된 후, 화제성 때문에 도저히 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거금 14,900원을 들여 감상을 하게 되었다.



감상 직후, 한동안 두통에 시달렸다. 영화는 영화일 뿐, 현실이 아니라고 부정했지만, 영화의 이야기와 설정은 종료 이후에도 계속적으로 나의 머리를 괴롭혔다. 특히 영화 중반 이후, 일광(황정민), 외지인(쿠니무라 준)이 펼치는 광기와 살기가 서린 굿판에서 심장이 강하게 요동치는 영적인 충격을 받았다.



나의 주관적인 느낌


악마는 인간을 낚았고 감독은 관객을 낚았다. 악마의 유혹 때문에 나약한 인간은 자신의 영혼을 빼앗겼고, 관객은 자신의 영혼을 나홍진 감독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영화가 끝난 후, 나는 영적으로 깊은 상처를 받았음을 깨달았다. 마치 나의 영혼이 파괴되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증에 빠져, 다른 곳에 에너지를 쏟을 만한 여유를 한동안 누리지 못했다. 그만큼 내가 영화에 빠져들었다는 반증일지도 모른다. 나홍진 감독은 영화적으로 분명히 성공을 거두었지만, 인간의 내면적인 근원의 존재를 증명해야 할 숙제를 우리에게 남겼다. 영화는 그저 영화일 뿐일까? 영화가 만약 실제 우리의 일상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우리의 내면에서 벌어지고 있는 선과 악에 대한 뿌리 깊은 싸움을 증명해야 할지도 모른다.



나홍진 감독은 대단히 명석한 감독이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그는 한국 영화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20세기 폭스사에서 왜 전적으로 그에게 투자를 하였는지, 그 이유를 영화의 결과를 놓고 충분히 납득할 수 있다. 그는 영화에서 기독교, 샤머니즘, 악마의 존재, 인간의 소소한 행복, 웃음 등 여러 가지의 요소들을 적당히 섞었고 조화롭게 버무려 내었다. 영화의 개봉이 끝난 이후까지 평론가 및 관객들에게 이렇게 화제를 일으킬 수 있는 영화가 최근 있었을까? 단순히 천만 관객을 동원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우리 영화의 예전 성공 포인트였던, 아날로그적인 매력을 다시 제시해준 영화가 <곡성>이 아닐까 싶다. 곽도원, 황정민, 쿠니무라 준, 천우희, 김환희 등을 비롯한 여러 배우들의 가공할 연기력도 이 영화를 빛나게 해줄 수 있었던 든든한 힘이라 생각한다.



영화의 결말을 놓고, 나는 혼란스럽다. 인간으로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나약한 힘의 깊이를 재어볼 뿐이다. 이 영화의 결말은 지극히 암울하고 아무런 희망도 볼 수 없다. 감독은 종구를 위로했다고 하지만, 무엇이 위로의 포인트인지 나는 이해할 수 없다. 아마도 비정한 현실을 영화가 건드린 탓일 것이다. 인간은 강한 척 힘을 과시하지만, 실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지구 상에서 중간적인 위치에 서있는 나약한 미생이라는 것을 인식할 뿐이다. 



나는 이 영화의 결말을 두고 누가 선이고 악인지 혼란스럽다. 그리고 누구를 믿을 수 있을지, 누구를 의심하지 않을 수 있을지 의문스럽다. 물론 영화의 결말에 대한 해석은 전적으로 관객의 의지에 달려있다. 비관적으로 본다면 그렇게 해석될 것이고, 희망을 본다면 그렇게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관해서 나홍진 감독은 명확한 대답을 내놓지 않고 "관객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것이 맞을 수도 있습니다."라고 단순하게 일관한다. 과연 무엇이 중요한 것일까?



"뭣이 중헌디? 뭣이 중허냐고 뭣이! 뭣이 중헌지도 모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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