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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대생의 심야서재 Jun 30. 2019

난 내일 다시 바다로 나갈 테니까

헤밍웨이 <노인과 바다>를 읽고

바다는 노인과 청새치 사이에 펼쳐진다. 바다는 노인에게도 청새치에게도 다정스러운 대상이 아니다. 바다는 오로지 중립의 역할에 충실한다. 노인은 84일 동안 바다와 사투를 벌인다. 하지만 노인에게 운이란 것은 찾아오지 않는다. 노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다로 나선다. 바다의 꿈을 동경하며, 언젠가 낚을 대어를 꿈꾸며, '라마르'라고 외치며 바다를 홀로 안는다. 


라 마르(La mar) : 사람들이 애정을 가지고 바다를 부를 때 쓰는 스페인 말


나는 틀림없지, 하고 다만 운이 내게는 없다는 것뿐이지. 하지만 운이란 누가 알 수 있단 말인가. 운이 오늘 닥쳐올지도 모르며, 아무튼 매일매일이 새 날 아닌가 말이야. 재수가 있다는 것이 무엇보다 좋기는 하지만, 그러나 나로서는 정확하게 하는 거다. 그래서 운이 돌아와 주면, 나는 준비를 다하고 기다리고 있는 셈이니까 말이야.


85일째 노인은 청새치를 낚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노인은 청새치를 보트 위에 끌어올리지 못한다. 아니 끌려간다고 하는 것이 정답이다. 두 존재의 싸움이 바다 한가운데에서 펼쳐진다. 노인도 청새치도 포기할 수 없는 생과 사를 내기로 건 도박이다. 노인은 어깨와 쥐가 난 왼팔로 버틴다. 한쪽이 무너질 때까지 고통스럽지만 기다려야 한다. 싸움의 과정에서 노인은 청새치를 동경하기도 사내답다고 추켜세우기도 한다. 노인과 청새치는 바다에서 흐르는 존재일 뿐이다. 어느 한쪽이 상대방에게 동화되기를 기대하는 관계로. 노인은 청새치를 죽여야 한다. 그것은 그에게 남은 죽음보다 더 숭고하다. 별들은 죽이지 않아도 된다고 하는 그의 시선으로 나는 하늘을 본다. 우리가 태어난 별을 어찌 죽일 수 있으리. 


옳지 않은 일일지도 모르지만 말이야. 나는 이놈에게 사람이 어떤 일을 할 수 있으며, 얼마나 견딜 수 있는가를 보여주어야겠어


노인의 말처럼 별과 달은 인간에게 먼 동경의 대상이다. 죽일 수도 품을 수도 없는 미지의 영역에 떠 있다. 잡으려고 해도 달아나는 별과 달, 죽이지 않아도 되는 운명을 타고난 것이 다행이라고 말하는 노인의 말이 묵직하다. 노인은 손에 닿은걸, 죽여야 한다. 생명이 태어나는 바다에 속한 청새치를 죽여야 한다. 죽이지 못하면 돌아갈 수 없는, 그것은 곧 패배라는 걸 받아들여야 하기에 노인에겐 선택지가 없다. 인간은 패배하도록 만들어진 건 아니니까, 파괴될 수는 있어도. 


노인은 어느 순간 청새치와 대결에서 한걸음 물러선다. 청새치를 노리는 상어 무리를 괴멸시키기 위해 역설적이게도 노인은 청새치를 보호해야 한다. 청새치와 싸우면서도 또 다른 경쟁자를 물리치기 위해 싸워야 하는 상황. 노인은 자신이 소유한 모든 것들로 승부를 건다. 작살로 노로, 수단을 가리지 않고 상어떼를 바다 깊은 곳으로 잠재운다. 싸움은 결국 종지부를 찍는다. 상어에게 청새치를 빼앗기고 만 것이다. 오직 뼈만 남은 청새치를 보트에 끌고 그는 집에 도착한다. 아무 일이 없었다는 듯이 긴 잠에 빠진다.


참, 담백하다 <노인과 바다> 소설도 소설 속 노인의 삶도 담백하다. 노인과 바다라는 단순한 소재로 이렇게 담담하면서도 생동감 있게 엮을 수 있다니 정말 대단하다. 잘 쓴 글은 읽어도 읽어도 새롭고 또 읽어보고 싶어 진다. <노인과 바다>가 나에겐 그렇다. - 꾸믈꾸리.


노인의 긴 잠이 시작됨과 동시에 나는 깨어난다. 노인은 정신을 차리라며 바다로 나설 것을 명령한다. 삶은 복잡하고 나는 그 형형색색을 자랑하는 삶의 나머지 결을 채색하기 위해 붓을 든다. 붓질은 담백해야 한다. 거침없으면서도 담담하게 진행해야 한다. 


정여울 작가가 대중 특강 자리에서 한 말이 떠오른다. “나는 오랫동안 고통을 받지 않는 방법을 연구해왔다. 하지만 결국 실패했다. 하지만 값진 실패였다. 고통받지 않는 방법보다 고통받을지라도 생의 모든 자극을 피하지 않는 방법을 깨닫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고통을 피한다는 것은 사랑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이고 타인의 관심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이고 결국 인생 자체로부터 도망치는 것이다. - 신선


고기잡이 항해는 생고생의 연속이다. 생사가 오고 가는 거대한 물고기와의 싸움이니 노인의 입장에서도 뼛속까지 긴장하는 순간들을 종종 맞게 된다. 그때마다 그는 수많은 혼잣말을 하며 자기 자신과 대화한다. 절대 패배할 수 없다고. 지치지 않는 그의 저력은 아마도 이런 신념들에서 나오지 않을까? - 날마다


"But man is not made for defeat, " he said. "A man can be destroyed but not defeated."

"하지만 인간은 패배하려고 태어나지 않았어. 인간은 파괴될 수는 있지만 패배하지는 않아."


패배와 파괴, 그 차이는 무엇인가? 내가 졌다고 인정하는 순간 패배하지 않을까? 패배든 파괴든 회복할 수 없는 운명의 상황이다. 인간을 파괴의 상황으로 몰아붙일 순 있어도 자유의지는 꺾지 못할 것이다. 노인은 청새치를 노리는 상어와 맞서서 싸웠다. 물론 고기를 상어에게 뺏겨 파괴되었지만, 패배하지 않았다. - 일과삶


패배의 마지막은 파괴일까? 부활일까? 패배하고 나서도 우린 파괴를 거부할 수 있을까? 패배를 거듭한다면, 노인이 85일째 이후에도 계속 패배하여 마지막에 파괴되어야 한다면, 그의 의지는 여전히 살아 있을까? 고통스러울지라도 패배를 인정할 필요가 있다. 완벽하게 파괴되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인생은 강렬한 단맛의 사탕이라기보다는 은근한 맛을 품은 쌀밥과 같다. 우리는 끊임없는 도전을 통해 인생을 맛보며 살아간다. 그것은 단맛이기도 쓴맛이기도 신맛이기도 하다. 이 모든 맛을 다 더해보면 인생은 담백함 그 자체가 아닐까. 청새치를 잡기 위해, 또한 잡은 청새치를 상어 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사투를 벌인다. 다시 굴러 떨어질 바위를 밀어 올리는 시지프스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그는 왜 위험을 무릅써가며 청새치를 잡았을까. 읽으면서 그의 심리를 추적했다. 내가 산티아고였다면 어떻게 했을까. 독자라면 누구나 상상해봤을 가정을 해봤다. 팔십이 넘은 노구는 조각배보다 더 큰 청새치 앞에서 두려움을 느꼈을 테고 십중팔구 줄을 끊고 플랜 B로 넘어갔을 것 같다.  - 타마


내 진짜 삶은 어디에 있는가, 난 치열하게 그 삶을 살아내고 있는가. 아니면 언제고 사자 꿈만 꾸며 그 꿈이 현실인 듯 진짜 삶이 무언지도 모른 채 세월을 보내고 있는가. 어쩌면 진짜 삶은 편히 발 딛고 있는 지금에 있지 않을지도 모른다 - dahl


삶은 살아가는 이에게 버거운 과제를 계속 던져준다. 때론 온몸이 쑤시는 상황에서 승산 없는 싸움을 해야 하는 상황과 마주하기도 하고, 사력을 다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해도 그 노력의 과실을 얻지 못하는 경우도 생긴다 때론, 아무것도 하지 않을 걸 그랬다는 패배감, 절망감도 몰려든다. 극기의 인내심을 보여준 산티아고 노인조차 ‘애초에 바다에 나가지 않았으면 좋았을걸’, ‘그 고기를 낚지 않았으면 좋았을걸’하고 후회하는 순간들이 있지 않던가. - 티라노


노인과 바다. 라이프 오브 파이에서 보여주는 믿음. 그것이 신이 되었든. 자신이라는 신이든. 본인이 설정한 삶의 가치와 그 믿음을 확고히 한다면 실패에 뼈만 남는 인생이 되었든 엄청난 대어를 낚는 행운이 가득한 인생이든 해피엔딩을 결정하는 기준은 본인의 가치에 달린 것이 아닐까. - 조앤


타마님의 말처럼 인생은 은근한 맛의 쌀밥이다. 도전은 실패와 성공을 낳는다. 우린 중간쯤에 서 있지 않나? 중간의 맛은 정체가 없다. 은근하다. 쓴맛과 단맛 사이에서 희석되는 맛이 인생이다. 두려움에 떨면서도 희망을 다시 꿈꾸는 것이 인간이 원하는 맛이다. 그 맛에 우린 삶을 살아간다. 그것이 진짜 삶이라고 믿으며.


이 소설은 헤밍웨이가 한물갔어도 그를 지지하는 팬을 위한 일종의 헌사였을지도 모른다. 세상 모두가 등을 돌려도 단 한 명이 나를 믿어준다면 우리는 언제든지 일어서 위대한 일을 이뤄낼 수 있다. 그동안 누가 나를 일으켜주었고, 내가 누구를 일으켜 주었을까? - 형미


그분들에게 중요한 것은 그 주장이 아니라 열정에 넘쳐 무언가를 할 것이 있다는 것이 아닐까? 사체만 남은 고기를 고집스럽게 매달고 있던 노인의 고집과 닮아 보인다. “꽃보다 할배”라는 프로에서 관광지를 보는데 ‘이번이 마지막일지 모른다’라고 말씀하시던 모습이 생각났다. 그분들이 아니 노인에게는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다음에 보지 뭐…’ 이렇게 쉽게 생각하던 것도 노인에게는 의미가 달리 느껴질 수도 있다. 다음을 기약하기에는 신체도 정신도 점점 힘들어짐을 느끼는 것이다. - heaven


한물간 헤밍웨이, 역시 같은 운명인 산티아고 노인, 두 사람이 품은 인생의 본질이 이 소설에 담겨 있을지도 모른다. 산티아고와 헤밍웨이는 생의 마지막 순간을 앞둔 동지가 되었을지도. 


노인의 모든 것이 늙거나 낡아 있었다. 하지만 두 눈만은 그렇지 않았다. 바다와 똑같은 빛깔의 파란 두 눈은 여전히 생기와 불굴의 의지로 빛나고 있었다.


노인은 사자 꿈을 꾸며 이렇게 외칠 것 같다. 


“인생은 원래 허무한 거야. 그런데 그 허무함을 품고 살아야 하는 것도 인생이야. 그러니 허무와 무력감을 사랑하면 돼. 만약, 두려움이든 망각이든 장벽이든 죽음의 밑바닥이든 싸워야 한다면 물러서지 마. 그냥 우직하게 정면으로 맞서. 쓰러지더라도 절대 무릎은 꿇지 말고. 등은 보여주지 말라고. 네가 싸운 기록은 남아있으니까. 다음 기회가 찾아오면 또 싸우면 되는 거야. 난 내일 다시 바다로 나갈 테니까. 무엇이든 극복할테니까.” 


자세한 후기는 공대생의 심야서재 카페에서...

https://cafe.naver.com/wordmast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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