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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대생의 심야서재 Jan 24. 2016

읽다.

김영하

"고전은 쏟아지는 별이다."


쏟아지는 들을 무심히 바라보고 있다 보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별과 내 몸이 하나가 됨을 느끼는 순간이 있다. 들판에 눕거나 작은 벤치에 앉아서 고개를 하늘 방향으로 돌리면 무수히 많은 별이 내 것이 된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어둡게 먼지가 내려앉은 서울의 밤하늘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안타까운 광경이기도 하다.



김영하가 <읽다>에서 이야기하는 “고전”들은 밤하늘에 빛나는 영겁의 역사를 소유한 별들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고전”은 책장에 고이 꽂혀있기만 해도 마음속으로 오래된 지식이 저절로 쌓여, 고되고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기 위한 이치와 근본을 깨닫는 지혜로, 나의 인격이 한 단계 성숙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방법일지도 모른다. 

별과 내가 한 몸이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지는 것처럼, 고전은 서가에 단지 전시되어있기만 해도 선인들의 지혜가 내 몸속으로 빨려 들어올 것만 같은 뿌듯함마저 느끼게 한다. 


"3부작의 완결 편"


김영하의 <읽다>는 그의 산문 3부작의 완결 편이라고 한다. 그의 산문 <보다>를 아파트 도서관에서 접하게 된 후, 난 그의 팬이 되었다. 또한 블로그 이웃님의 서평을 보고 책을 사야겠다 다짐을 했던 책이기도 하다. 

그가 남긴 작품들을 섭렵하려고 부단히 노력 중이다. 그가 다른 고전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듯이, 난 그가 남긴 책들의 사상에 영향을 받고 있을지도 모른다. 

김영하의  <읽다>는 총 여섯 장에 걸쳐서 그가 읽은 고전들에 대한 작가 입장에서의 주관적인 서평이라 할 수 있다.  몇십 권씩이나 책을 집필한 작가가 수천 권을 읽은 자신의 독서량을 두고 비대칭이라고 얘기한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책 한 권 집필하지 못하고 수 백 권도 읽지 못한 나의 독서량은 얼마나 미미한 것인지 부끄러운 감정마저 느끼게 된다.

하지만, 다른 주관적인 입장에서 변명을 해본다면, 온라인 공간에 수많은 글들을 포스팅하고 있으니 책을 집필할 수준은 아니더라도 비정상적인 비대칭의 범주에서는 혹시나 벗어나지 않을까, 우려스러운 마음을 살짝 감추어보기도 하게 된다.


"고전이란?"

김영하 작가는 말한다. '작가는 죽어도 책은 시대를 초월하며 살아남는다'고, 살아남은 고전은 예전에 익히 알고 있는 사실들이지만, 다시 새로 읽는 것 같은 착각을 주는 것이라고 말이다. 그 새로움은 우리에게 이미 알고 있다고 자만하는 마음을 반성하게 한다.

고전에 대하여 보르헤스는 전함, 함대가 질서 정연하게 정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 면에서 <일리아스><오디세이아>는 고전을 대표하는 선두 진영의 함대라고 볼 수 있다.

고전은 모두가 이미 알고 있기에, 마치 처음 읽는 것 같은 새로운 느낌을 위해서 고대의 작가들은 지금의 사람들이 참조하고 있는 기법들을 이미 도입하고 있었다고 한다. 지금 읽어도 새로운 것은 당시에도 새로웠을 것이라고 한다. 그 새로운 면이 고전이 오래도록 사랑받는 비결이라고 한다.

그가 예로 들었던 소포클래스의 <오이디푸스 왕>은 단 하루 만에 완벽했던 그의 인생이 무너지는 것을 보여준다. 

“비극은 대부분 우리보다 나은 사람이 내재된 성격적 결함으로 파멸하는 얘기다. 희극은 우리보다 못한 이가 우스꽝스러운 행동을 하는 것을 편안한 마음으로 보는 것이다.” 비극도, 희극도 아닌 우리 사회가 지금 나아가고 있는 방향은 도대체 무엇인지, 나의 인생이 비극으로 막을 내리게 될지, 희극으로 마감할지 나는 예측할 수 가 없다.

김영하는 책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무서운 사물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인간을 감염시키고, 행동을 변화시키며, 이성을 파괴할 수 있다.”고 말한다. 책은 나를 무섭도록 변화시키고 있다. 책에 완전히 등을 돌렸던 과거를 비교하더라도, 다시 시작한 독서는 나의 사고를 다양한 관점의 시각으로 바꿔주고 있다. 책은 한 인간을 완벽하게 변화시킬 수 있는 무서운 사물임에 분명하다.


"우리가 소설을 읽는 이유"


“우리가 소설을 읽는 것은 내가 겪어보지 못한 다양한 인간군상의 일면을 경험하고자 하는 것이다.” “소설에는 죄책감, 피해망상, 불안감과 같은 다양한 감정에서 헤매기 위함”이라고 한다. 작가가 만들어 놓은 정해진 미로에서 굳이 탈출하지 않아도 기분 좋게 삶을 일탈한 자유로움을 만끽할 수 있는 경험을 제공한다.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를 이야기하며, “우리는 지와 무지의 관점에서 냉정하게 판단한다면 라만차의 돈키호테와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일에 미쳐있고, 독서에 미쳐있고, 광기 어린 분노에 미쳐있고, 좋아하는 것에 미쳐있고, 맹목적인 이념에 미치기까지 한다. “우리들은 너무 많이 읽거나 너무 많이 입었기 때문에 돈키호테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소설은 사람들이 기대하는 방식을 철저히 짓밟기도 한다. 특정한 결말을 기대하는 것은 선입견이라 할 수 있다. 독자들이 원하는 대로 결말을 꿈꾸기도 하지만, 꿈과 달리 소설의 결과는 사라지지 않는 불멸한 꿈이다. 소설은 작품마다 읽은 시각과 다양한 관점에 대한 느낌을 이야기한다.” 작가를 이야기하는 에세이를 좋아하는 나에게 소설을 읽고 싶은 충동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책은 우리의 현실과 세태를 반영하고 있으며, 소설은 현실이 아닌 세계를 탐험하게 한다. 합법적으로 탈선할 수 있고, 무법적인 세상을 누릴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소설을 읽는 것 같다.

“독자는 하는 수 없이 주인공에 대한 혐오감과 작품에 대한 호감을 조화시키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원하면 소설을 읽는 것을 중단할 수 도 있고, 작가의 생각엔 동의하지 않지만 끝까지 읽는 것도 나의 자유다. <롤리타>와 같은 소설을 읽으며 주인공에게 돌을 던지는 상상을 하지만, 끝까지 다 완독 한다고 해서 소설 속 주인공의 생각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소설을 읽는 행위는 끝없는 투쟁이다. 작가가 원하는 대로 읽지 않으려 애쓰기 때문이다.” 재미있게도 작가의 의도를 거부하면서 손을 놓지 못하게 되는 상황도 일어나게 된다.

“등산 가는 높은 산을 오르면서 더욱 경험이 풍부하고 강해진다. 때로 극심한 고통을 겪기도 하지만 그들 대부분이 다시 산으로 돌아간다. 소설은 소설이 가진 매력 때문에 다가가게 되는 것이고, 바로 그 매력과 싸우며 읽어나가는 것이고, 바로 그 매력 때문에 다시 돌아가는 것이다.”

HBO의 <소프라노스>는 이 시대의 가장 위대한 문학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위대한 미국 소설의 문화적 계승자라고 까지 한다. 나는 김영하의 해석을 읽고, <소프라노스> DVD 셋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작가는 자기가 쓴 책에 묻힌다.” 그렇다면 나는 내가 글을 써놓은 블로그에 묻히게 되는 건가?

“책은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개개의 책은 다른 책이 가진 여러 힘의 작용 속에서 탄생하고, 그 후로는 다른 책에 영향을 미친다.” 김영하의 글은 분명히 내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왜냐하면 그가 얘기한 고전들에 관심 갖는 거 자체가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김영하의 <읽다>를 보며 진지하게 어떤 마음가짐으로 책을 읽어야겠다는 지침을 만들게 되었다. 책을 읽는 것은 작가와 동화되는 과정이기도 하지만, 그와 다른 견해를 세우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김영하는 적어도 나의 무지를 일깨워줬으니 그가 전달하고자 하는 일부 생각을 간접적으로 관철시킨 것 맞는 것 같다. 

요즘 수 많은 책들을 읽으면서 내 인생이 바뀌고 있음을 직감하고 있다. 그 직감은 바로 이전에 느껴보지 못했던 지식에 대한 갈구일 수도 있지만, 새로운 것을 배우고 익히고 깨달음에 대한 행복일 것이다. 적어도 책은 내가 살아있음을 증명했고, 행복해지기 위한 또 하나의 든든한 가족의 느낌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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