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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대생의 심야서재 Feb 15. 2016

농담

밀란 쿤데라

농담 같은 만남


어느 날, 이웃 블로거분의 추천과 함께 오래된 밀린 숙제와 같았던 '밀란 쿤데라'의 작품에 대한 나의 첫 탐독의 여정이 시작되었다. 작은 시작은 언제든 내가 원할 때, 달려가면 그만이었다. 그 시작을 하기까지 수많은 난관, 결심, 결연한 의지 들과 같은 중대한 시점의 전환이 필요했다. 사실 이미 내 눈과 귀로 '밀란 쿤데라'의 작품을 읽어야 한다는 의무감 같은 것들이 심연 속에서부터 일렁이긴 했다. 무의식적이며 피상적인 움직임 같은 것들에 이끌리고, 때로는 의식적으로 그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이 증폭되기도 했다. 어느 것이든 '내가 결정하지 않으면 그만이다'라는 의식적이며, 주체적인 생각이 기반에 깔려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어쭙잖은 '나의 지혜들로 그의 세계들을 가슴 깊이 이해할 수 있을까'라는 두려움이 더 컸던 것 같다.


아파트 도서관을 가끔 찾는다. 주로 신간 서적이 나의 주 사냥 포인트라고 볼 수 있는데, 사람이 관심을 없을 땐 그것들이 있었는지 아무리 뽐내고 자랑해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 사람의 제한적인 시각이다. 우리 아파트의 작은 도서관에 '민음사'의 세계문학전집이 있었다니, 난 옛 속담처럼 '등잔 밑이 어둡다'는 진리와, '백사장에서 진주라는 보물을 발견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도서관이 처음에 개장할 때, 누군가의 기획으로 이 책들이 자리했는지 알 수는 없다. 다만 누군지는 모르지만 책들에 상당히 조예가 깊은 분이 아닐까 존경의 눈빛을 책들에 향했다. 난 그중에서 제일 먼저 거짓말처럼 강한 자성에 이끌리듯 '농담'을 꺼내 들었다.



역시 난 또 하나의 두꺼운 알을 깨고 세상에 진출하고 말았다. 도대체 나는 얼마나 모르고 살았던 것일까? 이미 불혹을 훨씬 넘겨버린 마당에 앞으로 할 일들, 세상을 변혁시킬 수 있는 웅대한 포부들, 몸은 커버렸지만 아직은 어리숙한 나의 마음들, 내가 지금 미혹되어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하는 인생의 주제들, 모든 나의 고민의 주제들은 '밀란 쿤데라'의 소설 <농담> 속 과거 세상 루드빅? 아니, 나를 괴롭히던 학창 시절과 군 시절의 쓴 기억들과 함께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소설 속의 주인공인 '루드빅'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심리적인 현상은 소설에 몰입된 독자들이 경험하는 일반적인 현상일지도 모른다. 내가 '루드빅'을 모르고 살았던 사실, 나아가 '밀란 쿤데라'라는 위대한 작가를 모르고 살았던 부끄러운 사실은, 분명 부인할 수 없는 나의 무지몽매한 시절을 지나온 농담 같은 인생을 대변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사진 출처 :  나


밀란 쿤데라


나는 '농담'을 읽으면서, 밀란 쿤데라에 대한 무지한 나의 지식들을 '농담 같은 현실이라' 스스로 애써 변명하며 그의 정보들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구글에서 '밀란 쿤데라'로 검색을 시도해보았다. 관련 검색으로 제시되는 단어들은 아래와 같았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밀란 쿤데라 농담'
'밀란 쿤데라 느림'
'무의미의 축제' 
'밀란 쿤데라 불멸'


사진 출처 : 구글 이미지(CCL)


사진 출처 : 플리커 이미지(CCL)
밀란 쿤데라(Milan Kundera, 1929년 4월 1일 ~ )는 체코슬로바키아 브륀 태생의 소설가이다. 체코슬로바키아 브르노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체코가 소련군에  점령당한 후 시민권을 박탈 당해, 프랑스로 망명하였다. 이후 1989년 체코 민주화 이후 본국으로 임시 귀국하였다.

그는 상당히 기품 있는 집안에서 루드빅 쿤데라(1891년~1971년)의 아들로 태어났다. 루드빅 쿤데라는 작곡가 레오슈 야나체크(1854년~1928년)의 문하생이었으며, 체코의 주요한 음악학자이자
피아니스트이기도 하다. 1948년에서 1961년 사이에는 브르노 뮤지컬 아카데미의 수장이었다. 쿤데라는 그의 아버지에게서 피아노를 배웠다. 나중에는 그 역시 음악학을 공부했다. 이러한 음악적 배경은 그의 작품의 근간이 된다. 심지어 그는 악상 기호를 텍스트 속에 그려 넣기도 했다.

정보 출처 : 위키 백과(밀란 쿤데라 검색)


* 참고 : 밀란 쿤데라(위키백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내가 기억하는 '밀란 쿤데라'의 작품의 대표적인 이미지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다. 솔직히 고백한다면 나는 이 책을 오래전 서점에서 잠시 들춰본 기억이 있다. 몇 장을 흘깃 넘겨보는데 소설인지, 소설의 탈을 쓰고 있는 작가의 자전적인 인생의 고민들인지 나는 알 수가 없었다. 아마도 그때는 내가 심미적인 것들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는 방황의 시절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의 주 관심사는 흥미위주의 게임, 영화, 음악이 대부분이었다. 엄밀히 말한다면 인문학에 막 관심을 갖게 되는 시점이었는데, 그것의 시작은 '스티브 잡스'의 생각과 일치하기도 한다. 어쨌든 인문학에 관심을 시작하는 나에게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나의 인문학적인 지식의 한계와 이해하고 싶어도 이해할 수 없는 나의 모든 한계들을 절감할 뿐이었다. 이 책을 처음 접했을 때 나의 느낌은 마치 '칼 세이건' 교수님의 <악령이  출몰하는 세상>을 호기롭게 읽어보겠다고 무모하게 도전했다가 포기했던, 나 자신을 부끄럽게 떠올리게 하였다. 


이번에 '농담'을 읽게 되면서 이야기에 상관없이 공감했던 부분들은 다름 아닌 음악적인 뿌리들이었다. '농담'속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뼛속부터 사랑했던, 체코의 민속음악이 뉴올리언스의 뿌리를 두고 있는 흑인들의 슬픔, 고통과 어떤 고리들을 연결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공산주의를 찬양하는 선전 음악이 아닌 민족의 아픔을 노래하는 바탕이 재즈와 영속성을 같이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나는 Benny Goodman, Charlie Parker, Duke Ellington, Herbie Hancock에 심취해 있었다. 불규칙적인 변조, 예측 못하는 자유로움이 좋았다. 기존 가요와 팝의 충분히 예측할 수 있는 코드의 진행은 일종의 지루함이었다.


사진 출처 : 플리커 이미지(CCL)


이야기의 시작

 

주인공의 이름은 공교롭게도 '루드빅'이다. 주인공의 이름은 어쩌면 그의 아버지 '루드빅 쿤데라'로부터 나온 것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농담' 같은 이야기의 주인공은 그의 아버지의 자전적인 삶, 체코의 불안정한 사회의 현실을 담고 있는 모라비아의 '아버지'에 관한 보고서 일지도 모른다. 자신일지도 모를, 아니면 그의 아버지의 얘기일지도 모를 이야기 속의 주인공인 '루드빅'은 15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어느 날 자신의 고향, Moravia(모라비아)에 돌아오는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사진 출처 : 플리커 이미지(CCL)


이야기가 시작됨과 동시에 나는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책을 읽게 되면 그 궁금증은 이내 풀리기 마련이지만, 나의 오래된 고질적인 습성 중 하나는 다음 장을 읽기 전에 미래를 한 번 예측해보는 것이다. 그것이 맞건, 틀리건 결과는 중요하지 않다. 어쨌든 향후의 이야기의 향방을 몰고갈 중요한 열쇠가 되는, '왜 루드빅이 15년 만에 귀향했을까'라는 것은 앞으로 내가 이야기에 빠져 들것인지, 아니면 책을 덮고 읽는 것을 포기할 것인지 중요한 변수가 될 것 같았다. 기다리는 사람도 없고 기대할 것이 없는 것 같은 그에겐 척박함과 배신감으로 가득 차 있을 것만 같았으며, 정겨운 고향의 이미지는 더 이상 그가 그리는 이미지가 아니었다. 내가 느끼는 그의 고향에 대한 감정은 복수, 원한이었다. 나는 이 두 가지 감정을 중심으로 해서 어떤 사건들이 벌어질지 더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게 되었다.


사실 주인공은 이미 서두에서 그 사실을 직설적으로 밝히고 있다. 


내가 무관심이라 불렀던 것은 실은 '원한'이었던 것이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다른 모든 도시에서나 마찬가지로 이 도시에서도 좋은 일 나쁜 일들이 내게 일어났던 것뿐이었는데... 바로 그 일이 추잡하고 저속한 일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 P. 10


모라비아에서 일어났던 어떤 충격적인? 또는 '나쁜 일' 탓에 그는 복수를 기획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복수의 실행 방법은 인간으로서 가장 질 떨어질지도 모를 저속하고 추잡한 일이라는 것이다. 저속한 일이란 무엇일까? 살인? 치정? 아마도 주인공의 복수극은 '여자'와 관련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어떤 인연일지 모르지만 '코스트카'를 찾게 되고 모라비아에서 잠시 머물 수 있는 사건의 핵심적인 장소를 과거의 빚 탓으로 잠시 빌리게 된다. 그의 복수에 집중을 하게 되면서 '15년'이라는 시간이 그에게 복수의 날을 위한 칼을 갈았던 오직 무의미하기만 것들이었을까? 자신이 지켜야 할 어떤 것을 잃어버린 것일까? 더욱 궁금증은  증폭되었다.


사심 없이 단지 그를 보려고 여기에 온 것이 아니라는 사실, 그리고 내가 그에게 한 질문(재혼을 했느냐고 쾌활하게 물었다.)이 실은 저급한 계산에서 나온 것인데 진지한 관심을 반영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이 갑자기  언짢아졌다. - P. 13


이야기의 전개


사실 루드빅이 기획하고 있는 복수의 인물 중에서 '헬레나'는 바로 그 '저속함'의 상징적인 인물이었다. 헬레나는 보헤미안 출신의 중산층에서 태어난 오직 공부와 남편의 사랑만을 믿고 사는 여자였다. 남편 제마넥과 사랑으로 만났으며 그것 때문에 결혼했음을 그녀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제마넥은 사랑이 아닌 공산당의 규율 때문에 헬레나와 결혼한 것임을, 그의 끝없는 여자들의 편력을 통해서 증거하고 있었다.


우리가 사랑 때문이 아니라 당의 규율 때문에 결혼한 것이라고 말했다. - P. 29


결국 그들은 결혼 관계를 유지하지만, 서로를 끝없이 배신한다. 제마넥에게는 끝없는 여자들이 있었고, 그녀 또한 만족되지 못하는 사랑을 찾아 헤맨다. 그러는 와중에 루드빅은 우연히 헬레나를 만나게 되고 그녀가 자신이 복수해야 할 대상인 '제마넥'의 아내임을 알아차리게 된다. 그것은 일종의 복수의 수단으로써 그녀를 활용한다는 저속한 의지를 나타낸다. 루드빅은 자연스럽게 헬레나를 유혹하여 자신의 복수 작전에 끌어들이고 있었다.



루드빅은 애초부터 그녀가 기자로서가 아니라 여자로 그의 관심을 끈다는 것을 알게끔 했다. - P. 37


복수의 원인


낙관주의는 인류의 아편이다! 건전한 정신은 어리석음의 악취를 풍긴다. 트로츠키 만세!


사실 사건의 모티브가 된 갈등은 아주 단순했다. '루드빅'은 대학 시절 자신의 여자 친구에게 멋있게 보이고 싶은 요량으로 엽서에 위와 같은 '농담' 한마디를 보낸다. 그러나 이 농담은 당에게 밝혀지게 되고, 당시 사회주의 국가 건설에 심취되어있던 사회의 정면으로 반기를 든 것으로 매도당하게 된다. 그것은 단순한 농담이었고, 오해였다. 그러나 그의 절친한 친구였던 '제마넥'은 그의 농담을 이기적인 목적으로 활용했다. 자신 역시 '루드빅'이 좋아했던 여자 친구에게 관심이 있었고, 루드빅의 뜻하지 않은 농담을 기회로 삼아 그를 당에서 악의적인 목적을 가지고 축출하려고 한다. 루드빅은 결국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당에서 축출당하고 군대로 끌려가게 되었으며, 탄광에서 막노동을 하며 15년이라는 세월의 고초를 겪게 된다.


* 참고 : 트로츠키주의


루드빅은 병영 생활을 통해서 마치 '빅터 프랭클'박사의 <죽음의 수용소에서>처럼 불투명한 미래와 함께 마주하며, 자신이 트로츠키주의자가 아니었지만, 어쩔 수 없이 자신이 짊어지고 가야 할 삶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병영 안에서 살아가야 할 '삶의 의미'를 찾으려고 노력한다. 다만 그에게 저항이란 헛된 것이었으며, 집단속에서 생존하려면 그들의 법칙에 순응할 수밖에 없음을 발견한다. 


우리를 묶어주는 단 하나의 유일한 인간적 연결 고리란, 짤막하게 서로 무어라 추측이나 해보고 있던 불투명한 미래뿐이었다. - P. 73 


루드빅은 자신의 '농담' 같은 한마디 때문에 전혀 예상하지 못한 파국을 맞이한다고 생각했었지만, 어쩌면 그의 순수 이성에는 '사회주의에 저항하는 자유의지가 숨어있던 것은 아니었을까?' 농담이라고 치부할 그의 말들 속에는 농담이 아닌 그의 솔직한 진심이 담겨있던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는 지옥과 같은 수용소의 삶에서 자신의 이성이 성숙해지는 계기를 맞이한다. 


루치에를 만나다.


루드빅은 자신이 수용소 생활을 했던, '오스트라바'에서 우연히 루치에를 만난다. 수용소 생활과 같이 폐쇄적이고 억압을 당하는 공간 속에서 남자들끼리 공동생활을 하게 되면, '여성'이라는 존재는 남자들에게 일종의 신화와 같은 우월적이며 관념을 초월한 신비의 대상이 된다. 단순히 여자라는 성적인 차이만으로 루드빅이 '루치에'를 첫눈에 사랑하게 되었을까? 그는 아래와 같이 루치에 와의 만남을 통해서 루드빅은 자신이 역사라고 믿었던 그동안의 모든 대상들을  말발굽 밑으로 날려버리고, 자신이 앞으로 살아야 할 새로운 세상을 루치에와 함께 맞이할 것을 순수하게 소망한다. 그는 정신적으로 해방되었다. 루치에를 통해서...


나는 사랑이 자기 자신의 전설을 만들어낸다거나 그 시작을 나중에 신비화시키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다. - P. 100


루드빅과 루치에가 공감했던 감정은 서로 처해있는 환경은 달랐지만,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있었다. 그 감정은 바로 슬픔, 우울이었다. 루치에 가 왜 슬픔과 우울한 감정에 빠져있는지 그들의 대화를 통해서는 알 수 없었다. 아마도 그녀가 어릴 적 자랐던  가정환경이 열악했으며, 부모로부터 온갖 학대와 폭행을 당하고 살았고 결국 그것을 피해 오스트라바에 위치한 공장으로 탈출했다는 사실 정도였다. 그 사실을 통해 왜 그녀가 그토록 전쟁영화에 집착했는지, 그녀 안에 내재된 폭력의 근원을 짐작할 수 있었다.


루드빅은 루치에의 몸을 끝없이 탐하려고 했다. 육체를 가지려고 하는 것은 서로 사랑하는 마음의 자연스러운 반응일까? 그는 원했지만, 그녀는 끝까지 그것을 거부한다. 루드빅은 자신의 본능에 충실했지만, 루치에는 그의 본능에 끝까지 응하지 않았다. 결국 이 사건은 그와 그녀를 영원히 갈라놓게 될 하나의 단초가 되고 말았다. 결국 루드빅은 루치에 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말았다.


슬픔, 우울의 공감보다 사람을 더 빨리 가깝게 만들어주는 것은 없다. - P. 102


복수의 결과


루드빅은 결국 그의 고향 모라비아에서 복수를 결행한다. 헬레나와 돌이킬 수 없는 육체적인 과오를 그들 앞에 놓인 모든 위험에도 불구하고 결국, 저지르게 된다. 헬레나에게 줄 상처에 대한 고민은 있었지만, 제마넥을 향한 남자의 단순한 복수의 의지 앞에서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리고 그 복수는 그에게 구원을 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지만, 오히려 제마넥은 그들의 치부를 아무렇지도 않게 인정하고 자신의 죄는 구원받았다 생각하게 된다. 멋있게 복수하려던 루드빅에게는 허무함만이 남게 되었다. 루드빅이 의도했던 파국의 결말은 어떤 것이었을까? 제마넥의 절대적인 파괴와 과거의 잘못에 대한 뉘우침?, 루드빅의 새로운 출발? 복수를 하고자 스스로 더럽고 저속한 몸이 될 것을 자초했던 그였지만, 과거는 단지 지나간 역사일 뿐 그에게 복수의 결과는 전혀 위안을 주지 못했다. 오히려 복수만을 위해서 자신의 가장 소중한 친구였던 '야로슬라브'를 저버렸던 자신의 냉정함만이 남을 뿐이었다.


루드빅은 수감생활, 군대 생활, 탄광 생활을 통해서 육체적으로는 강인해졌을지 모르지만, 정신적인 성장은 지체된 것은 아니었는지 의심이 든다. 루드빅을 가장 믿어줬던, 야로슬바르를 모른척하며 외면했던 루드빅... 그는 아마도 용의 주도하고 면밀한 복수의 성공을 위해서 과거의 소중한 친구마저 걸림돌로 취급했던 것이다. 친구까지 배반하며 그가 얻은 복수의 결론은 무엇이었을까? 야로슬라브가 한 말이다.


사라진 과거를 되살리겠다고 총력을 기울이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뒤를 돌아보는 이는 롯의 아내와 같은 결말을 맞으리라 -  P. 199


잘못된 복수의 결과는 루드빅에게 다른 깨달음을 전달한다. 수감 생활 시절 그는 루치에를 제대로 몰랐다는 것이다. 그녀의 말을 제대로 들으려고 하지 않았으며, 그녀의 상처를 어루만져주기 위해서 그 어떤 노력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누구인지 알려고 노력하기보다, 자신의 육체적인 본능을 확인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나는 루치에를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녀가 실제로 누구인지, 그녀 자체로서 그리고 자신에 대하여 어떤 사람인지 나는 알지 못했다. - P.343 


또한 변해버린 제마넥을 보며 절망한다. 그와 절대 화해할 수 없음을, 절대 용서할 수 없음에 고통받으며 증오를 불태웠던 그였는데, 제마넥은 루드빅의 내적 갈등이 되어버린 모든 사건의 요소들의 균형을 무너뜨리고 만다. 과거의 역사에 얽매여있던, 과거 속에서 살던 루드빅에게 더 이상 과거의 배신자의 실체였던 제마넥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그는 분명히 후회하고 있었다.


내 인생의 모든 일들을 전부 취소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그 일들을 초래한 실수들이 내가 한 실수들이 아니라면 무슨 권리로 내가 그것을 취소할 수 있겠는가? - P. 391


그리고 루드빅은 실토한다. 그 당시 자신이 불합리한 처분을 당하고 있을 때 바로 복수했어야 한다고 말이다. 때 늦은 복수를 괴로워한다.


미루어진 복수는 환상으로, 자신만의 종교로, 신화로 바뀌어버리고 만다. - P. 396


그러나 어느 순간 그는 모든 근원적인 괴로움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마지막 무기를 선택한다. 그것은 음악이었고, 그가 가장 인생 동안 사랑했던 친구 '야로슬라브'와의 함께하고픈 협연이었다. 그는 오랫동안 악기를 잡지 않았지만, 자신의 감각들을 다시 깨우며 음악으로서 그의 모든 방황들을 끝내려 한다. 


아주 오랫동안 나는 클라리넷을 손에 잡아보지도 못했지만 우리가 연주하기 시작한 곡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처음의 두려움을 곧 이겨낼 수 있었고, 곡이 끝난 후 악기를 내려놓았을 때는 연주자들이 탄성을 올리며 찬사를 보내고 내가 연주를 안 한지가 벌써 오래되었다는 것을 믿으려 들지도 않을 정도였다. - P. 424


연주로 그들은 하나가 되었고, 죽음이 그들의 앞을 닥쳐올지라도 평안함을 맞을 것 같은 마지막 환희를 경험한다. 루드빅은 음악 앞에서 과거를 잊지 못하고 번민하는 자신을 용서하고, 모든 원인의 대상들을 기억 속에서 지워버리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증오의 대상이었던 제마넥을 쓰러뜨리지 못했지만, 사랑했던 친구를 다시 찾을 수 있는 귀결점을 자신에게 선물했다. 그러나 그 마지막 친구가 쓰러지는 상황 자체도 마지막까지 농담 같은 현실이었다.


증오의 대상 제마넥을 쓰러뜨리는 것을 목표로 했던 이 귀향이 결국은 이렇게 땅에 쓰러진 내 친구를 팔에 안고 있는 것으로 귀결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하며 전율하였다.(그렇다, 나는 그 순간, 그를 두 팔로 안고 있는 나, 마치 나 자신의 확실치 않은 죄를 짊어지고 가는 것처럼 거대하고 무거운 그를 안고 가는 나, 군중들 사이를 헤치며 그를 옮기고 있는 나, 눈물 흘리고 있는 나를 보았다.) - P. 432


그의 연주가 끝나며 느낀 감정들은 아래와 같다.


어떤 뜨거운 연대감이 내 마음을 가득 채웠고, 이 쓰라린 하루의 끝 무렵에 나를 구해 주러 온 이 감정을 감사하게 맞이 했다. 그런데 갑자기 루치에의 모습이 다시 눈 앞에 어른 거렸고, 나는 마침내 왜 그녀가 이발소에서 내게 나타났는지 그리고 그  다음날은 코스트카의 집에서 전설인 동시에 사실인 그 이야기 속에 등장했는지 이해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P. 425


우리 둘은 서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서로를 비껴갈 수밖에 없었지만, 우리의 삶은 둘 다 유린의 역사라는 점에서, 우리는 피를 나눈 형제나 결혼한 부부와 같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인지 모른다. - P. 425


음악은 하나의 아늑한 공간이었고, 그 공간은 소란스러운 취객들 가운데 둘러싸인 우리가 마치 차디찬 깊은  물속에 떠 있는 유리 집 같은 것 속에 들어앉아 있는 듯한 느낌을  가져다주었다. - P. 429


작품에 대한 소회


모든 역사는 '루드빅'의 농담 단 한마디로 시작되었다. 그 한마디 농담이 15년이라는 멍에를 씌우고, 죽음에 이를지도 모르는 중대한 고초를 겪게 한 것에 과연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을까? 루드빅은 분명 부당한 역사의 죄를 그가 짊어진 죗값보다 더 심한 값을 치렀다. 그의 15년이라는 시간을 어떻게 보상할 수 있을까? 그 고난의 세월을 누가 보상할 것이며, 그에게 남은 복수의 공허함은 어떻게 치유할 것이란 말인가? 물론 역사의 시발점은 단순한 과오와 실수라는 교훈을 부인할 수는 없다. 루드빅에게서 농담은 '나비 효과'와 같은 엄청난 후 폭풍을 몰고 온 것이라 나름의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루드빅이 고향에 돌아와 복수 후에 남겨진 결론은 무엇일까? 모든 복수는 다만 허망할 뿐?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낳는다? 나는 지난 역사에 자유롭지 못하지만, 죄를 저지른 인간은 자신의 악한 죄질도 시간 앞에 사함을 받는다? 나는 모르겠다. 모든 것이 스스로에게 주어진 깊은 깨달음이라는 마음의 성찰에 달려있는 것인지. 복수의 정체에 대하여 명확한 정의를 내리기가 힘들 것 같다. 다만 루드빅이 음악을 연주하며 과거에 자신이 가장 즐겁고 영광스러웠던 때를 그의 죽마고우와 다시 실현하며, 과거의 자신을 용서한 것은 아니었을까? 감히 판단해본다. 어쨌든 이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주인공들은 각자가 처한 농담 같은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신이 처한 시대적인 환경에 모두가 자신의 자리에서 오류일지도 모를 것들을 향해, 그저 최선을 다해 역할을 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루드빅, 제마넥, 헬레나, 루치에, 야로슬라브, 코스트카... 그들은 모두 자신의 자리에서 합당히 해야 할 역할에 충실했던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 소설의 주인공은 모두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지나간 과거는 중요하지 않다. 앞으로 내가 미래에 맡을 역할이 더 중요하다. 우리의 삶은 과거에 얽매여 현실을 부정하는 것보다 미래의 삶을 꿈꾸며 성장하는 것이 더 이롭다. 


나는 '세 치 혀'를 잘못 놀리면  안 된다는 교훈을 얻기도 했다. 가벼운 농담이 나의 무거운 짐으로 부메랑처럼 날아 되돌아 올 수 있으며, 그것을 견디기 위해 얼마나 많은 에너지와 시간이 필요한지 그 고통의 무게를 간접적으로 경험했다. 


위대한 작가의 의도가 어떤 것일지 지금까지의 나의 생각과 모든 판단이 과연 옳은 것인지, 정당한 것인지는 이 글을 읽는 다른 분들이 객관적인 판단을 해줄 것이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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