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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대생의 심야서재 Feb 18. 2017

호주 시드니 - 포트스테판

어떤 운명이 닥치더라도 낯선 그곳에서 순수히 즐겼던 것처럼 그렇게 맞서자

파란과 회색의 천지였다. 두 가지 외에는 모두가 들러리였다. 어느 곳에 시선을 멈춰도 동일한 풍경이 다가왔다. 걸음을 멈추고 피곤이 누적된 가슴을 하늘 멀리 날려 버렸다. 복잡한 생각을 정화시키고 마음에 쌓였던 찌꺼기를 비웠다. 가슴속에 오래도록 묵었던 욕심을 비우고 나니 삶에 대한 새로운 갈증이 솟구쳤다. 나는 사막 가운데에서 생에 대한 열망을 꿈꿨다. 모래와 작열하는 태양이 전부인 죽음의 세상에서 생명을 동경했다.


사막이라고 하기에는 어딘가 석연찮은 언덕이 보였다. 이곳은 실제 사막이 아니라고 했다. 유난히 많은 모래가 산처럼 쌓여 사막과 유사한 모습을 그려낸 것뿐이라고 했다. 내가 기대했던 광활한 사막은 아니었다. 이곳은 사구였다


사구 언덕을 향해서 걸음을 옮겼다. 움직이려니 몸은 더 많은 에너지를 방출했다. 하늘에서는 광폭한 태양 광선이 내리치고 바닥에서는 열기가 끓어올랐다. 나는 해방되고 싶었다. 나를 가두는 모든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거추장스러운 신발을 던져버렸다. 뜨거운 열기가 발바닥 전체를 휘감았다. 모래 속으로 파묻히려는 중력에 맞서야 했다. 더 많은 힘이 들어갔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순간이었다. 공포스러운 현실이란 광활한 바다 건너편에 놓인 것이어서, 나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없었다. 나는 과거를 잊었다.

 


4륜 구동 짚을 이용하여 체험 삶의 현장(?)으로 이동했다. 짚은 흔들흔들 위태롭게 길이 아닌 곳을 개척했다. 덜컹거리면서도 무게 중심을 유지한 채, 모래 산맥을 거침없이 통과하는 짚의 힘이 느껴졌다. 짚이 울컥할 때마다 내 몸은 공중으로 솟아올랐다 다시 떨어졌다. 안전벨트를 일부러 매지 않았다. 방향과 가속도가 전하는 힘, 중력을 거스르는 에너지를 그대로 받고 싶었다. 환호성을 내질렀다. 스트레스를 창밖으로 토해내 버렸다.



우리가 이곳을 찾게 된 것은 다름 아닌 모래 썰매 - Sanding Borad - 를 즐기기 위해서 였다. 이 뜨거운 뙤약볕아래서 모래 썰매라니 움직이는 걸 귀찮아하는 나는 짜증이 났다. 내가 기대했던 것과는 약간 괴리감이 있었다. <꽃보다 청춘> 시리즈를 통하여 친숙해진 모습이었지만, 찰나의 기쁨을 위해서 버려야 할 것이 많은 활동이었다.  


선두에 나선 사람은 길을 개척하며 이동했다. 나는 그 사람이 밟은 흔적을 따라서 들숨과 날숨만을 반복하며 걸어가야 했다. 높은 언덕을 잠시 바라봤다. 높이가 전하는 공포감이 밀려왔다. 그냥 안 한다고 포기하기에는 이미 많은 지점을 통과했고 남자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40도가 넘는 기온, 따가운 모래 바닥, 무거운 썰매가 나를 바닥으로 내동댕이 쳤다. 높은 곳을 바라볼수록 남은 길이 더욱 험난해 보였다. 고개를 숙이고 앞사람의 흔적만을 더듬었다. 오르고 또 오르다 보면 언젠가 목표했던 지점에 닿을 수 있겠지. 작은 고난의 과정조차 견뎌내지 못한다면 앞으로 내가 무엇을 해낼 수 있을까... 놀면서도 삶을 때로 진지하게 바라보는 나의 관점이 우습기도 했다.



언제나 과정은 길고 지루하다. 시작과 중간 그리고 끝, 모든 것이 종결되었을 때 찰나의 기쁨이 주어진다. 그 환희의 유효기간은 짧다. 짧기에 마약처럼 그 순간을 기다리며 달성하려 한다. 그 과정을 무한히 반복한다. 마지막까지 가본 사람만이 얻을 수 있는 기쁨을 위해 우리는 인생을 살아갈지도 모른다. 그것이 가벼운 놀이이든 생산적인 배움이든, 그 무엇이건 간에 우리는 미래를 모른 채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가 마땅히 누려야 할 삶이기에, 한 번밖에 살 수 없는 기회이기에 그 시간을 즐기며 힘들더라도 버티는 것이다.


그 순간 나에게 주어진 것은 작은 용기, 무거운 썰매가 다였다. 필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단순하게 즐기면 됐다. 속도에 의지하며 밑으로 쏜살같이 쓸려 내려갔다. 내리쬐는 태양 광선에 맞서며 정상으로 오르기 위해 흘렸던 땀이 무색해지는 짧은 순간이었다. 두 번까지 시도하기에는 적당했지만, 세 번까지는 나의 몹쓸 체력으로는 무리였다. 선크림을 바르지 않은 부위가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짧은 사구 뒤로 끝없는 초원이 펼쳐졌다. 사막과 초원의 사투가 벌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서로의 영역을 지키려는 싸움이 바닥에서 언덕까지 이어졌다. 인간이 도달할 수 없는 미지의 세계였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넋을 놓고 풍경을 가슴에 새기는 일이었다. 내가 떠나지 않았으면 도달할 수 없는 경지의 느낌이었다. 이런 연유는 우리로 하여금 여행을 선택하게 한다. 인생은 낯선 경험의 간택을 기다린다. 우리는 어디로든 떠나야 한다. 침대에 누워서 누리는 휴식 따위는 잠시 거두어도 된다. 다음 기회는 영영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순간은 영원속으로 사라진다.


김화영은 <여행의 충격>에서 떠나는 것, 여행에 관하여 시인 프랑시스 퐁주의 '달팽이의 비유'를 통하여 설명했다.


도대체 저의 껍질 속에서 일단 몸을 빼낸 후에 움직이지 않는 달팽이를 우리는 생각할 수 없다. 휴식을 취하려 하자마자 그는 저의 속으로 들어가 버린다. 부끄러움 때문에 그는 저의 벗은 몸을 내보이는 순간부터 움직이지 않을 수 없다. 상하기 쉬운 저의 몸을 내보이는 순간 그는 움직이기 시작한다. 자기를 드러내는 순간 그는 떠난다.

프랑시스 퐁주



언덕 위에서 아래쪽을 내려다봤다. 따가운 태양을 피해 잠시 그늘에 피신한 사람들이 보였다. 가끔은 맞서는 것보다 피하는 것도 좋겠지. 달려야 할 때와 쉴 때를 구분하는 판단도 중요한 것이다.



사막 체험(?)이 끝나고 옆 해안으로 이동했다. 떠나기 전 잠시 주어진 휴식 시간이었다. 사막을 오르고 내려가느라 피곤이 누적됐었는데, 깨끗한 바다 앞에서 싹 가셔버렸다. 일행들은 신발을 벗고 바다에 발을 담갔다. 건조한 모래의 세상에서 탈출하자, 바다에 굴복해버린 젖은 모래가 길게 늘어섰다.

인간은 바다 앞에서 감정을 통제하지 못한다. 알 수 없는 깊이로 곤두박질치고 빠져든다. 한없이 작아지고 순수해진다. 바다라는 한 공간에 서 있는 우리의 마음은 일순간에 하나가 되고 친밀해진다. 같은 교감을 나눈다. 스스로의 마음을 낮추고 경배를 올릴 뿐이다.



파도는 서핑을 즐기기에 적당했다. 휴가를 만끽하고 있는 젊음의 에너지가 전달됐다. 잠시 한국의 자화상이 나타났다. 왜 우리는 제때에 쉴 수 없을까? 지금도 충분히 칭찬받을 만큼 일하고 있으나, 왜 제대로 보상받지 못하며 보장받은 권리를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양보해야 할까? 대한민국 직장인의 어두운 민낯이 파도를 타고 밀려들며 나에게 거칠게 대들었다.



파도와 하늘, 깨끗하게 정돈된 해안길을 따라 잠시 거닐었다. 담는 것이 모두 풍경이 되었다.



떠나야 할 운명인 여행자의 삶을 잠시 살았던 나. 한 장소에서 머무는 순간이 짧을수록 기억은 더 오래 남을지도 모른다. 붙들고 싶기에 기억은 사진과 글로 다시 태어났다. 나의 기억은 글과 사진의 형태로 때로 왜곡되고 지워지기도 했다. 뇌의 용량은 충분하지 않기에 보조적인 장치에 의지했다. 나의 모든 순간이 헛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어떤 운명의 순간이 닥치더라도 낯선 여행지에서 그냥 순수하게 즐겼던 것처럼, 그때의 마음을 기억했으면 좋겠다.

내 감정을 흔들어놨던 시드니의 사막과 바다. 시간이 지나도 잊을 수 없는 그때의 사소한 방황과 충돌들... 내 가슴에 신선한 울림을 던졌던 포트스테판의 추억을 영원히 기억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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