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석 교수의 <백년을 살아보니>를 읽고...
100년을 산다는 것의 의미는 어떤 것일까? 인간에게 있어서 100이라는 숫자는 의미심장하다. 과연 오래 산다는 것은 우리에게 축복이 되어줄까? 아니면 비극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는 운명적인 사건일까? 우주의 깊은 나이를 가늠할 때, 100년이라는 시간을 놓고 오래 산다고 따지는 것도 우스운 얘기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인생이란 영속적인 흐름들은 우주에게 있어서 단지 찰나의 순간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사유를 하고 있는 순간에도 시간은 무심히 흐르고 있고, 새로운 한 주가 시작되는 내일도 처음 겪는 듯이 보내야 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나는 비교적 이른 나이부터 100세 인생을 대비했다. 은퇴 후의 풍요로운 미래를 위해서 현재의 만족을 뒤로 미루었다. 내가 과연 언제까지 직장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그 문제는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사회의 심각한 구조적인 문제였다. 따라서 많이 벌 수 있을 때, 사람들이 나를 인정해줄 때, 악착같이 저축을 해야 했다. 보험, 연금, 적금, 주식, 주택 등등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안락한 미래를 꿈꿀 수 있도록 자산을 끌어모으고 있다. 지금 억척스럽게 절약하고 아끼며 사는 것이 훗날 기력을 잃게 되었을 때, 조금이라도 풍요롭고 여유 있게 살 수 있는 방법이라 생각했고, 그 막연한 미래를 신뢰하며 현재의 행복에게 양해를 구하며 살아왔다.
내가 생각하는 노년의 모습이란, 파고다 공원 같은 곳에서 하릴없이 장기나 바둑을 두거나 옆에서 훈수나 두면서 시간을 축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미래가 아닌 악몽과 같다. 늙어서 젊은 사람들에게 추해 보이지 않으려면, 사회에서 기본적으로 제공하는 보장 방법만으로는 부족하다. 현재 개인적인 연금이나 보험에 투자하는 것도 늙어서 젊은 사람들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는 이유이다. 늙은 것이 벼슬은 아니다. 그 이유 때문에 젊은 사람들에게 배려를 받고 싶지는 않다. 내가 당당하게 늙고 품위 있게 노년의 인생을 보내려면 지금부터 그 미래를 착실하게 대비해야 한다.
북 카페에서 추진하는 독서 리뷰 소식을 들었다. 백 년 가까운 인생을 살고 있는 김형석 교수의 철학 에세이라고 한다. 인생을 오래 산 철학자가 나눈 그의 개인적인 인생의 이야기를 에세이 형식으로 담은 것이라고 한다. 많은 독자층을 보유한 인생의 선배가 낸, 책의 내용이 궁금해졌다. 100세 가까운 인생을 살고 있는, 피천득의 뒤를 이을 한국 수필계의 대표적인 저서로 평가받았던 김형석 교수의 <백년을 살아보니>가 그 책이다.
<백년을 살아보니>는 100세 가까운 인생을 살아온 노(老) 철학자의 인생관을 담고 있다. 90이라는 나이를 넘기게 되면서 그가 터득한 철학적인 성찰의 이야기들을 현대인들과 나누고 싶은 그의 오랜 생각들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그의 인생은 헛되지 않았고 현재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도 마찬가지다. 그의 철학적인 이야기들을 통해서 나와 같은 중년들에게, 젊지만 노년을 대비하는 사람들에게, 인생관을 다시 한 번 정립할 수 있는 길잡이를 친절하게 안내한다. 이론적인 자기 계발서와 같은 일방적인 가르침보다는 김형석 교수가 실제 겪은 인생의 실제 이야기들을 중심으로 하여 이해하기 쉽도록 설명을 해주고 있다.
늙어서 기력이 사라졌을 때, 우리는 행복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을까? 젊었을 때, 올바른 가치관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늙어버린다면, 어떤 지혜로 남은 인생을 괴롭지 않게 보낼 수 있을까? 내가 지금 즐겁게 하고 있는 일이 과연 늙어서도 그대로 유지될 수 있고, 또 기쁨이 될 수 있을까? 내가 늙어서 할 수 있는 즐거운 일은 무엇이고,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일까? 노년과 상관없이 자신의 인생이 무엇인지, 자기가 좋아하는 일이 무엇인지, 제대로 파악조차 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어떤 의미로 앞으로 남은 인생을 살아갈 것인지 제대로 설계조차 안 되어 있는 사람이 태반이다. 김형석 교수는 그 부분을 가장 걱정한다. 100세 인생이 일반화되는 가까운 미래에, 아무런 준비도 마련되어있지 않은 상태에서 노년을 맞은 사람들의 무계획을 걱정한다. 100세라는 의미가 단순히 죽음이 더 멀어졌다는 희망일 것인지, 나아가 희망도 없이 하루를 마지못해 살며, 죽음을 허무하게 기다리는 인생이 되고 말 것인지, 그렇게 되지 않도록 자신이 살아온 인생을 반추하며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
<백년을 살아보니>는 총 5부로 나누어져 있다.
1. 똑같은 행복은 없다. 행복론
2. 사랑 있는 고생이 기쁨이었네 결혼과 가정
3. 운명도 허무도 아닌 그 무엇. 우정과 종교
4. 무엇을 남기고 갈 것인가. 돈과 성공, 명예
5. 늙음은 말없이 찾아온다. 노년의 삶
행복은 주관적인 판단에 근거한다. 물질적인 것, 권력, 명예욕 등을 소유하면 행복해질까? 만약 내가 소유한 것을 잃게 되면 어떻게 될까? 얻은 것들은 언젠가 반드시 내 손을 떠나게 되어 있다. 세속화된 욕심들이 얻어지는 것에서 행복을 느낀다면, 그것들이 상실했을 때 찾아오는 불행은 어떻게 될까? 결국 물질적인 것, 권력, 명예욕의 소유는 행복의 척도가 될 수 없다. 삶의 일상적인 것에서 찾아오는 사소한 행복의 가치를 추구해야 한다. 그리고 예술적인 가치와 같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창작의 가치를 창출해야 하는 이유이다.
이런 정신적 가치는 소유에서 오는 만족이 아니다. 창조자는 사회에 주기 위한 책임을 감당했고, 우리는 그 가치를 공유하고 있다. 공간을 넘어서, 시간을 초월해 인류가 공유하는 업적이다. p. 16
삶의 의미를 어디서 찾아야 할까? 내가 속해있는 공동체, 즉 직장과 가정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다. 눈앞에 있는 행복을 보지 못하고 먼 곳에서 삶의 의미를 찾겠다고, 더 많은 것들을 얻겠다고 헤매고 다닌다. 자신의 그릇의 크기를 제대로 모른다. 더 이상 담을 수 없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계속적인 집착에 시달린다. 결국 그릇이 깨지고 담았던 행복들이 밖으로 쏟아져 버린다. 그릇에 담은 부와 재물은 이렇듯 넘쳐나면 깨질 수밖에 없는, 언젠가 사라질 수밖에 없는 물거품과 같은 존재이다. 김형석 교수는 자신의 가진 것을 나눌 수 있는 이웃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경제적으로 중산층에 머물러야 한다. 경제적인 자립이 확보되어야 사회에도 기여할 수 있는 여력이 확보된다. 행복을 이웃과 나누며 사는 이상적인 사회를 꿈꾼다.
인간은 고독한 존재다. 혼자서 외롭게 사는 것보다 가정을 이루고 살아야 한다. 사랑하는 사람은 가장 가까운 인생의 친구다. 그는 말한다. 세상에서 가장 허무한 고독을 느끼는 사람은 자녀 없이 인생을 마감하는 사람이라고 말이다. 나는 그 부분에서 답답했다. 우리 부부는 사실 자발적인 딩크를 선택했다. 사랑하고 결혼할 자격이 없는 사람의 무책임한 결혼도 문제지만, 책임질 수 없는, 미래가 없는 사회에 아이를 낳는 것이 무책임하다는 결론으로 아이를 갖기 않기로 결정을 했다. 그 목적이 이기적인지는 명확하게 판단하기 어렵다. 하지만 나의 선택이 잘못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아이가 없어도 행복한 가정을 유지하기 위해 그 어떤 노력을 다하고 있으니 말이다. 우리 부부는 소울 메이트이다. 다른 어떤 부부보다 많은 대화의 시간을 갖는다. 서로의 시간과 이해하고 존중하고 배려한다. 먼 미래에 둘 중의 한 사람이 먼저 떠나게 되는 날이 두려울 따름이다. 그때 찾아올 수밖에 없는 고독감이 두렵기는 하지만, 그것도 받아들여야 할 미래의 일반적인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내 아내는 아래 문장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내가 먼저 죽는다면 그 순간 아내에게 찾아올 공허감이 걱정이 되기도 한다.
내 아내는 인생의 목표가 나를 돕는 데 있었다. 내가 없으면 삶의 모든 미래와 희망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p.76
지금 누구와 사랑하고 있는가? 비록 사랑이 고생일지라도, 전쟁 같을지라도 우리는 사랑을 해야 한다.
모든 남녀는 인생의 끝이 찾아오기 전에 후회 없는 삶을 찾아야 한다. 그것은 사랑이 있는 고생이다. 사랑이 없는 고생은 고통의 짐이지만, 사랑이 있는 고생은 행복을 안겨주는 것이 인생이다. p.96
김형석 교수는 김태길, 안병욱 교수와 함께 철학계의 삼총사로 불렸다. 둘도 없는 친구였던 두 사람은 먼저 유명을 달리했다. 모든 사람은 언젠가 비존재인 허무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우정으로 맺어졌던 친구들도 영원히 함께 할 수는 없다. 그것은 인생의 진리이다. 우르는 모두 언젠가 유에서 무로 바뀐다. 존재에 관한 실증적인 질문은 결국 종교에 귀의할 수밖에 없는 현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아무리 과학이 지배하는 사회라고 하지만, 인간은 생이 끝나는 마지막 순간에 종교를 찾는다. 정신계의 대부분을 철학이 계승하여 종교가 설자리가 좁아졌다고 얘기하지만, 아직 인간은 나약한 존재다.
인간은 종교적 신앙, 철학적 사유, 과학적 영역을 동시에 갖고 있으나 시대와 사회적 여건에 따라 비중의 차이가 있을 뿐 탐구의 과제와 영역이 다를 뿐이라고 보았다. p.139
공자의 교훈, 예수의 가르침, 석가의 가르침 등을 이야기하며 종교적 신앙은 인간이 마지막 삶의 순간에서 붙들 수밖에 없는 인생의 마지막 물음에 대한 해답이라 강조한다. 종교적인 진리로 따른 다는 것, 그 보다 앞서가는 가치관이나 인생관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그의 진리를 따르는 제자가 된다는 것이다.
종교적 신앙은 인생의 마지막 물음에 대한 해답이다. p.149
성공을 위하여 현재의 삶을 등한시한 채 먼 미래의 목적을 바라보고 사는 야심찬 인물들이 있다. 돈과 출세와 명예를 위하여 사람들과 제대로 된 소통을 거부하며 세속적인 가치에 추종하는 사람들도 있다. 돈의 유혹에 빠져 인간다운 삶을 잃어서는 안 된다. 김형석 교수는 슈바이처 박사의 삶을 이야기하며 인간다운 삶이 무엇인가?라고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지금 살고 있는 삶에 만족하지 못하고, 언제나 다른 곳으로 떠나려고 마음을 버리고 있거나, 돈의 유혹에 빠져 사람을 잃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문한다.
사람은 성장하는 동안은 늙지 않는다고 한다. 공부는 영원히 지속되어야 한다. 자신이 하고 싶은 창조적인 가치를 찾아야 한다. 새로운 것을 배울 수 있는 취미 생활도 좋다. 노년기는 75세에 시작된다고 한다. 늙지 않기 위해서 공부를 게을리하면 안 된다. 무엇이든지 배우겠다는 마음으로 하루를 새롭게 살아가야 한다.
50부터는 80이 되었을 때 나는 적어도 이러한 삶의 조각품을 완성해야 한다는 준비와 계획과 신념과 꾸준한 용기를 갖고, 제2의 마라톤을 달리는 각오로 재출발해야 한다는 교훈이다. p.238
나 역시 김형석 교수처럼 대중교통을 이용한다. 자투리 시간을 통해서 조금이라도 몸을 움직일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 너무 편하게 사는 것은 건강에 좋지 않다. 짧은 거리는 주로 걷는다. 걸음을 통해서 나는 정신적 건강을 건전하게 유지한다. 김형석 작가의 말처럼 걷는 동안 나는 정신적인 에너지를 충전한다. 생각을 정리할 수 있고, 미래를 차분히 설계할 수 있다. 걷는 시간은 조용히 자신과 대화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시간이다.
사람이 나이 들수록 나무가 높이 자라듯이 지혜롭게 자라야겠다. p.274
<백년을 살아보니>는 차분하게 나의 남은 인생을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을 제공했다.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사는 것의 정답은 무엇인지 늘 찾고자 했던, 나의 궁금증에 정답에 가까운 해결책을 제시해 주었다. 인생을 오래 살았던 선배의 차분한 가르침 속에서, 나 역시 과거를 성찰할 수 있는 좋은 시간을 얻었다. 결국 인생이 던지는 온갖 질문에 대한 해답은 스스로 찾아야 한다. 100세 시대가 일반화 되어가고 있는 시점에서, 노년의 시기를 어떻게 보내야 할 것인지, 남은 삶에 대한 소중한 힌트를 얻을 수 있었다.
지금의 행복이 무엇보다 소중하다는 것,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은 그 어떤 세속적인 가치들로도 대체될 수 없다는 결론을 얻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행복하게 살아야 하며, 내가 누리고 있는 경제적인 가치들에 너무 맹목적으로 얽매이지 않고, 언젠가 이웃들과 나누며 살아야 한다는 가치도 깨달았다. 아름다운 노년기를 보내기 위하여, 어떻게 남은 인생을 보내야 할 것인지, 글을 써야겠다는 강한 열망 속에서 살아가는 나에게, 철학적인 질문을 제시하고 그에 대한 해답을 더 깊이 들여다볼 수 있도록 해 준, 김형석 교수에게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다.
이 책은 출판사로부터 무료로 제공받았으며, 객관적으로 리뷰를 쓴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