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관심의 세상
근래의 삶을 분석해보면 무관심이 나란 존재를 지배하는 형국이다. 웬만한 일에도 분노하지 않으며 그렇다고 좋은 일이 생겨도 썩 기쁘지도 않다. 왜 마음이 무기력하게 되었을까,라고 해석해보아도 뚜렷한 이유도 없다. 그냥 살다 보니 늘 삶이란 그렇게 흘러가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어마어마한 감정의 융단 폭격을 받은 날이 있었다. 옛날의 나 - 그래봤자 신입사원 시절 - 라고 한다면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여 밖으로 감정을 어떤 방식으로든 발산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감정이란 것은 차분해지는 법이었다. 분노를 다루는 방식에 좀 더 노련해진다고 할까? 과거에는 단순히 안으로 삭혀서 그 불똥이 엉뚱한 곳에 튀었다면, 이제는 마치 핵에너지를 안전한 곳에 봉인하듯이 그렇게 내 마음도 봉인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감정을 다루는 것에 익숙해진다 하여도, 그런 순간이 오면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고 대뇌에 혈액이 충분히 공급되지 않아 편두통이 일어났다. 그런 이상 증세가 일어나고도 남았을 텐데, 어떤 날은 이유 없는 안식이 찾아오기도 했다. 인간이 가진 감정엔 총량의 법칙이 있어서 그것을 제대로 단속하지 않아 조기에 소진해버린다면, 남은 인생을 감정 불구자로 살아야 하는 건 아닌가,라는 무서운 생각 때문이다. 그래 나는 누군가의 감정 쓰레기통이 되곤 했지만, 그런 억압의 상황에서도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화를 언제 내었는지, 어떻게 화를 부리는 것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나는 감정을 잃은 인간이 되어가는 것이다. 문제는 내 감정에 상처가 나고 있었음에도 통증을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상대방은 더욱 아프게 마음에 생채기를 내며 나의 인내를 시험하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나는 상대의 잔인무도한 의도를 모르는 척했다. 물론 겉으로도 아무렇지도 않은 척했다. 그것이 삶의 지혜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당신이 나를 찔러도 아프지 않다,라고 보여주는 것으로 나는 평화를 얻고 상대방에게는 공격의 의미를 잃게 하는 방식으로 나는 저항했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양로원으로부터 전보를 한 통 받았다.
‘모친 사망, 명일 장례식. 근조(謹弔).’ 그것만으로써는 아무런 뜻이 없다. 아마 어제였는지도 모르겠다.
알베르 카뮈의 소설 ≪이방인≫에 등장하는 첫 문장이다. 소설의 주인공인 '뫼르소'는 엄마의 죽음에 대하여 객관적인 사실을 보도하는 기자처럼 말한다. 그 말에는 어떠한 감정도 실려있지 않다. 단지 뫼르소는 사실을 건조한 투로 보도했다. 누구에게? 바로 자신에게 알리는 것이다. 엄마가 언제 죽었는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뫼르소에게 그 시점은 특별한 의미가 없다. 엄마라는 존재는 그에게 어떤 의미인가. 엄마가 집에 있는 동안에 뫼르소와 아무 말없이 지켜보며 시간을 보냈다는 것으로 짐작했을 때, 그와 엄마 간의 유대감이 없었음을 어림 짐작할 뿐이다. 그렇다면 뫼르소는 패륜아인가? 사이코패스인가? 일반적인 사회의 기준으로 판단한다면 그렇다고 할 수 있겠다. 엄마의 죽음을 놓고서도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그에게 어떤 면죄부를 줄 수 있단 말인가.
엄마의 장례식장에 가는 길, 뫼르소는 버스에서 무심하게 잠에 빠진다. 어떻게 잠을 잘 수 있을까? 엄마가 죽었는데 말이다. 충격인 것은 장례식장에서 엄마의 마지막 얼굴을 보겠냐는 문지기의 말과 이어지는 그의 대답이었다. 관을 여는 문지기의 행동을 제지하고 "안 보시렵니까?"라는 질문에 "네"라는 말을 툭 던진다. 그리고 뫼르소는 엄마의 장례식장에서 담배를 피우고 밀크 커피를 마신다. 단지 그것을 좋아한다는 이유로, 거부할 이유가 없다는 이유로. 시신을 안치하러 이동하는 도중에는 햇살 아래서 더위를 참지 못하여 그곳에서 빨리 벗어나겠다는 상상을 한다. 장례식장을 다녀와서는 검은 넥타이를 맨 자신을 보고 놀란 여자 친구를 향하여 아무렇지도 않게 엄마가 죽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멀쩡히 수영한다. 단지 엄마의 죽음이던, 그것 때문에 직장을 그만두게 되었던 상황이던 자신의 탓이 아니라는 생각은 한다. 단지 당사자에게 더 잘못이 있다는 생각을 하며.
우리 둘이 옷을 다 입었을 때, 내가 검은 넥타이를 맨 것을 보고 마리는 매우 놀라는 표정이 되면서, 상을 당했느냐고 물었다. 나는 엄마가 죽었다고 대답했다. 언제 그런 일을 겪었는지 알고 싶어 하기에, 나는 “어제.”라고 대답했다. 그녀는 흠칫 뒤로 물러섰으나, 아무런 나무람도 하지 않았다. 그건 내 탓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그런 소리를 사장에게도 한 일이 있었던 것을 생각하고 그만두었다. 그런 말을 해 본댔자 무의미한 일이었다. 어차피 사람이란 조금은 잘못이 있게 마련이니까
그는 불량배인 레몽을 친구로 사귀고 - 사귀지 않을 이유가 없으니까 - 그의 부탁에 따라 누군가에게 폭력을 휘두른다. 그리고 해변가에서 레몽에게 복수를 하러 온 정부의 패거리 중 한 명을 우발적으로 권총으로 쏴 죽인다. 이 소설은 1부와 2부로 나뉜다. 1부는 엄마의 죽음과 그것을 무감각적으로 받아들이는 뫼르소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을, 2부는 살인을 저지른 이후 법의 심판을 받게 되는 상황을 대칭적으로 그린다.
카뮈는 이 소설에서 세 가지 죽음을 다룬다. 양로원에서 외로운 죽음을 맞이한 뫼르소의 엄마, 알제 바닷가에서 뫼르소가 총으로 쏴 죽인 아랍인, 그리고 그것으로 인하여 죽음을 맞게 되는 뫼르소 자신. 뫼르소와 가족이라는 매개체로 연결되어 있지만 그와 상관없는 엄마의 죽음, 직접 자신의 손으로 죽인 아랍인, 두 번째 사건으로 인하여 스스로를 파멸시키고 마는 형사 재판. 죽음이 가까운 곳에서 노크를 하기 시작한 후에야 삶의 본질을 깨닫기 시작하는 뫼르소. 그래서 다시 살고 싶다고 부르짖는 뫼르소.
이 소설은 부조리를 다룬다. 그가 살인을 저지르긴 했지만, 단지 엄마의 죽음 앞에서 불손한 자세를 보였다는 이유로 재판에서 불리한 결과를 맞는 것이다. 뫼르소는 자신에게 정직하다. 심지어는 부조리한 사회의 현실 앞에서도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철저하게 자신을 사랑한 남자, 그의 죄라고 한다면 단지 자신에게 솔직했던 것뿐이다. 하지만 마지막 죽음을 앞두고 그는 깨어난다. 인생 마지막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죽음의 의미가 무엇이라는 것을 느낀 것이다. 소설은 자신을 낳아준 엄마에 대한 죽음으로 시작하여 자신이 저지른 제3자의 죽음, 그리고 자신의 죽음으로 결론을 내린다.
어머니를 양로원에 넣었다고 동네에서 나를 좋지 않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만, 그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며, 내가 엄마를 퍽 사랑했다는 것을 알고 있노라고 말했다. 지금도 여전히 그 까닭을 알 수 없지만, 나는 엄마 때문에 내가 악평을 받고 있다는 것을 그때까지 전혀 모르고 있었으며 나에게는 엄마를 돌볼 사람을 둘 만한 돈이 없었으므로 양로원에 넣는 것이 마땅한 처사로 생각되었던 것이라고 대답했다.
얼마 전 새움출판사에서 소설 <이방인>을 새로 번역하며 기존 김화영의 번역을 문제 삼았다. 신문기사에서는 뫼르소가 아랍인을 살해하는 장면에서, 김화영 번역가는 강렬한 태양빛이었다고 번역했으나, 그것이 아니라 태양빛을 반사하는 아랍인의 칼이었다고 다른 번역을 내민다. 태양빛과 태양빛에 비치는 칼의 번뜩임은 느낌 자체가 다르다. 정당방위냐 단순하게 살인을 저지르냐라는 시각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부분이 그렇게 중요할까? 나는 그 장면의 미묘한 차이는 이해하지만, 카뮈가 이야기하고자 했던 것이 흔들린다,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나는 김화영이 번역한 민음사의 <이방인>을 읽었다. 번역자의 생일과 <이방인>의 출간일이 동일하다는 이야기로 소설과의 인연을 이야기한다. 다양한 시각에서 이 소설을 연구할 만큼 문학에 있어서 가치가 높은 작품이라 하겠다. 이 소설의 분량은 아주 짧다. 단편 소설이라 할 정도로 이야기는 짧지만, 이 심오한 소설이 담고 있는 이야기는 쉽게 풀어낼 수 없을 정도로 깊다. 아마도 소설 <이방인>을 이해하려면 그가 남긴 작품들을 모조리 섭렵해야 할듯하다. 그래야만 카뮈가 이야기하려고 했던 세계관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https://www.huffingtonpost.kr/2014/03/29/story_n_5053660.html
실존주의 문학, 부조리를 대표한다는 <이방인>에서 카뮈가 이야기하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이방인이라는 것, 삶에서 자신이 소외되어있고, 단지 방관자일 뿐이라는 것, 그러한 것이 결국 인생이고 그렇게 살다가 죽음을 맞는 것이 우리의 삶이라는 것을 전달하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내가 살고 싶어도 죽음은 늘 가까이 있고, 죽고 싶어도 때로 살아야 하는 것이 인생이듯 말이다. 슬프고 기쁜 극과 극의 감정을 느끼는 것보다는 무감각하게 살아가는 게 더 편하다는 인생의 부조리를 가르치려 했다는걸. 그는 그런 방식으로 죽음을 자신의 것으로 소화시킨다.
나는 늘 최악의 경우를 가정하곤 했다. 상고기각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래, 그렇다면 나는 죽을 수밖에 없는 거다.”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죽는 것은 분명했다. 그러나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없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결국, 서른 살에 죽든지 예순 살에 죽든지 별로 다름이 없다는 것을 나도 모르는 바 아니었다. 그 어떤 경우에든지 당연히 그 뒤엔 다른 남자들 다른 여자들이 살아갈 것이고 여러 천 년 동안 그럴 것이니까 말이다. 요컨대 그것보다 더 분명한 것은 없다. 지금이건 이십 년 후건 언제나 죽게 될 사람은 바로 나다.
내가 살아온 이 부조리한 전 생애 동안, 내 미래의 저 밑바닥으로부터 항시 한 줄기 어두운 바람이, 아직도 오지 않은 세월을 거슬러 내게로 불어 올라오고 있다. 내가 살고 있는, 더 실감 난달 것도 없는 세월 속에서 나에게 주어지는 것은 모두 다, 그 바람이 불고 지나가면서 서로 아무 차이가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의 죽음, 어머니의 사랑, 그런 것이 내게 무슨 중요성이 있단 말인가?
그는 자신의 죽음이 바로 코앞에 닥쳐왔을 때 무관심의 영역에서 탈출한다. 행복하다.라고 말하는 뫼르소, 그는 감정을 마지막에 느낀다. 그리고 구경꾼들이 자신에게 와서 자신의 죽음을 증오해줬으면 바란다. 자신의 죽음을 대면하는 뫼르소는 재판장의 결정이 아닌 스스로 죽음을 집행하겠다는 의지를 나타내는 것이다. 뫼르소에게 일어났던 세 가지 죽음 중에서, 자신의 마지막 죽음 앞에서 비로소 그 의미를 깨닫는 것으로 삶은 의식을 찾는다. 무관심의 세상에서 깨어나는 것이다. 뫼르소는 솔직함을 마지막까지 벗지 않는다.
나는 처음으로 세계의 정다운 무관심에 마음을 열고 있었던 것이다. 세계가 그렇게도 나와 닮아서 마침내는 형제 같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나는 전에도 행복했고, 지금도 행복하다는 것을 느꼈다. 모든 것이 완성되도록, 내가 덜 외롭게 느껴지도록, 나에게 남은 소원은 다만, 내가 사형 집행을 받는 날 많은 구경꾼들이 와서 증오의 함성으로 나를 맞아 주었으면 하는 것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