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공대생의 심야서재 Aug 05. 2018

실체가 없는 공포가 현실이 될 때

진정한 공포가 찾아온다.

 공포는 현실감이 없다. 실체가 없어서 손에 잡히지도, 규모가 어떨지 상상조차 하지 못한다. 공포는 막연한 두려움을 몰고 온다. 하지만 현실과 공포 간의 이격이 벌어질수록 우리는 그것이 자신과 관계없다고 믿는다. 공포는 예측이 불가능한 미래의 불확실한 감정 들이다. 

 인간은 부모로부터 태어났으나 부모에게 속하지 않는 독립을 끊임없이 갈구하는 존재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모순을 떠나서 어디로 나서야 하는가. 자유 의지대로 항해할 자격과 기술은 갖추었는가. 무엇을 신뢰할 수 있고 무엇을 버릴 수 있는가. 우리에게 도움을 줄 사람은 누구이고, 우리는 구원을 받을만한 충분한 자격을 갖추었는가.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 생과 사의 충돌, 현재에서 채워지지 않는 무력감, 우리를 향해 닥칠 폭풍우를 알면서도 우리는 시스템의 예측대로 미래로 향해 간다. 흔들거리며, 난파하며, 쓰러지며, 무인도에서 굶주리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걸 알면서도.

 미래는 꽤 연속적인 두려움의 꾸러미를 양산한다. 시간은 퇴보하지 않고 급속도로 전진하기만 한다. 시간에 쫓기는 삶을 사는 사람은 언제나 막연한 공포에 떤다.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고 바닥에 엎드려 다가오는 시간을 허망하게 바라본다. 공포는 증발하는 시간이며, 사라지듯 튕겨나가는 과거에 대한 관성이다. 우리 어찌 낭만적인 시각을 가지겠는가. 실체도 없고 본질조차 짐작할 수 없는 공포가 밀려오는데.

 공포는 허상이다. 실체화될 수 없는 공포는 우리에게 공포로서의 자극적인 이미지를 전달하지 않는다. 충격적인 이미지, 끔찍한 예언조차 가능성이 수반되지 않는다면 공포로서의 자격을 상실한다. 얼마 전 치과에 가야 할 일이 있었다. 치과에서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운명적 사건 자체는 나에게 약간의 공포를 주긴 했으나 막상 시간이 닥치기 전까지는 그것은 공포가 아니었다. 그것은 금세 유실되었고 잊혔다. 공포는 그저 막연한 두려움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미래가 현실로 자리를 탈바꿈할 시간으로 바뀌어갈수록, 내 심장을 조여오는 상황이 닥칠수록 공포는 감정을 지배하고 교란시키기 시작했다. 공포가 실체를 드러내는 순간은 그것이 고통으로 다가올 때이다. 공포는 고통과 괴로움으로 둔갑한다. 이때 공포는 최고조로 상승하여 마음을 어지럽히고 신경계를 교란한다. 아주 작은 통증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공포와 만나 경험적 사실이 되고 완벽한 공포로 다시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특히 공포의 힘은 예측할 수 없을 때 더 강하게 드러난다. 인간은 불가능하더라도 미래를 예측하려 한다. 공포가 미치는 시점의 파괴를 상상한다. 환상계가 지배하는 현실이 아닌 세상의 고통을 잠시라도 체험하려 하거나 고통의 깊이를 가늠하려 노력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나약한 인간이라서 그러한 활동조차 모두 의미 없음을 안다. 그렇게 예측하는 방식이 병폐라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그 감정을 버릴 수 없다. 무지막지한 주삿바늘이 잇몸을 뚫었을 때, 그 순간에 찾아온 감정은 막대한 규모로 내 영혼을 파괴한 실체적 공포였다. 예측하지 못한 상황이 닥쳤을 때,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상태로 전락한다. 무방비 상태로 아무런 전술조차 시도하지 못하는 상태로 적에게 굴복하는 것이다. 그 이후 찾아오는 공포는 가장 심대하고 막대한 에너지로 나를 덮는다. 말하자면 나는 완전히 잠식당한다. 공포에 침략당하여 내가 보유했던 안락한 평화를 빼앗기고 마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공포는 실재하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공포가 현실이 되었을 때, 얼마나 많은 두려움과 감정의 폐해를 가져오는지 실감하는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직장 다니며 꿈을 펼쳐나가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