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는 인간을 규정하는 형식은 과연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듣기 좋은 소리, 칭찬을 갈구하는 나는 「신경 끄기의 기술」의 저자 '마크 맨슨'이 언급한 허세로 뭉쳐진 인간의 전형이다. 나는 온갖 잡것들에 신경을 쓰는 인간이다. 타인에게 어떻게 보일지, 타인이 어떤 내 모습에서 환호하는지 그런 것들에 유독 신경을 쓰는 타입이다.
습관적으로 거울을 들여다보며 근거 없는 단점 같은 것을 들추어내려고 혈안이었다. 단점은 정해져 있었는데, 주로 외모와 게으른 생활 패턴이 지적 대상이었다. 이를테면, 쉬는 날 어느새 수북이 자라난 수염이 문제다. 일단 면도부터 하고 나서 외출을 하겠다고 생각하는 것이라든지, 밖에 잠깐 외출하는 것인데 입고 나갈 복장부터 챙긴다던지. 신경을 써야 할 거리들은 나열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쌓여있었다.
회사에서는 말과 행동에 신경을 쓰고 살았다. 윗사람이건 아랫사람이건 소통에 문제가 있는 사람으로 비칠까 특히 말 하나하나를 다듬고 깎으려고 애썼다. 예전에 썼던 어떤 글에서 아예 입을 차단하는 편이 낫겠다고 '입의 주둥이 설'을 언급한 적이 있다. 말을 많이 하게 되면 쓸데없는 실수를 하게 될 공산이 크다는 '아버지'의 지론이었다. 그 말을 생각해보니 반은 맞고 반은 틀린 것 같다. 실수를 막으려면 행동 자체를 하지 않는 편이 맞기 때문이다. 다만 애초에 말을 봉쇄해 버린다면 유창하게 말을 할 수 있는 기회나, 사람들에게 나의 존재를 각인시키거나, 호감을 살 기회조차 박탈당하는 것이니 틀리기도 한 것이다.
인간은 신경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한다. 혼란스럽고 예측 불가능한 삶이 이어지면서도 인간이 대단한 이유는, 신경을 끊임없이 소모하기 때문이라고 마크 맨슨은 강조한다. 다만 어디에 신경을 쓰고 또 끌 것인가는 전적으로 우리의 선택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이 아닌 것에 신경을 쓰고 사는 이유는, 우리의 삶에 있어서 어떤 부분이 더 소중한지 명확히 판단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중요하지 않다는 판단의 근거는 어디에서 올까? 인간의 판단은 과거의 경험, 믿음에서 출발한다고 하는데, 나처럼 마음의 기반이 취약한 사람은 우선순위를 매기기 힘들다. 그래서 사소한 것에 자꾸 신경을 쓰고 사는 게 아닐까? 언제 죽음이 닥칠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우리는 한치의 앞을 예측하지 못하면서도 사소한 것에 자꾸만 휘둘리는 게 아닐까.
20년 정도 되는대로 산 것 같다. 직장에 들어가고 성공해야겠다며 맹목적으로 타인의 가치를 추구하기만 했다. 나는 누군가의 추종자가 된 것이다. 추종자의 삶은 방향이 정확하지도 않고 내 것도 아니라는 데 큰 문제가 있다. 예를 들어, 어느 동네가 좋다는 소문을 들으면 그 동네의 아파트를 구매하기 위해 뛰어다녔고, 다시 다른 동네가 좋다고 하면 당장 짐 싸고 떠나야 하는 사람처럼 조급하게 행동했다.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다니는 그런 '인기' 프로그램에 편승하려 한 것이다.
대중의 인기 현상을 따라다니는 문제는 그곳에 우리가 없다는 것이다. 타인이 선호하는 인기 모델이 내 것인 줄 착각한다고 할까? 인기를 얻기 위해, 그것이 부를 축적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라 한다면 우리는 기꺼이 그곳에 고통을 투자한다. 어떤 이익을 얻는 길은 보통 공짜로 주어지지 않는 것 같다. 어떤 방식으로든 고통이 수반된다. 그것을 견디지 못하면 마지막에 얻는 기쁨, 희열 같은 것도 없다. 물론 고통을 통하여 얻는 보람이나 성취감 중에서 부동산이라는 예가 적절한지는 모르겠다. 다만 무엇이든 우리가 얻으려고 하는 목적에는 적지 않은 고통이 투입된다는 의미다. 내가 수없이 이사 다녔던 것처럼.
https://www.youtube.com/watch?time_continue=1&v=Sjf4ZOQBnr4
유튜브에서 가끔 조성진의 피아노 연주를 듣는다. 그가 설명하는 쇼팽의 발라드 1번의 감성은 평범한 사람들이 느끼지 못했던 부분을 건드린다. 그의 연주가 독보적이라고 느낀다. 우리는 천재적인 연주 실력에 처음 놀라고 건반을 건드리는 세밀한 감성에 두 번 놀란다. 그리고 부러워한다. 어떻게 저런 재능을 갖게 되었을까? 나도 연습하면 가질 수 있을까? 물론 생각으로 그치는 경우가 많다. 생각이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 아닌가. 우리는 오늘도 게으르게 살고 싶어서 가능성을 버린다. 전문가가 되기 위한 '1만 시간의 법칙'이라는 문구처럼 어떤 분야든지 노력이 필요하다. 노력은 고통을 원한다. 고통을 견디지 못한다면 다른 사람은 될 수 없다. 항상 과거의 패턴에 얽매여 비슷한 하루를 시작하고 마감하다 인생이 끝날 것이다. 되고 싶은 모델이 있어도 고통을 참기 힘들어 포기하고 말 것이다.
「신경 끄기의 기술」은 자기계발 서적이다. 하지만 마음을 건드리고 어떤 동기를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 차별화된 점수를 주고 싶다. 특히 마지막 부분의 저자의 독백이 마음에 와닿았다. 자기계발 서적도 얼마든지 마음을 울릴 수 있다. 책을 읽고 밑줄을 치고 또 덮고 나서 계속 생각을 하게 되고, 많은 글감을 안기는 책이다. 책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열거하지 않았다. 책에서 느낀 감정을 전달하려고 작가의 시점에서 이입을 하며 글을 썼다. 이 글이 누군가에게도 인사이트 Insight를 전달했으면 좋겠다.
겁낼 것 없다. 전혀, 그리고 이 깨달음을 마음의 정중앙에 놓는 데 도움이 되는 유일한 방법은 내가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거듭 상기하는 것이다. 방법은 다양하다. 명상을 하거나 철학책을 읽어도 되고,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절벽에 서는 것처럼 미친 짓을 해도 된다. 나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나의 덧없음을 이해한 뒤로 모든 게 쉬워졌다. 이를테면 중독에서 벗어나고, 나의 허세를 확인해 맞섰으며, 내 문제를 책임지게 되었다. 또한 두려움과 의심으로 인한 고통이 가벼워졌고, 실패와 거절을 받아들이기가 수월해졌다. 이 모든 것이 언젠가는 내가 죽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 덕이었다. 어둠을 깊이 들여다볼수록, 삶이 밝아지고, 세상이 고요해지며, 어떤 것에건 무의식적으로 저항하는 습관이 줄어든다. - P 2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