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분인은 모두 '진정한 나'를 구성한다.
나는 대한민국의 평범한 남자 사람이다.
나는 직장에서 여전히 프로그래머이고 싶은 사람이다.
나는 한 사람만을 열렬히 살다가 이 세상을 떠나고 싶은 사람이다.
나는 글을 쓰는 사람으로 대접받을 미래를 꿈꾸는 사람이다.
나는 브런치 작가다!
......
"나란 무엇인가?"라는 말을 떠올렸을 때, 먼저 나의 정체성이란 무엇인지 생각했다. 나를 규정하는 성격의 특징 그리고 현재 '내가 활동하고 있는 수많은 집단에서의 나의 위치'는 어디쯤인지 내면의 그림자들을 면밀히 관찰했다.
글을 쓰며 나에게 새롭게 떠오른 재주는 내면의 세계를 관찰하는 능력이다. 요즘 들어 주관적인 의식의 흐름과 주변 사람과 사물의 세계들을 관찰하는 재미로 산다. 나와 관계없는 이야기들에 귀를 기울이고, 누군가의 대화에 눈길을 집중시킨다. 사람들의 알 수 없는 표정을 읽고, 탁하고 가늠하기 어려운 감정의 깊이를 잰다. 사람들이 전개하는 이야기의 흐름과 겉모습이 표출하는 특징들에는 공통적이면서도 서로 다른 개성적인 흐름들이 있다. 그들은 타인과 교류를 나누고 있었지만, 때로는 가면을 쓴 것인지 분간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람을 대하는 태도와 주고받는 언어의 형태가 달랐다. 나는 어떤 모습이 그들의 고유의 모습인지 혼란스럽기만 했다.
그 모습은 나도 별반 다르지 않다. 나는 무대에서 환영받을 만한 옷들로 갈아입고 내 모습을 구경하는 관객들이 즐거워하도록 맞춤 연기들을 펼치고 있다. 나의 내면은 만나는 사람들의 패턴에 따라서 예측하기 혼란스러울 정도로 변화의 추세를 보인다. 아내에게 보이는 나의 모습 자체도 다양하게 분화(分化) 하는 양상을 보인다. 한없이 다정하게 속삭이다가도 냉정한 표정으로 요청 - 청소, 설거지 등등 - 을 거절하고, 부지런하고 명석하다가도 어느 날은 멍청이가 되기도 한다. '나'라는 사람은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서 완전체의 모습을 갖춰나가는 과정에 놓여있다.
'나'라는 물질적으로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단위다. 인간은 외양을 바꿀 수 없다. 하지만 자신의 내면은 여러 갈래로 나뉠 수 있는데, 그것이 <나란 무엇인가>의 '히라노 게이치로'가 주장하는 '분인'이다. 개인은 개별적인 존재로서의 사람을 구분하는 최소의 단위다. 개인은 더 이상 분화할 수 없지만, 분인 이라는 개념을 도입하면 개인은 더 세분화된다.
나는 분인의 개념을 이해하기 전에, 나는 페르소나를 뒤집어쓰고 살아가는 인간이 아닌가?라는 의심을 품었었다. 사장 앞에서는 인정받고 싶은 나머지 눈치 보며 살았고, 때로는 잘릴까 봐 고개를 숙였고, 팀원들에게는 능력 있는 팀장으로서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압박에서 자유롭지 못했고, 집에 들어와서는 서재에 처박혀서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일상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았다.
나는 다양한 분인들의 활약에 주체를 할 수 없었다. 내 안의 분인들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여기저기 각자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하나의 분인이 무너지면 다른 분인들도 도미노처럼 무너질 것만 같아 두려웠다. 분인들은 각자 개성적인 역할을 수행하면서도 '나'라는 본질적인 공통의 코드를 공유하고 있었다. 마치 분인들은 보이지는 않지만, 서로 의지하고 있었다고 할까? 각자의 곤고한 자존심의 영역을 구축하고 있으면서도, 때로는 모자란 부분들을 보완해주며 한쪽이 쓰러지지 않도록 단단하게 바닥을 지탱하고 있었다.
작가는 "P. 26 : 책을 읽을 때의 나야말로 진정한 나이며, 교실에서 웃고 떠드는 것은 진정한 나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라며 학창 시절을 회상한다. 나의 학창 시절을 떠올렸다. 나는 그 시절 유독 영화에 집착했다. 교실에서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 그 의미를 찾지 못했고, 쉬는 시간 땀을 흘리며 스트레스를 운동에 발산시켜도 개운하지 않았다. 친구들에게 겉으로 보이는 이미지는 활달한 사람이었을지 모르지만, 나는 혼자서 영화 보는 것이 더 좋았다. 이를테면 <지옥의 묵시록> 같은 영화에 더 빠져드는 것으로.
왜 나는 사람들에게 다른 행동을 나타냈을까? 나는 사람들에게서 무엇을 찾으려고 했던 것일까? 단순히 상황에 맞게끔 적절한 행태를 보인 것일까? 환경에 적응을 하기 위하여, 사람들에게 비치는 내 모습에 빈틈이 보이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었을까? 나의 내면에는 다양한 인격이 거주하고 있었다. 그 인격들은 자신의 차례를 각각 기다리고 있었다. 마치 번호표를 받아 들고 기다리는 대기열의 조바심 나는 사람들처럼, 자신의 역할을 빛낼 수 있는 타이밍을 기다리고 있었다. 자신의 순서가 되면 세상 밖으로 진출하여 사람들에게 환영받거나 어울리는 춤을 추면 되었다.
"P.46 : 커뮤니케이션은 타자와의 공동 작업이다. 대화 내용이나 말투, 기분 등등 모든 것이 상호작용 속에서 결정된다. 이유가 뭘까? 커뮤니케이션의 성공은 그것 자체로 기쁘기 때문이다.", "P.48 : 분인은 이쪽에서 일방적으로 그렇게 하기로 결정하고 연기한 게 아니고, 어디까지나 상대방과의 상호작용에서 생겨난다." '진정한 나'란 무엇일까? 혼란스럽기도 했다. 여기저기 마구잡이로 일어나는 나의 분인들을 감당할 수 없었다. 그냥 분인들을 자유롭게 풀어놓고 원하는 대로 방목하는 것이 올바른 것인지 혼란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분인들은 다른 사람과의 커뮤니케이션을 할 때만 자신의 숨은 존재를 드러냈다. 혼자 있을 때, 나는 분인들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오직 타자를 통해서 분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P.64 : 카프카는 산재 보험국 직원으로 일하지만, 그 가면 속에는 훨씬 애매모호한 진정한 나가 감춰져 있었다." 카프카는 보험국 직원으로 일하고 있었지만, 그 모습이 원하는 자아는 아니었던 것 같다. 몇 가지의 분인중에서 세상을 살아가기 위한 목적으로서 지나지 않았던 것일까? 그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듯 보였지만, 사실 아버지의 폭력에 시달렸고 정신은 파괴되어갔다. 그는 매일 밤마다 글을 쓰며 작가로서의 창작활동을 이어나갔다. 그는 전업작가로서의 꿈을 끝까지 버리지 않았다. 카프카에게 있어서 '진정한 나'라는 분인은 작가로서의 모습이 아니었을까?
"P.71 : 인터넷과 현실이라는 이분법이 인간의 내면과 외면, 안과 밖, 공과 사, 표면적인 가면과 본성 같은 개념에 대응된다." 나는 현실의 세상과는 다른 모습으로 인터넷에서 성장하고 있다. 인터넷 - 브런치, 블로그, 페이스북 등 - 에서 글을 쓰는 '나'는 현실의 존재와 연결고리가 전혀 없다. 다중적인 나의 모습들은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또 다른 분인의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오히려 온라인에서 더 솔직한 모습을 보인다. "P.78 : 한 명의 인간은 '나눌 수 없는 존재가 아니라 복수로 '나눌 수 있는 존재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나', '수미일관 된 흔드리지 않는 본래의 나'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여러 분인이 존재하지만, 특별히 한쪽으로 기울지는 않는다. 나는 모든 분인을 사랑하고, 분인의 역할을 존중하기 때문이다. "P.119 : 우리는 나라는 인간을 여러 분인의 동시 진행 프로젝트로처럼 인식해야 한다." 나는 타자와의 상호작용을 통하여 분인의 성향을 결정한다. 이것은 내가 살아있는 동안 진행해야 하는 장기 프로젝트이다.
"P.135 : 당신의 말이 최종적으로 상대의 인생을 바꿀 만한 영향력이 있었다면, 그것은 다양한 분인을 통해 문맥을 바꾸며 동의를 얻었다는 뜻이다." 나의 말 또는 내가 쓰는 글이 상대의 인생을 바꿀만한 영향력을 갖추기는 어렵지 않을까? 나는 타자의 인생을 바꿀만한 자격도 없는 사람이거니와 그럴만한 영향력도 없는 사람이다.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살아가며 서로의 영역을 존중하며 살아갔으면 하고 바랄 뿐이다. "P.145 : 우리는 일상생활 속에서 여러 분인으로 살아가기에 비로소 정신적인 균형을 유지할 수 있다."
"P.170 : 지금 사귀는 상대가 정말로 좋은지 어떤지 혼란스러울 때는 반대로 이렇게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그 사람과 같이 있을 때의 내가 좋은가 아닌가?" 나와 함께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아내를 떠올렸다. 나는 아내와 있을 때 가장 행복하다. 다른 말이 필요할까? 편안하고 즐겁고 부담이 없다는 것, 나의 허물을 굳이 감추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좋은 것이다. "P.174 :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로 인해 탄생하는 나의 분인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사랑은 근본적으로 나르시시즘에 불과하다는 냉소적인 지혜의 반복이 아니다. 어떻게 사랑이 내가 살아갈 수 있는 동력이 되는지를 설명해주는 논리다." 내가 아내를 사랑하는 것은 아내에게 투영된 나의 본질을 사랑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아내와 함께 하며 나의 존재를 찾는다. 나와 아내가 나누는 대화를 사랑하고, 아내에게 비치는 나의 행동을 사랑한다.
"P.190 : 당신이 고인과 오랫동안 가깝게 지냈다면, 당신 안에는 그와의 분인이 여전히 소멸되지 않고 존재한다. 그 분인이 생각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고인의 영향을 받는다. 고인의 말투나 사고방식이 반영된다. 요컨대 당신이 하는 말의 절반은 당신 것이면서 동시에 나머지 절반은 고인의 것인 셈이다. 바로 여기에 매우 주관적인 관계이면서도 객관성이 동반될 여지가 있다." 사랑하는 사람이 나의 곁을 떠난다면 그 사람은 영원히 사라지는 것일까? 그 사람의 말과 행동은 내가 살아있는 한 나의 모습 속에 유지된다. 나에게 있어서 그 사람은 반이 넘을지도 모른다. 나에게 그 사람의 말투와 따라 하고 싶은 습관이 유전자 어딘가에 남아있다. 내가 쓰는 글은 어떨까? 내가 사라지더라도 어딘가에 남은 나의 글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도록 남아있을 수 있다. 다른 사람에게 존재할지도 모를 나의 분인 속에 나의 글은 남는다. 그래서일까 한 사람의 생명을 앗아가는 것은 존재하는 모든 분인을 뺏는 행위이다. "P.194 : 한 사람을 죽이는 행위는 그 사람의 주변, 나아가 그 주변으로 무한히 뻗어가는 분인끼리의 연결을 파괴하는 짓이다."
<나란 무엇인가?>는 '나'라는 개념을 분인으로 세분화하여 설명하고 있다. 나라는 인간이 타자와의 상호작용에서 각각 다른 모습들로 행동하는지 그것의 근거를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히라노 게이치로'는 소설가다. 그는 소설을 쓰며 인간의 다양한 심리 묘사를 분인의 이미지로 그렸다. 나의 내면은 다른 사람들에게 종속되지 않는 독립적인 존재이지만, 분인의 개념으로 타자와의 관련 속에 숨은 또 다른 '나'를 제시한다.
'나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이 세상을 혼자 살아가는 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을 집중적으로 조명하고 있다. 나도 모를 나의 여러 모습들에 놀랄 필요는 없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나의 분인들은 모두 저마다의 독립적인 실체를 가지고 있다. 그중에서 '진정한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내 안에 존재하는 모든 분인이 '진정한 나'에 해당이 된다. 물론 분인의 개념을 이중인격자 또는 위선자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것으로 오도해서는 안된다. 이 책은 철학 에세이의 성격을 띠고 있으나, 읽기에 어렵지는 않았다. 다만 나와 같이 내면에게 깊게 다가가려고 하는 사람에겐 다소 생각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준 책이기도 했다. 읽으면서 나의 분인들을 하나하나 책상 위에 펼쳐놓고 대화를 나눠보고 싶었다랄까?
커버 & 본문 사진 출처 : futurewa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