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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대생의 심야서재 Apr 21. 2017

머리가 좀 더 길어져 힘이 생긴 것 같았다

자유를 만끽하고 싶었다.

봄바람이 벌겋게 익어갈 무렵이었다. 세상 흘러가는 속도에 반응하지도 못할 만큼, 일방적으로 시간이 성큼성큼 달아나는 나날이었다. 한동안 일에 푹 빠져 살았다. 일은 나에게 무시할 수 없는 근엄한 존재 같았다. 대부분의 시간은 철저한 규칙대로 흘러갔으며 나는 마음을 버린 채, 무의식적인 흐름을 따랐다. 그것은 누군가 강제로 규정한 시간이기도 했지만 스스로 지키겠다고 다짐한 시간이기도 했다.

연구원들은 끝이 없는 프로젝트에 정신을 쏟아붓고 있었다. 우리는 절체절명의 시간을, 내일이 없는 오늘을 달렸다. 때로는 개인을 내던져야 했으며 불확실한 미래에 도박을 해야만 했다. 오늘은 잠시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쉴 필요가 있었다. 

"저녁이나 함께 할까..."

나는 자신 없는 말투 하나를 슬쩍 떨구었다. 피로에 처진 사람에게 차라리 퇴근이 더 맞지 않을까라는 먹먹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다른 편으론 모처럼 집중한 사람들의 시간을 흐리게 하는 건 아닌지, 공연히 마음을 술렁거리게 한 것 같아 미안하기도 했다. 그들에게 닿은 내 목소리가 안으로 자꾸 감기는 것 같아 울컥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고요한 사무실에 공명을 울린 건가 싶어 다행이었다. 팀원들에게 내가 던진 말이 부디 소음이 되질 않길 바랐다.

오래간만에 우리는 고깃집에 모였다. 각자가 묵혀놨던 불만들을 차례대로 불판 위에 털어놓으니 고기 구울 자리가 모자라도록 난장판이었다. 우리는 핏대를 세우고 고기가 익건 말건 목청껏 떠들었다. 그러다, 고기를 씹는 건지, 사람을 씹는 건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질겅질겅 씹었다. 누군가는 적당히 고기가 구워지기를 진득하게 기다렸고, 누군가는 기다리지 못하고 뒤집는 것을 수차례 반복했는데, 그것은 세월이 흘러가는 것을 멍하게 바라보는 우리의 현실과 닮아 있었다.

"소장님 머리가 엄청 길었어요, 머리 안 깎으세요?"

뒤통수를 망치로 때리는 것 같았다. 그렇지 않아도 조금 의식은 하고 있었는데, 난데없이 지적질이 날아올지는 몰랐다. 사실 요즘 내가 머리를 기르는 건 별다른 이유가 없었다. 단지 귀찮고 게으르게 살고 싶다는 욕구이자 반항이라고 할까? 세상을 너무 정해진 대로 살아가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삐딱하고 싶었을 뿐 다른 이유는 없었다. 나는 영화 <플랜맨>처럼 약속대로 흐트러짐 없이 살았는데, 때가 되면 머리를 깎아야 하는 것조차 반듯해야 하는 건지 그 규칙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무언가로부터 자유로워지고 형식에서 몇 발자국 떨어지고 싶었을 뿐인데, 뻗어나가려 하는 내 날개를 누군가 잡아채는 것 같았다.

"어…… 기를 때까지 길러보려고…… 이건 말이지 자유의 상징이야 ……"

스스로 던져놓고도 어이없는 말이었다. 내 처지에 맞는 대답인가 우습기도 했다. 내가 저항하고 있는 대상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상황에, 도대체 자유란 무엇이란 말인가. 조르바에게 물어봤었고 그에게 깊이 의지할 때는 이해한다고도 믿었지만, 그것은 금세 잊혔고 사라졌다. 어쩌면 자유란 망각일지도 모르겠다. 나에게 씐 굴레의 정체를 차라리 모르는 것이 편했다. 자유를 만끽한다는 건 내 얼굴에 씐 잔혹한 검투사의 투구 같은 것을 받아들이는 거였다.

그냥 나는 웃어넘겼다. 내가 아재 개그를 날린 건 아닌지 눈치를 슬쩍 살폈다. 그리고 농담 같은 말 한마디도 공허함 속에 묻혀 지워져 갔다. 젊은 사람들과 공기를 나눌 수 있어 에너지가 차오르는 듯한 시간이었다. 우리는 두어 시간 동안 떠들다, 잠잠해지다가를 반복했다. 얼마가 흘렀을까? 분위기가 건조해지자 다들 자리를 옮기고 싶어 했다. 나는 그 순간 아쉬웠지만, 사라지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들은 나를 만류했다. 하지만 나는 잘 안다. 때로는 거룩한 퇴장이 필요함을, 못 이긴척하고 끌려가는 짓이 얼마나 어리석은 지 안다.

팀원들의 아쉬운 얼굴을 확인하는 것으로 족했다. 내가 아직은 필요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 가슴이 벅차올랐다. 나는 부쩍 길어진 머리를 한 번 쓸어내리고 자리를 떴다. 그리고, 다시 사무실로 돌아와 마무리하지 못한 일에 빠져들었다. 그 순간 나는 힘들었으나 행복했다. 머리가 좀 더 길어져 힘이 생긴 것 같았다. 삼손도 그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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