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사소한 일도 늘 걱정할까
과잉이라는 단어의 사전적인 뜻은 '예정하거나 필요한 수량보다 많아 남음'이다. 또한 근심의 사전적인 풀이는 '해결되지 않은 일 때문에 속을 태우거나 우울해함'이다. 과잉과 근심이 합성된 정의는 넘쳐나는 걱정거리들 때문에 마음을 애태우고 고민을 해결하려 노력해보지만, 뇌의 처리 능력을 초과한 용량 탓에 신체기관들이 과부하되고 정지된 상태를 의미한다.
왜 우리들은 걱정과 근심 속에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 걸까? 짐승이 아니기 때문에 현재의 삶을 사유하고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는 '인지적 성찰'의 시간을 갖는 것은 인간만의 고유한 지적인 정신적 활동일지 모른다.
현재가 풍요롭지 못하고 안정되지 못하기에 우리가 처한 현실을 주제로 깊은 고민을 나누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을 찾으려 '책'과 같은 매체에 때로 집중한다. 책에 정답이 반드시 있는 것은 아니다. 산이 그곳에 있으니 오르는 것처럼 '책이 있으니 그저 나는 읽을 뿐이다.' 각자의 근심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하여 우리는 책에 의지하고 작가가 펼쳐놓은 가상의 세상에서 현실을 떠난 존재의 근원을 찾는다.
'과잉 근심'이라 했지만, 누구나 인간은 근심을 가지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엄청난 권력과 부를 쥐고 있는 사람은 근심이 없을까? 하루를 인간답게 살기 위하여 고군분투하는 인간은 물질적인 계급, 사회적 지위에 상관없이 누구나 근심, 걱정을 달고 산다. 적당한 근심은 우리에게 삶을 적당히 긴장시킬 수 있는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 근심을 통해 성찰하는 과정에서 철학과 정신 분석학과 같은 인간 내면을 연구하는 학문이 발전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과잉 근심'은 지양해야 하겠지만...
이 책의 저자는 중국의 '리쯔쉰'이다. 중국인들이 말하는 리쯔쉰은 어떤 사람일까? 일상의 문제들에 직면할 때, 그것들을 해결할 수 있는 구체적인 정확한 해답보다는 스스로 문제들을 생각하고 헤쳐나갈 수 있는 지혜를 연구하는 심리학자라고 한다. 리쯔쉰은 늘 같은 사고방식과 자기만의 틀에 갇혀 있는 사람들에게 생각을 전환할 수 있는 다양한 경험을 제공한다.
심리학자로서, 고뇌와 때로는 무력증에 빠진 사람들에게 자신이 처한 환경을 그대로 인식할 수 있도록 자가 치유 방법을 제공한다. 문제들의 해결을 위해 남에게 의지하는 것보다 스스로 헤쳐나올 수 있는 내면의 용기가 필요하다. 리쯔쉰은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을 둘러싸고 있는 각종 고민거리들을 망라하여, 그 고민이 왜 인간을 괴롭히는지 분야별로 자세하게 분석을 해주며 모든 근심은 인간이 스스로 해결해야 할 고독한 싸움임을 강조하고 있다.
나는 인간의 내면을 다루는 글을 좋아한다. 단순한 자기계발서가 아닌 인간의 심리와 심리 때문에 발현되는 행동 패턴을 정확하게 집어주고 그것을 바탕으로 미래를 제시하는 책을 좋아한다. 리쯔쉰은 따끔한 충고보다는 객관적인 분석방법을 통하여 친절하고 따뜻한 조언을 얘기한다. 질문에 따라 정해진 정답은 심리학에 존재하지 않는다. 복잡한 인간의 심리 상태에 따라 적절한 심리치료가 병행되어야 하는데, 리쯔쉰은 인간의 복잡한 정신세계에는 정형화된 치료 방식이 없음을 강조한다.
1장. 나는 왜 사소한 일도 늘 걱정할까?
2장. 하루라도 걱정 없이 살 수 없을까?
3장. 왜 일에서 즐거움을 찾지 못하는 걸까?
4장. 사랑, 꼭 해야 할까?
5장. 사랑 없이 행복한 결혼 생활이 가능할까?
6장. 걱정 덜어내기
리쯔쉰이 말하는 걱정은 10대의 공부, 20대의 취업과 연계, 30대의 일에 대한 불확실성, 40대의 잃어버릴지 모를 불안감, 50대는 은퇴 후의 불안, 60대는 건강에 대한 걱정들이다. 리쯔쉰은 심리치료 상담 시 피상담자가 고통받고 있는 근원적인 문제들을 같이 찾도록 집중하고, 그 과정을 통해서 피상담자의 고민거리와 자아의 고통거리들을 객관적으로 살피도록 하여 스스로 해결 방법을 찾도록 도와준다고 한다.
리즈쒼이 말한 것처럼, 나도 감정의 이완을 하루 단위, 또는 더 급작스럽게 경험했던 것을 인지할 수 있었다.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에겐 업무와 사람 관계에서 찾아오는 상실된 인간성과 무력감은 거역할 수 없는 증상이다. 내면의 갈등을 완화시키기 위하여 내가 어떤 심리상태에 있는지 명확하게 진단하는 것은 실제 치료의 행위보다 더 중요한 과정이다.
작년 <나는 생각이 너무 많아>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이 책 역시 '과잉 근심'과 마찬가지로 생각이 너무 많은 현대인의 심리를 다루고 있다. <나는 생각이 너무 많아>는 사람들과의 차이점과 관련하여 생각이 많은 사람을 일반적인 "정신적인 과잉 활동인"으로 분석하고 스스로를 유별난 사람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근본적으로 일반 사람들과 차이가 있음을 뇌의 구조적인 설명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 책에서 얘기하는 '정신적 화잉 활동인'과 '과잉 근심'은 정신 분석학적인 측면에서 서로 맥락이 닿아 있다.
스트레스 자체는 그렇게 무서운 것이 아니다. 문제는 스트레스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이다. 스트레스를 걱정하는 사람은 항상 스트레스에 대한 공포 속에 살아간다. 하지만 스트레스를 인정하는 사람은 오히려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즐길 줄 안다. - P. 24
인간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각자가 서있는 삶의 위치에서 스트레스 없이 살 수는 없다. 적당한 스트레스는 삶의 긴장감을 부여하고 스트레스에 대하여 탄력적이며 자연적인 조절 능력을 부여하지만 과도한 스트레스 앞에 신체적인 것들과 정신적인 것들이 동시에 붕괴되는 경험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인간에 따라서 스트레스는 긍정적인 마인드로 다시 일어나는 기회로 작용하는가 하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쓰러지는 인간도 존재하는 양면성을 가졌다. 지나친 걱정은 역효과를 낼뿐이다. 자신이 받고 있는 스트레스의 본질을 파악하여 강한 내면을 키우도록 하자. 영화 <캐스트 어웨이>의 아무것도 없는 절망의 무인도에 홀로 놓인 '척 놀랜드'처럼 고독이라는 스트레스조차 자신의 친구로 받아들이고 쓰러지지 않은 진정한 자아의 길을 찾도록 하자.
평소 자신감으로 가득했던 사람보다는 오히려 겸손하고 양보를 아는 사람의 내면이 더 안정적이고 견고하다. - P. 30
인간은 다른 사람과 나를 비교하는 것으로 상대적인 위안을 얻는다. 하지만 끝없이 나보다 나은 사람을 바라보는 것은 그 사람에게 상실감을 안길 뿐이다. 자신감이 강한 사람은 모든 것에 강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그의 내면은 약하다는 것을 방증한다고 한다.
자신의 열등한 모습을 감추기 위하여 과장된 행동을 보인다는 것이다. 나의 아버지는 예전부터 '말을 아끼라'라고 하셨다.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은 많이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을 감추려 허세를 부리는 것이고 거침없이 뱉어나오는 말속에 그 사람의 열등감을 절대 숨기지 못한다고 한다.
과학적인 시각에서 '정해진 운명'이란 '존재하는 불확실성'에 대한 불안감이 불러온 일종의 자포자기적 해석으로 인식한다. 심리학에서는 이것을 '합리화된 심리 기제'라고 말한다. - P. 43
인생에 정해진 운명은 없다. 모든 길은 자신이 스스로 개척하는 것이다. 어려움과 고난이 닥칠 때마다 운명에게 잘못을 탓하고 스스로 쓰러지지 않고 한 발짝 더 나아가려고 하는 용기가 더 소중하다. 어차피 인간은 한 치 앞도 보지 못하는 불안감을 가지고 살 수밖에 없다. 불안 속에 휩싸여 인생을 포기하지 말고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스스로 만들어가야 한다. 스스로의 운명을 만들어가는 적극적인 자세가 더 의미 있다. 실패를 겪더라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불굴의 의지가 언젠가 꽃 피울 결실을 유도할 것이다.
생명은 살아가는 것 그 자체이므로 '헛되이 살았다.'라는 개념은 성립될 수 없다. - P. 50
가치 있는 삶, 돈, 물질적인 욕구, 성취, 직장에서 마침내 얻은 성공이 진정한 나를 대표하지 못한다. 나는 어떤 형태로든 나의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으며, 살아가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빛나는 대상이다. 누구나 인생의 이야기를 만들어간다. 헛된 인생은 이 세상에 없다. 모든 부러운 것들을 경험할 수는 없다. 자신의 위치에서 최대한 할 수 있는 것들을 해야 한다.
인생을 바라보는 관점에는 두 가지 태도가 존재한다. 먼저 선형적 태도가 있다. 이 관점에 따르면 어제의 행동이 오늘을 만들었고, 오늘의 노력이 내일을 창조한다고 본다. 두 번째는 비선형적 태도이다. 이 관점은 어제가 반드시 오늘을 말해 주는 것은 아니며, 오늘의 행위 또한 내일의 결과와 백 퍼센트 일치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 P. 54
어린 시절의 사건이 현재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프로이트의 트라우마와 깊이 연관되어있다. 원인이 있어서 결과가 나타난다는 선형적 태도는 과거의 열등감에 얽매여 현재의 삶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변명을 나타내는 태도 일 뿐이다.
과거는 나에게 영향을 미칠 수 없다. 열등감, 트라우마 등에 대해서 현대의 심리학은 비선형적 태도에 집중한다. 과거의 나는 현재의 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없다. 인간은 고결하고 복잡한 존재이다. 인간은 고정적이지 않으며 과거의 기억 속의 나의 모습은 현재와 완전히 불일치한다. 불행과 행복은 변한다. 어려움을 극복하는 용기는 과거의 깊은 상처마저 극복할 수 있다.
심리학에서는 안전의 욕구가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기인한다고 보고 있다. - P. 68
죽음에 대한 두려움, 심리적 안정을 취하려는 노력, 미래에 대한 불안감은 세상을 살아가도록 하는 촉매제 역할을 한다. 인간은 두렵기 때문에 대비하고 미래를 준비한다. 누구나 행복하고 싶고, 편안한 노후를 꿈꾼다. 불안한 미래는 인간이 안정감을 누릴 수 있도록 현재의 삶을 위험으로부터 보호한다.
사회가 도덕적 가치와 아름다움을 부르짖을수록 사람들의 관심은 오히려 어둡고 추한 곳으로 쏠린다. - P. 72
부도덕한 것들이 온 세상에 판친다. 국가는 사람들을 강하게 통제하고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강하게 압박한다. 강한 빛을 추구할수록 어둠은 더욱 깊어진다. 최고위층의 윤리 상실에서 국민들이 배우는 것은 무엇일까? 사람들은 억눌려있다. 억눌린 감정을 비도덕적인 곳에 풀어버린다. 부정적인 정보를 발산하고 퍼뜨림을 통해서 스트레스를 해소하려 한다.
수준 높은 사변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사유 흐름과 사고방식의 미세한 변화, 대뇌의 논리적 사고 활도까지도 모두 인식하고 있었다. 이는 학식이 풍부한 철학자들에게만 가능한 능력인 것이다. 사실 대다수 사람들은 자신이 어떻게 사고하는지 인식하지 못한다. - P. 75
나는 가끔 통제 못할 걱정거리들을 고민한다. 직장의 위치, 행복한 가정, 사고, 상실된 의지 등 항상 나는 사고를 멈추지 않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현실을 정확히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자신의 먹이까지 앗아가는 전체주의적인 집단의 파워 앞에서 도리어 보수화 되어가고 그들을 좇는 가난한 사람들의 무사고는 누가 만든 것일까?
타인을 의식하는 성향이 강한 사람들은 도덕적인 경우가 많다. - P. 80
이 말에 깊이 공감한다. 나는 남을 배려하고 내가 행동하는 것에 남들이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 항상 미리 점쳤다. 그들의 반응을 고민하여 내가 행동해야 할 양식들을 미리 결정하고 준비했다. 나의 감정뿐만 아니라 타자의 윤리와 때로는 감정에까지 깊이 관여하려 했다. 타자에게 결정을 의지하고 그들의 의견이 옮다고 맞춰주려는 사람은 자신의 개성을 잃을 수 있다. 스스로의 정체성을 지키는 방법은 자신의 결정이 옳으며 모든 사람에게 지지를 받겠다는 기대를 저버리는 것이다.
햇살이나 따뜻함 등 긍정적 에너지를 담고 있는 단어들은 대뇌의 연상 작용에 의해 좋은 기분을 이끌어 낸다. 하지만 부정적이거나 무기력한 단어들은 내면을 음울한 안개로 뒤덮였다. - P. 84
미래에 대한 낙관적 태도는 무력감에서 벗어나기 위한 에너지를 제공한다. 무력감에 빠져 있는 사람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무력감은 우리의 인생을 퇴보시킨다. 무력감 보다는 자신감, 수렁에서 나올 수 있다는 용기가 중요하다.
내향적인 힘이 나무의 뿌리와 몸통 같다면, 외향적인 힘은 가지와 잎, 과실인 셈이다. 이 두 가지가 다 있어야 나무가 생존할 수 있다. - P. 91
외향적인 성격은 외부의 가치에 더 치중하는 사람이다. 외향적인 사람은 항상 외부의 인정을 갈구한다. 외부 세계의 인정과 찬사가 끊어졌을 때, 인정받지 못했을 때 그들은 삶의 의지를 잃는다. 내향적인 사람들은 자신의 내면의 세계의 성찰을 통해서 에너지를 얻는다. 어느 한쪽에 치우치는 것보다 균형을 잘 맞추는 것이 중요하다.
일은 삶의 본질이 아니라 그저 생계유지에 필요한 수단이다. - P. 99
인간은 자연, 예술, 과학에 심취하였다. 일은 삶을 유지하기 위한 단순한 수단이다. 인간의 내면은 복잡하다.
돈을 벌고 모으기 위해 인간이 삶을 사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모을지 고민하는 것보다 어떻게 쓸 것인가? 에 치중해야 한다. 여행, 취미생활, 문화생활에 몰두해야 한다. 나에게 일은 기본적인 삶을 살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나는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삶의 동기를 찾았다. 그것은 책 읽기, 그리고 글쓰기다. 일은 스트레스를 어쩔 수 없이 수반한다. 스트레스는 일에서 도망가고 싶을 마음을 거들뿐이다. 일과 자아를 분리할 수 있다면 가장 좋을 것이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평생 일만 하게 되고, 모든 것을 가져가는 사람은 명예와 이익만 좇던 사람들이다. - P. 105
지나친 걱정이 자기주장의 용기를 꺾어버린다. 나는 이 말에 깊이 공감했다. 매사에 소극적이며 눈치를 보던 내 모습이 투영되었다. 열심히 하면 인정해줄 것이라 생각했던 내 생각은 소극적인 변명에 불과했다. 그렇다고 나는 직장에서 적극적으로 인정받기 위한 활동을 무리해서 추진하지 않을 것이다. 나의 생각과 판단에 따른 결가는 내가 책임지는 것이다. 소극적인 사람도 나름 살아갈 수 있는 틈새의 논리들을 찾아보고 싶다. 반드시 정해진 방법대로 행동해야 한다는 결과론적인 의견에 동의하고 싶지 않다. 나의 자주적인 생각들을 계속 추진할 것이다.
사랑의 본질은 고통이다. 아프지 않으면 자신이 사랑하고 있다는 것조차도 느낄 수 없다. - P. 126
많은 남자들이 침묵을 통해 자신보다 총명하고 지혜로운 여자를 굴복시킨다. - P. 135
남자에게 집은 그저 아무 일도 안 하고 멍하게 있어도 좋은 공간, 누구의 신경도 쓰지 않고 속옷 바람으로 돌아다녀도 좋은 공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남자에게 집은 따뜻하고 편하면 그만이다. - P. 144
삶이 여행이라면, 그 여행에서 자신을 돌볼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자신뿐이다. - P. 154
관심을 많이 쏟으면 쏟을수록 나는 점점 피동의 위치에 놓이게 되고, 나에 대한 상대방의 관심도 점점 더 적어진다. - P. 158
만약 이 고통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면, 더 이상 고통은 당신을 괴롭히지 못할 것이다. 심지어 인생을 풍부하게 만드는 자원이 되어 줄 것이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고통을 인정하지 않고 벗어나려고만 애쓴다면, 고통은 더욱 가중될 뿐이다. - P. 191
고통을 인정하는 것이 쉬울까? 고통이 자기로부터 원인이 된 것이 아니라 타자로부터 기인된 것이라면 자기 최면과, 자기 컨트롤 만으로 걱정을 덜어내긴 쉽지 않을 것이다. 고통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경지에 이르기는 평범한 인간에게 어려운 수준일지 모른다. 고통에 괴로워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에 빠지는 것보다는 원인을 분석하고 그것들을 해결하려 적극 나서 보는 것이 더 이롭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운동으로 심리적 안정을 찾으려는 시도는 처음에는 효과가 있는 듯 보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몸으로 느끼는 신선함도 떨어지고 결국에는 전혀 효과를 느끼지 못하게 된다. 그로 인해 다시 정신적 괴로움에 시달리게 되고 운동은 치료 효과를 상실한다. - P. 195
운동은 심리적인 치료 방법이 아니다. 근본적인 치료가 아닌 임시처방이라고 할 수 있다. 심장과 간에 무리를 줄 수 있는 강한 운동보다는 느린 운동이 효과적이다. 요가, 체조와 같은 정적인 운동이 걱정을 덜어내는 데 훨씬 효과적이다.
휴식을 할 때면 마음이 솔직해진다. 그로 인해 의식적으로 외면해 버렸던 고통과 정면으로 마주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심지어 그 고통이 실제보다 크게 확대되어 보이기도 한다. - P. 199
우울증이 있는 사람에겐 휴식이 무의식적으로 과거의 상처를 왜곡시키는 역효과를 낼 수 있다고 한다. 밖으로 내어버린 상처는 견딜 수 없는 기억을 상기시키고 삶을 더 강하게 포기하고 싶은 뜻밖의 결과를 낼 수 있다고 한다. 사람의 심리 상태에 따라서 적절한 휴식을 제공해야 하며, 우울증을 겪고 있는 환자에겐 휴식보다 가벼운 산책이나 조깅 같은 방법이 효과적일 수 있다. 물론 일반적인 사람에게는 휴식이 도움이 된다. 휴식은 내가 하고 있는 일에서 손을 떼고 그냥 '쉬는 것'을 의미한다. 독서를 하거나 평상시 집중할 수 있었던 취미 생활을 하면 된다.
이 책을 읽으며 근심 아닌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벅차올랐다. 세상은 나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근심을 가지고 살 수밖에 없는 형태로 창조되었다. 과거의 채집을 하며 걱정 없이 살던 사피엔스가 한 곳에 정착을 하고 내일 먹을 것을 비축하기 위해 고민하면서부터 인류의 근심이 시작되었을지도 모른다. 모르고 살았으면 좋았겠지만,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따먹은 비극을 통해서 미지의 세계에 발을 디밀었듯이 근심은 인류가 살아온 흔적과 함께할지도 모른다. 다만 근심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생리라 할지라도, 그것을 교묘하게 배합해서 내 삶을 이롭게 한다면 더 좋지 않을까? 저자도 적당한 근심은 우리의 삶을 지탱할 수 있는 긴장감을 부여한다고 했다. 내가 근심하고 산다고 해서 정신이 건강하지 못한 것이 아니다. 적당한 근심과 함께 삶을 살아보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