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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대생의 심야서재 Jul 18. 2018

직장 다니며 꿈을 펼쳐나가기

내가 딴짓을 하는 이유

  탄탄한 직업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과 다른 일을 병행하는 것을 과연 지속할 수 있을까. 왜 나는 현재에 만족하지 못하고 다른 가치를 찾아 헤매는 걸까. 어느 선에서 납득을 할 만큼 욕망의 총량은 여전히 채워지지 못하고 있는 걸까. 원초적인 욕망과 성취하고 싶은 생산적인 가치를 앞두고 원색적인 다툼과 교란이 펼쳐진다. 그것은 내적 갈등이 주원인이다. 타인에게서 기인하는 것이 아닌 순전히 먼 마음속의 고장에서부터 출발하는 근원이 없는 그 어떤 것.

  아주 오래전, 앱 개발 러시가 시작되었을 때 맥북 한 대를 장만했다. 초대박을 터트렸던 신흥 스타트업 또는 슈퍼 개발자의 신분 상승을 목도하고, 단기간의 승부수를 띄워 보고 싶어서였기에... 하지만 그런 것들은 보통 뜬구름들이었다. 로또 숫자를 맞춰보겠다고 확률 분석기를 만들었던 부질없는 노름처럼. 다소 확률은 나을지언정 도달하기는 여전히 어려운 희망의 바닥 같은 것들. 직업과 관련 없는 정반대의 세계를 탐구하기 위해 몸부림만 쳤다. 그때 비싼 값어치를 치렀던 맥북은 조기에 중고 시장에 처분하는 신세를 면치 못했지만.


딴짓의 연속들


  한때는 게임에 미친 삶을 살았다. 블리자드에서 나온 게임에 미쳐서 금요일 밤이면 PC 앞에서 가부좌를 틀고 다음날 새벽까지 물 한 잔도 안 마신 채 열중했다. 허무한 새벽을 맞을 때마다 인생의 소중한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는 탄식이 밀려들었지만, 벗어날 수 없었다. 중독이란 건 그토록 무서웠다. 죽음이 당장 옆구리를 찌르고 있어도 그 통증을 감지하지 못할 정도로 말이다. 나중에 아내는 이혼을 고려할 정도로 정신이 빈곤 상태에 빠져있었다고 털어놨다. 그 이야기를 중독에 빠져있을 때는 듣지 못했다. 나중에 번쩍 정신이 들 때가 찾아오고 나서야, 영혼이 거의 파괴 직전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내의 고충조차 들을 수 없을 정도로 한 가지에 대한 지나친 집착은 영혼을 파괴 시키고 만다. 

  사업을 하겠다고 뛰어든 적도 있었다. 너무 사람을 깊게 믿은 게 잘못일 정도로, 그 사람이 믿었던 선배이든, 동창이든 나는 배신을 당했고 또 가차 없이 버리기도 했다. 사업을 하면서도 무언가를 동시에 소유하려 했다. 먹고살기 위해서, 사랑하는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기 위해서라는 이유를 대며.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사업이 이상적이지도 또 탐구할만한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현실적인 결론을 얻기까지, 적잖은 시간이 투입됐지만 생각은 바뀌지 않았다. 물론 오랫동안 몸담았던 분야에 한정하여 말이다. 사업이 나쁘다는 게 아니다. 철저한 분석과 계획 없이 뛰어들어서 몸으로 부딪혀보려고 했다는 것이 문제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게임하듯 뛰어든 사람이 성공하는 사례도 있는 것을 보면 내가 실패했다는 것을 그럴듯하게 판정하기 위하여 과거를 반성하려 드는 의도일지도 모르겠다. 성공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는 모두 합당한 이유가 있겠지. 미세하지만, 운이라는 요소가 덜 작용했을 것이라 믿고 싶을 뿐이다.

악기를 배워보겠다고 전적으로 취미 삼아 여가시간을 활용한 적도 있다. 기타를 배웠고 하모니카를 불었고 피아노는 시작하려다 포기했다. 모두 독학이었다. 기타는 타브 악보를 보며 코드 잡는 수준에서 끝났고 하모니카는 부르다 보니 동요 정도는 저절로 입이 음을 따라가더라. 피아노는 시작한 지 하루 만에 접었지만, 가장 아쉬운 대목이기도 하다. 언젠가 다시 손을 댈지도 모르겠다.

  이런 활동들은 모두 직장, 퇴근 후에 펼쳐진 움직임들이었다. 야근과 철야가 이어졌지만 몇 시간이나마 꿀같은 휴식이 필요하지만, 왜 직업이 아닌 것들에 빠져들려 노력했을까. 그 과정이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왜 그래야 했을까. 


"나한테 대체 왜 그랬어요?"

  내 영혼을 조종하는 다른 미지의 존재라도 품고 싶었던 걸까. 어쩌면 그 존재를 인식하지 못했을 뿐, 아니 내면에 거주하는 세계를 인정하지 않았을 뿐, 세상 어느 곳에나 이미 실재하는 세상을 보지 못했던 건 아니었을까. 거부하여도 그럴 수 없는 결국 귀의할 수밖에 없는 어떤 지적인 존재의 지침을 따라 본능적으로 내가 움직이고 있었던 건 아니었을까. 

  나는 또 밤이면 딴짓을 한다. 이제는 과거에 벌인 짓거리들과는 한 차원 다른 초월적인 일들을 벌이고 있다고 믿으며. 또 다른 납득과 만족을 차지하기 위해서 의식의 기저에 깔려 있는 것들과 합의를 본다. 수없이 많은 난관을 겪었던 오차의 결과와 엉뚱한 길로 접어들어서 방황했던 역사를 바로잡기 위하여, 우리가 다시 선택을 하는 것처럼, 나 역시 올바른 방향으로 선회하고 있다고 믿으며.

  밤이면 의식은 더욱 선명해진다. 몸과 마음은 엇박자다. 지금 열중하고 있는 수단이 부디 마지막이었으면 한다. 깊은 곳으로 침전하면 할수록 어둠이 아닌 빛을 찾을 수 있다고, 비록 그것이 거짓일지라도 죽음이 닥치기 전에, 삶의 마지막과 조우했을 때 절대 후회 따위는 없었다고 증명하기 위해서. 직장을 다니면서도 꿈은 여전히 아름답게 펼쳐진다. 따분하고 공허한 것이 싫기 때문에. 아니라면 그저 딴짓이 좋아서. 


The wise use of leisure, it must be conceded, is a product of civilization and education. A man who has worked long hours all his life will become bored if he becomes suddenly idle. But without a considerable amount of leisure a man is cut off from many of the best things …

버틀런드 러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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