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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대생의 심야서재 Aug 13. 2018

리스본행 야간열차 리뷰

질서는 무질서를 낳는다.


 안정적인 삶, 누구나 꿈꾸는 인생의 중요한 가치 중 하나다. 당장은 아쉬워도 희생하고 절약하면 미래에는 달콤한 순간이 찾아올 거라 믿고 싶다. 현재는 다소 불안하고 어두운 구석이 있지만 남들도 다 비슷한 삶을 살아간다고 그들처럼 견딜 수밖에, 대안은 없다고 스스로의 인생을 작은 테두리 안에 가두어 버리기도 한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안정적인 삶이라 착각한다. 자신이 다람쥐처럼 쳇바퀴 안에 같은 자리를 매일 도는 삶을 살면서도 그 삶이 단조롭다거나 지루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만족하며.

 그런 체념의 인생을 20대에 시작하여 50대, 60대까지 이어나간다고 가정해보자. 운이 좋으면 언젠가는 사회적으로 꽤 성공을 거두고 큰 부를 축적하고 사랑하는 가족까지 꾸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모두가 바라는 안정적인 삶, 규칙적이면서도 질서 정연한 행복들, 적당한 부까지 찾아오면 우리는 그것들이 죽을 때까지 유지되었으면 하는 기대를 가진다. 그리고 나머지 삶도 지금처럼 평탄하게 원하든 대로 흘러갈 것이라 바라면서……



 '파스칼 메르시어'의 영화, <리스본행 야간열차>에 등장하는 주인공 그레고리우스 교수가 바로 그러한 안정적인 삶을 지키려는 사람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폭우가 쏟아지는 저녁, 난간 위에 위태롭게 선채 자살하려는 여자를 발견한다. 그는 외면하지 않고 난간으로 달려가 몸을 날려 여자를 구한다. 예측하지 못했던 단 한순간의 선택과 갑자기 나타난 정체 모를 여자 그리고 책 한 권과 리스본행 열차 티켓 때문에 그레고리우스의 삶은 반듯한 질서에서 벗어나 예측할 수 없는 무질서의 세계로 편입된다. 그는 기존에 자신이 그토록 유지하려던 체계를 한 번에 무너뜨리고 거부한다. 알 수 없는 우연의 기류에 이끌려 안정적인 삶을 버리고 모험이 가득 찬 삶을 택한다.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에너지는 일정한 양을 가지며 한 가지 방향으로만 흐른다는 '엔트로피의 법칙'에 따라 우리의 인생도 안정적인 상태에서 불안정한 상태를 맞는다. 시간은 과거에서 미래로 흐르고 과거로 되돌릴 수 없다. 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 진리다. 영원히 안정적일 것만 같던 현재의 삶도 결국은 무질서한 형태로 변해가는 엔트로피의 법칙을 따를 수밖에 없으며 결국 붕괴된다. 그것의 최종 기착지는 바로 종말, 즉 죽음이다.



 원하건 원하지 않건 질서는 무질서라는 혼란으로 빠질 수밖에 없. 삶은 바닷가에 세워진 위태로운 모래성에 불과하다. 탄탄해 보이는 삶도 파도 앞에 무너지는 무기력한 모래성처럼 비슷한 파국을 맞는다. 그러한 운명을 타의적으로 맞기만 할 것인가, 주체적인 생각으로 맞설 것인가. 결과는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타인에게 이끌려가는 삶을 사는 사람은 절호의 기회가 주어져도 그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며 외압에도 무너지기만 한다. 그레고리우스 교수가 누린 안정적인 삶, 그런 정해진 운명을 받아들이기만 해야 할까. 지금까지 살아왔던 삶의 방식에 위배되는 선택을 해야 할까.

 삶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을 만큼 때로 불안한 구석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찰나의 안정이라도 찾으려고 하는 것이 인간의 본능이다. 안정적인 삶은 적당한 부의 축적에서 출발한다고 믿는다. 인간답게 살기 위한 안정적 수단들, 이를테면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하는 정기적인 외식, 걸치면 부끄럽지 않을 정도의 브랜드 의류, 고급 자동차, 넓은 공간을 가진 아파트, 적당한 문화생활, 결국 끊임없는 소유에 대한 욕망, 그런 부에 기반한 것들 말이다. 그런 것들은 꽤 우리를 안락한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하도록 방치한다. 웬만한 자극에도 고통을 느끼지 못할 만큼 우리는 만성적인 포기와 체념에 빠진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을까.

 위험에 빠진 삶을 스스로 선택하는 사람도 있다. 영화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주인공 그레고리우스의 순간적인 선택처럼 말이다. 나보다 잘 난 사람이 정한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강박증을 삶의 지침이라도 삼듯이 우리는 산다. 또한 단조로운 하루를 당연하다 여기며 의심하지 않고 더 노력해야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다고 믿는다. 언제일지도 모를 미래의 안정적인 삶을 기다리며 그 삶이 찾아오면 반복적인 일상도 끝날 거라 기대한다. 동화책의 게으른 주인공 베짱이처럼 그럭저럭 살아가거나 삶을 잠깐이라도 등한시한다면 손가락질을 면하지 못할 것이라 두려워하며 우리는 현재 붙잡고 있는 어떠한 가치도 손에서 놓지 못한다.

 영화에서 이런 대사가 등장한다. "삶에 결정적인 순간은 언제나 드라마틱 하지도 않고 커다랗게 다가오지 않는다"라고 또한 "대단한 사건만이 인생의 방향을 바꾸는 순간이 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운명이 결정되는 순간은 대부분 사소한 일들이 대부분을 차지한다"라고 말이다. 

 그런 놀라운 순간은 고요히 찾아온다. 당신이 정신을 제대로 차리고 있다면 당신의 인생을 바꿀만한 그 사소한 사건을 그레고리우스 교수처럼 맞을 수 있지 않을까? 두 눈을 크게 떠야 한다. 당신이 그토록 원하던 안정적인 삶, 질서 정연한 규칙들은 모두 엔트로피의 법칙에 따라 무질서한 것으로 변한다. 그것은 진리다. 질서는 무질서로 무질서는 다시 질서를 낳는다. 인생은 하나의 큰 원의 궤적처럼 여러 단계의 우연과 필연을 동그랗게 그리다 결국 종착지에 이르게 되는 것은 아닐까. 질서든 무질서든 그것에 대한 저항이 우선이다.


영화에서 발췌한 대사 중에서.

저는 성당이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습니다 
독재자에 맞설 성당의 미와 웅장함이 필요합니다 
성서의 강력한 말씀을 사랑합니다 
시적인 그 힘이 필요합니다 
표현의 억압에 대항하고 독재자의 가치 없는 구호에 반기를 들기 위해섭니다 

살기 싫은 세상이 또 하나 있습니다 
독립적인 사고를 멸시하고 멋진 경험들을 죄라고 치부하는 세상 
우리의 사랑을 독재자와 암살자에게 베풀라고 하는 세상 

터무니없게도 그런 자들을 용서하고 사랑하라는 말들 
그러므로 성서를 그저 옆에서 치우지만 말고 완전히 멀리해야 합니다 
공허하고 울림이 없는 말뿐입니다 

신은 밤낮으로 우릴 관찰하고 
우리의 행동과 생각을 주의 깊게 살펴봅니다 
하지만 비밀이 없는 사람은 어떨까요? 
자기만이 아는 소망과 생각이 없는 사람은 어떨까요? 

우리의 신이 우리의 영혼을 훔치고 있는 걸까요? 
불멸이어야 하는 그 영혼을요 
그러나 누가 영원히 살고 싶어 할까요? 
오늘, 이 달, 올해에 일어날 일이 
아무 의미 없다면 얼마나 따분할까요? 
의미 있는 일이 존재나 할까요? 

영원불멸의 삶이 뭔지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영생이 없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단언컨대, 끝이 없는 영생은 분명 지옥일 겁니다 
죽음이야말로 매 순간을 아름답고 두렵게 하는 존재입니다 
죽음을 통해서만이 삶의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신은 왜 그 사실을 모를까요? 
왜 적막할 수밖에 없는 영원함을 내세워 

우릴 위협하는 걸까요? 
성당이 없는 세상에선 살고 싶지 않습니다 
지금처럼 빛나는 성당 유리창 
서늘한 적막과 도도한 고요함을 원합니다 

말씀의 신성함과 시적인 고결함을 원합니다 
또한 모든 잔혹함에 맞서 대항할 자유도 필요합니다 
하나가 없다면 다른 하나도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니 선택을 강요하진 말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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